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진정한 케인지언 아무도 없나
이 국 영 성균관대학교 교수·정치학
한국경제가 장기불황의 징후를 보이고 정부의 대처방안이 재정확대정책으로 선회하자 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경기후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자지출은 유효수요의 증대를 목표로 하며, 이런 정책은 케인즈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3류 경제학 교과서를 읽은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런 처방은 경제위기가 발생한 경우의 임시방편으로서 단기적인 대책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고전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현대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즈의 이론은 단기간에만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발전전망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 독일학계에서는 종전이후 서구경제가 장기적으로 민간수요가 약화되어 정체될 것을 예상한 케인즈의 평가가 놀라울 정도로 적중하였다고 놀라고 있다. 그의 이러한 평가는 전후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단계를 이론적으로 전망한 1943년 영국 대장성의 내부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론이 장기적 발전이론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단기적인 경기역행적 재정정책은 경기순환에서 불황이라는 비상시에 대한 일종의 비상조치이다. 비상조치라는 의미는 대개 장기적인 완전고용 정책의 구상이 결여된 채 도입되는 정책이라는 뜻이다.
케인즈의 진짜 불황 대책
그러므로 케인즈의 경제정책은 단기적인, 경기역행적인 재정정책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최근 서구와 일본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케인즈주의 정책기조의 핵심은 소득평준화 내지 구매력 평준화이다. 즉 분배불균등의 모순은 비자발적 실업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넓은 범위의 소득계층, 실업자, 연금생활자의 구매력부족과 부유층의 과대저축(율)은 체계적으로 저축과 투자 간의 불일치를 야기하여 불황과 실업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경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소득분배의 평준화가 필수적이게 된다. 이에 대한 정책적 수단은 조세정책에서 엄격한 누진세와 저소득층에 유리한 공공지출의 확대가 기본이 된다.
케인즈는 결코 혁명가도 아니며, 이른바 좌파이론가도 아니며, 사회민주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전에 영국 노동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다만 “현명하게 관리되는 자본주의는 경제적 과제를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 훌륭하게 충족시킬 개연성이 높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재계, 언론계, 학계의 시비는 정부 정책의 정당성 여부는 관계 없이 혼란을 주고 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주로 ‘좌파적’, ‘평등주의적’, ‘반시장적’, ‘사회주의적’, ‘분배우선’이라는 말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한국 국민에게는 ‘좌파’ 또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뼈아픈 경험을 겪으면서 각인되어 왔기 때문에, 최소한 학계 인사들은 그 용어의 사용에서 신중해야 한다.
그런 뼈아픈 의미로 ‘좌파’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가령 레이건이나 아버지와 아들 부시에 비해 클린턴은 좌우 2분법으로 보면 좌파인가? 그렇다면 그런 좌파는 바람직하기도 하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좌파정권인가? 제3의 길은 사회주의 노선인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정치권을 바라보는 눈도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 아마도 참여정부가 북한의 ‘사이비 좌파’인 공화국 관료집단과 화해정책을 추구한다고 그걸 비판하기 위해 이 정부가 ‘좌파유화적’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경제정책이 좌파거나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데마고기(demagogy)라는 의혹을 받을 수가 있다.
