“기자 양반, 우리 아들 한번만 더 만나게 해주세요. 2박3일만 (상봉행사를) 하니 별 말도 못했어요. 만나서는 기력이 없어서 밥도 못 먹고 얘기도 많이 못했습니다.”
지난해 2월 30여년만에 작은 아들을 만난 박규순(77) 할머니는 기자와의 통화 내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몸져누운 채로 전화를 받는 듯한 박 할머니의 목소리에서는 아들 두 명이 모두 납북됐던 지난 72년 이후의 고통과 한과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박 할머니는 “다리만 좀 아플 뿐 다른 곳은 건강하다”며 “아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아들 김태준(50)씨와 재상봉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할머니는 “2개월전에 어디에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다시 만나게 해주려는 것 아니냐”면서 “소식이라도 들으면 안 좋겠냐”고 희망 섞인 반문을 했다.
오랜 세월 오매불망 보고파하던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어머니 중에는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2월 50여년만에 북측 아들 림동규(70)씨를 만났던 김금남 할머니는 96세를 일기로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며느리는 “시어머님이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신 후 소원풀이했다고 좋아하셨다”며 “한 달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통일만 되면 원도 한도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김 할머니는 상봉행사장에서 50여년만에 아들을 만난 날 저녁 만찬 도중 쓰러지는 등 평소에도 고혈압으로 고생을 해왔다.
아들을 만나기 전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며칠간 식사를 거르기도 했던 김 할머니는 이제 영원한 안식처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말신 할머니도 16년전 납북된 북측 아들 김상섭(54)씨를 지난해 9월 만난 후 3개월만에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김 씨의 남측 형 상규(57)씨는 “지난해 12월23일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어머니께서 동생을 만나고 돌아가셨으니 어머니 소원은 푸신 것 같다”고 말했다. 상규씨는 “어머니 49제를 치를 때 동생 생각이 많이 났다”며 나눌 수 없는 형제애를 아쉬워했다.
북녘에 부모를 두고 온 자녀의 마음도 역시 편치 못하다.
지난해 9월 8차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북측 어머니 박옥순(81) 할머니와 만난 임석주(63)씨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몇 달 동안 마음이 아파 고생했다”며 “지금은 많이 안정됐지만 동생과 만날 때마다 어머니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51년 친정에 잠시 다녀오겠다던 어머니는 그 길로 행방불명돼 임 씨 형제와 50여년 이산의 한을 남기게 됐다.
헤어질 때 어머니 얼굴도 알지 못하던 임 씨의 동생 승주(58)씨는 지난해 9월 작별상봉에서 “어머니”를 외치며 박 할머니의 한복 치마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8차 상봉행사에서 북의 어머니 복점순(93) 할머니를 만났던 남측 아들 김성태(75)씨는 “지금도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나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지 않았겠는가하고 생각한다”며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늦게 나오셔서 얘기도 많이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 씨는 “이번에 10차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한다니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말했다.
/연제호 기자 news21@naeil.com
지난해 2월 30여년만에 작은 아들을 만난 박규순(77) 할머니는 기자와의 통화 내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몸져누운 채로 전화를 받는 듯한 박 할머니의 목소리에서는 아들 두 명이 모두 납북됐던 지난 72년 이후의 고통과 한과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박 할머니는 “다리만 좀 아플 뿐 다른 곳은 건강하다”며 “아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아들 김태준(50)씨와 재상봉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할머니는 “2개월전에 어디에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다시 만나게 해주려는 것 아니냐”면서 “소식이라도 들으면 안 좋겠냐”고 희망 섞인 반문을 했다.
오랜 세월 오매불망 보고파하던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어머니 중에는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2월 50여년만에 북측 아들 림동규(70)씨를 만났던 김금남 할머니는 96세를 일기로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며느리는 “시어머님이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신 후 소원풀이했다고 좋아하셨다”며 “한 달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통일만 되면 원도 한도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김 할머니는 상봉행사장에서 50여년만에 아들을 만난 날 저녁 만찬 도중 쓰러지는 등 평소에도 고혈압으로 고생을 해왔다.
아들을 만나기 전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며칠간 식사를 거르기도 했던 김 할머니는 이제 영원한 안식처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말신 할머니도 16년전 납북된 북측 아들 김상섭(54)씨를 지난해 9월 만난 후 3개월만에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김 씨의 남측 형 상규(57)씨는 “지난해 12월23일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어머니께서 동생을 만나고 돌아가셨으니 어머니 소원은 푸신 것 같다”고 말했다. 상규씨는 “어머니 49제를 치를 때 동생 생각이 많이 났다”며 나눌 수 없는 형제애를 아쉬워했다.
북녘에 부모를 두고 온 자녀의 마음도 역시 편치 못하다.
지난해 9월 8차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북측 어머니 박옥순(81) 할머니와 만난 임석주(63)씨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몇 달 동안 마음이 아파 고생했다”며 “지금은 많이 안정됐지만 동생과 만날 때마다 어머니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51년 친정에 잠시 다녀오겠다던 어머니는 그 길로 행방불명돼 임 씨 형제와 50여년 이산의 한을 남기게 됐다.
헤어질 때 어머니 얼굴도 알지 못하던 임 씨의 동생 승주(58)씨는 지난해 9월 작별상봉에서 “어머니”를 외치며 박 할머니의 한복 치마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8차 상봉행사에서 북의 어머니 복점순(93) 할머니를 만났던 남측 아들 김성태(75)씨는 “지금도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나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지 않았겠는가하고 생각한다”며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늦게 나오셔서 얘기도 많이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 씨는 “이번에 10차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한다니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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