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민족언론·통일언론 절규 아직 유효”
현직기자가 쓴 ‘서른둘에 생을 마감한 젊은 언론인 조용수’의 삶과 열정
지역내일
2004-12-13
(수정 2004-12-13 오후 12:22:30)
조용수와 민족일보
원희복 지음
/도서출판 새누리 /2만원
‘1961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날 32세의 젊은 언론인이 사형당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그는 이날 언론인의 사형이라는 역사상 최대의 언론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젊은 언론인 조용수는 5·16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경향신문 원희복 전국부 차장이 지난 1995년에 출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의 증보판을 최근 냈다. 10년전 발행한 초판이 묻혀진 조용수 개인 역정을 발굴, 정리한 것이라면 이번에 보완한 증보판은 조용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요구한, 말하자면 역사의 패배자들의 몸부림 흔적을 담고 있다. 광복이후 생사를 건 이념 대립에서 이긴 ‘승자’들은 지금까지 60년동안 부와 명예는 물론 진리와 양심까지 독식해 왔다. 60년이면 60갑자가 한바퀴 돌아 원래로 돌아오는 회갑의 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갈등 60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은 과거사 재평가 문제와 함께 언론이 또다른 화두다. 이같은 시기 서른둘에 생을 마감한 한 언론인, 통일운동가의 삶과 열정을 새겨두는 것은 우리에게 또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조용수가 생명으로 절규했던 바로 그 문제인 민족언론, 통일언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거운 과제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에서 시작돼 평화통일운동으로 발전한 4·19 공간의 한복판에 섰던 인물 중 한명이 젊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은 “조용수는 1950년대 재일동포사회에서 ‘총련계’가 아닌 ‘민단계’로 활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사회주의자라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모국의 4·19에 고무돼 귀국, 언론활동을 통해 혁신적 분위기 강화 및 평화통일운동 확산을 모색하다 5·16 군사정권의 희생양이 됐다”고 평가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건이 애써 외면받아 왔다. 조용수와 민족일보,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전 세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암울한 자화상이다.
“조용수는 냉철한 통찰력을 가진 언론인이었고, 민족을 생각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통일운동가였다.” 저자의 평가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원희복 지음
/도서출판 새누리 /2만원
‘1961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날 32세의 젊은 언론인이 사형당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그는 이날 언론인의 사형이라는 역사상 최대의 언론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젊은 언론인 조용수는 5·16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경향신문 원희복 전국부 차장이 지난 1995년에 출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의 증보판을 최근 냈다. 10년전 발행한 초판이 묻혀진 조용수 개인 역정을 발굴, 정리한 것이라면 이번에 보완한 증보판은 조용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요구한, 말하자면 역사의 패배자들의 몸부림 흔적을 담고 있다. 광복이후 생사를 건 이념 대립에서 이긴 ‘승자’들은 지금까지 60년동안 부와 명예는 물론 진리와 양심까지 독식해 왔다. 60년이면 60갑자가 한바퀴 돌아 원래로 돌아오는 회갑의 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갈등 60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은 과거사 재평가 문제와 함께 언론이 또다른 화두다. 이같은 시기 서른둘에 생을 마감한 한 언론인, 통일운동가의 삶과 열정을 새겨두는 것은 우리에게 또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조용수가 생명으로 절규했던 바로 그 문제인 민족언론, 통일언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거운 과제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에서 시작돼 평화통일운동으로 발전한 4·19 공간의 한복판에 섰던 인물 중 한명이 젊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은 “조용수는 1950년대 재일동포사회에서 ‘총련계’가 아닌 ‘민단계’로 활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사회주의자라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모국의 4·19에 고무돼 귀국, 언론활동을 통해 혁신적 분위기 강화 및 평화통일운동 확산을 모색하다 5·16 군사정권의 희생양이 됐다”고 평가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건이 애써 외면받아 왔다. 조용수와 민족일보,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전 세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암울한 자화상이다.
“조용수는 냉철한 통찰력을 가진 언론인이었고, 민족을 생각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통일운동가였다.” 저자의 평가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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