‘좌파’용어 사용 신중해야
참여정부의 정책기조가 평등주의적이거나 분배우선적이라는 비판도 타당한가? 정계가 아닌 언론계나 학계의 비판은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한국의 소득분배는 외환위기 이후 현저히 악화돼 소득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0년대 0.293에서 2000~2003년 0.314로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또한 한국의 소득불평등도는 비슷한 시기의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할 때 멕시코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참여정부의 한 정책 브레인이 어떤 학회에서 “참여정부가 지난 1년반 동안 대대적 소득재분배 정책을 써서 기업에 지나친 부담을 준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한 반문은 타당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는 케인즈가 말하는 확실한 완전고용 정책의 구상이 없이 단기적인 확대재정정책만을 실행해야만 하는 정치 세력관계를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판가들은 일본의 적자재정이 불황을 막지 못했다고 하지만, 주어진 정치구도에서 그런 적자재정이라도 없었다면 일본발 경제대공황은 전세계를 강타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이 국 영 성균관대학교 교수·정치학
한국경제가 장기불황의 징후를 보이고 정부의 대처방안이 재정확대정책으로 선회하자 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경기후퇴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자지출은 유효수요의 증대를 목표로 하며, 이런 정책은 케인즈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3류 경제학 교과서를 읽은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런 처방은 경제위기가 발생한 경우의 임시방편으로서 단기적인 대책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고전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현대 신자유주의자들은 케인즈의 이론은 단기간에만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케인즈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발전전망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 독일학계에서는 종전이후 서구경제가 장기적으로 민간수요가 약화되어 정체될 것을 예상한 케인즈의 평가가 놀라울 정도로 적중하였다고 놀라고 있다. 그의 이러한 평가는 전후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단계를 이론적으로 전망한 1943년 영국 대장성의 내부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론이 장기적 발전이론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단기적인 경기역행적 재정정책은 경기순환에서 불황이라는 비상시에 대한 일종의 비상조치이다. 비상조치라는 의미는 대개 장기적인 완전고용 정책의 구상이 결여된 채 도입되는 정책이라는 뜻이다.
케인즈의 진짜 불황 대책
그러므로 케인즈의 경제정책은 단기적인, 경기역행적인 재정정책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최근 서구와 일본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케인즈주의 정책기조의 핵심은 소득평준화 내지 구매력 평준화이다. 즉 분배불균등의 모순은 비자발적 실업의 본질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넓은 범위의 소득계층, 실업자, 연금생활자의 구매력부족과 부유층의 과대저축(율)은 체계적으로 저축과 투자 간의 불일치를 야기하여 불황과 실업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경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소득분배의 평준화가 필수적이게 된다. 이에 대한 정책적 수단은 조세정책에서 엄격한 누진세와 저소득층에 유리한 공공지출의 확대가 기본이 된다.
케인즈는 결코 혁명가도 아니며, 이른바 좌파이론가도 아니며, 사회민주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전에 영국 노동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다만 “현명하게 관리되는 자본주의는 경제적 과제를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 훌륭하게 충족시킬 개연성이 높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재계, 언론계, 학계의 시비는 정부 정책의 정당성 여부는 관계 없이 혼란을 주고 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주로 ‘좌파적’, ‘평등주의적’, ‘반시장적’, ‘사회주의적’, ‘분배우선’이라는 말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한국 국민에게는 ‘좌파’ 또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뼈아픈 경험을 겪으면서 각인되어 왔기 때문에, 최소한 학계 인사들은 그 용어의 사용에서 신중해야 한다.
그런 뼈아픈 의미로 ‘좌파’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가령 레이건이나 아버지와 아들 부시에 비해 클린턴은 좌우 2분법으로 보면 좌파인가? 그렇다면 그런 좌파는 바람직하기도 하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좌파정권인가? 제3의 길은 사회주의 노선인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정치권을 바라보는 눈도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 아마도 참여정부가 북한의 ‘사이비 좌파’인 공화국 관료집단과 화해정책을 추구한다고 그걸 비판하기 위해 이 정부가 ‘좌파유화적’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경제정책이 좌파거나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데마고기(demagogy)라는 의혹을 받을 수가 있다.
‘좌파’용어 사용 신중해야
참여정부의 정책기조가 평등주의적이거나 분배우선적이라는 비판도 타당한가? 정계가 아닌 언론계나 학계의 비판은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한국의 소득분배는 외환위기 이후 현저히 악화돼 소득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0년대 0.293에서 2000~2003년 0.314로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 또한 한국의 소득불평등도는 비슷한 시기의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할 때 멕시코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참여정부의 한 정책 브레인이 어떤 학회에서 “참여정부가 지난 1년반 동안 대대적 소득재분배 정책을 써서 기업에 지나친 부담을 준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한 반문은 타당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는 케인즈가 말하는 확실한 완전고용 정책의 구상이 없이 단기적인 확대재정정책만을 실행해야만 하는 정치 세력관계를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판가들은 일본의 적자재정이 불황을 막지 못했다고 하지만, 주어진 정치구도에서 그런 적자재정이라도 없었다면 일본발 경제대공황은 전세계를 강타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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