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술에 절은 지혜(안병찬 2004.10.01)

지역내일 2004-09-30 (수정 2004-10-01 오후 1:46:52)
술에 절은 지혜
안 병 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술은 사람을 사물에서 해방시킨다. 술을 마신 사람은 마음이 자유롭게 풀려 걸걸해진다. 본래 간땡이가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술기운을 빌어 큰일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중국 고전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무송이 그렇다. 그는 주막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 목적지인 경양강을 향해 산중을 전진하다가 대호와 딱 마주친다. 반공에 치솟으며 벼락치듯 달려드는 대호를 슬쩍 비켜 무송은 맨손으로 그 놈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무쇠주먹으로 60-70 차례 난타하여 대호를 잡고 만다. 취기로 호랑이와 맞서는 호연지기를 그린 명장면이다.
술은 병도 준다. 일제시대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춘원 이광수는 신문기자의 소양 아홉 가지를 소개하는 가운데 여자 및 돈과 함께 술을 조심하라고 했다. ‘신문기자의 3대기(三大忌)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주(酒), 색(色), 금(金)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주, 색, 금을 따르는 이에게는 정의를 바랄 수 없고 오직 부패를 바라기 때문입니다’라고 쓴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치인을 포함한 취재원은 기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주, 색, 금을 미끼로 쓰는 것은 잘 알려진 관행이다. 취재원은 취재기자를 흡수하여 포로로 삼으려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박 대통령과 논설위원들의 술판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인 송건호 씨’의 술자리 이야기도 취재원과 기자의 관계 모형으로 보면 재미있다.
“유신 전 8대 국회 때, 박 대통령은 대여섯 신문사의 정치 담당 논설위원을 청와대 본관의 한 방에 초대하여 푸짐하게 술을 냈다. 박 대통령이 계속 술잔을 돌려 모두들 취해 버렸다. 대통령과 논설위원 사이라는 벽이 거의 무너졌었다. 나중에 공보 비서관이 전한 이야기이다. 당시 동아일보 송건호 씨가 화장실에 갔다가 우연히 박 대통령과 나란히 소피를 보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송건호 씨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송 선생, 내가 송 선생을 무언가 꼭 한 가지 도와주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각하,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 세워졌다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욕심 없고 순진한 부탁이다. 그 덕(?)에 송건호 씨는 나중에 산업시찰단에 포함되었지만, 사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경향신문 아무개는 김일성이 여럿이었다는 것을 연구하겠다고 하여 두둑한 연구 자금을 타냈고 후일 ‘김일성 열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송건호 씨는 대쪽같은 선비였다….”
이상은 언론인 출신의 전 노동부장관 남재희 씨가 최근 펴낸 ‘언론·정치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년’에 들어있는 한 대목이다. 남재희 씨는 정치인의 촌지와 관련하여 DJ를 상기한다.
“4·19 이후 새로 탄생한 민국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집권 민주당의 김대중 대변인을 만나 3시간의 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내가 일어서려니 흰 봉투 하나를 내밀며 술값이나 하란다. 이를 사양하자 김대중의 얼굴이 굳어갔다. 30여 년 후 한 상가에서 만난 DJ는 ‘옛날에 내가 촌지를 주었어도 안 받은 사람이 남 의원이지’하고 옛날 옛적 이야기를 했다.”
“컴퓨터 같다. 그 기억력이여! 오히려 두려운 느낌이다”라고 필자는 쓰고 있다.
남재희 씨는 이 책에서 ‘당대의 주당’을 자처하며 각계 인사들과의 술자리 40년의 풍류를 그렸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르는 5대 대통령의 술자리 삽화를 정리한 것이 절정을 이룬다.

술자리는 단절과 멈춤이 없네
그가 들려주는 각계인사의 취한 모습과 일화는 방대하다. 등장인물은 매우 다채롭고 그 정치적 스펙트럼은 우에서 좌까지 사통팔달이다. 술자리 삽화들은 개발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에는 ‘쥐 목에 방울달기’를 말하는 진보당원 윤길중, ‘수호지’의 급시우 송강을 닮은 선비 송지영, 운동권이고 혁신계인 장기표, 권영길 후배와의 술자리 추억담이 흐른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상주(商酒)나 색주(色酒)는 목적이 있으나 술의 진체를 모르는 단계, 술의 참된 경지를 배우는 학주(學酒)에 이르러서야 초급에 비로소 주졸(酒卒)이 된다고 했다. 술에 눈을 뜬 애주(愛酒), 진경을 체득한 탐주(耽酒), 주도를 수련하는 폭주(暴酒)는 통달한 경지요, 그 위로는 주도 삼매에 든 장주(長酒)와 유유자적하는 낙주(樂酒)가 있고 끝으로 폐주(廢酒)에 이르러서는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되는 단계라고 했다.
남재희 씨의 ‘나의 문주 40년’에 묻어나는 것은 술에 절은 지혜이다. 술자리는 단절이 없고 멈춤이 없다. 과거와 미래를 한 두름으로 꿰어 맨다. 그는 술의 진경을 체득한 탐주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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