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돈 신임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해 6월 5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7개월의 휴지기를 거친 끝에 다시 공직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력서에 나타난 오 장관의 모습은 지역의 명문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행정고시 합격(14회) 이후 청와대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그리고 부산시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화려’ 그 자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내면의 성숙함을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오 장관은 어린시절부터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그가 보이는 부드러움과 친화력도 이런 열등감 극복 과정에서 나온 내면의 성숙함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오 장관은 자신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로 ‘말더듬이’ ‘작은 키’ ‘이름’ 그리고 ‘집안 분위기’ 등을 꼽았다.
오 장관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중증 말더듬이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돌아가면서 책을 읽을 때 차례가 돌아오면 마음 속으로 읽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푹 떨굴 정도였다고. “그렇지, 다음”하고 넘어가곤 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 시장은 ‘이대론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루 1시간씩 무조건 발표하기로 결심, 수업시간 선생님의 질문에 무조건 손을 들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시키면 벌떡 일어나, “모, 모르겠습니다” 하고 앉기도 했다고. 오 시장은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라며 “아직도 완전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위직으로 오를수록 말더듬이 증세는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오 장관은 “책임감이 말더듬는 증세를 고치더라”고 덧붙였다.
160cm 남짓한 작은 키도 극복 대상이었다. 오 장관은 “작은 키 때문에 못한 것은 없다”며 “어릴 때 싸움 대회에선 2등을 했다”고 말했다.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귀고 싶은 여학생을 사귀지 못한 경우는 또한 없었다는 게 오 시장의 주장이다.
‘오거든 가거든’ ‘큰 돼지’ ‘빅 피그’ 등 학년과 급수를 바꿔가며 따라붙은 이름과 관련된 별명들도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엔 부친에게 이름을 바꿔달라고도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좋은 이름이니 언젠가는 이름 값 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만 들어야 했단다. 대학에선 친구들이 ‘박사’라고 불러 주었는데 오 장관은 실제 ‘박사(동아대학교 행정학)’가 되었다.
오 장관은 자신이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무엇보다 집안 분위기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빈 손으로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로 시작해 부산의 대표적인 제조업체까지 일군 과정 입지전적인 인물. 오 시장은 부모님을 보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졌다 밝혔다.
/부산=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이력서에 나타난 오 장관의 모습은 지역의 명문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행정고시 합격(14회) 이후 청와대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그리고 부산시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화려’ 그 자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내면의 성숙함을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오 장관은 어린시절부터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그가 보이는 부드러움과 친화력도 이런 열등감 극복 과정에서 나온 내면의 성숙함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오 장관은 자신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로 ‘말더듬이’ ‘작은 키’ ‘이름’ 그리고 ‘집안 분위기’ 등을 꼽았다.
오 장관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중증 말더듬이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돌아가면서 책을 읽을 때 차례가 돌아오면 마음 속으로 읽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푹 떨굴 정도였다고. “그렇지, 다음”하고 넘어가곤 하는 선생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 시장은 ‘이대론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루 1시간씩 무조건 발표하기로 결심, 수업시간 선생님의 질문에 무조건 손을 들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시키면 벌떡 일어나, “모, 모르겠습니다” 하고 앉기도 했다고. 오 시장은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라며 “아직도 완전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위직으로 오를수록 말더듬이 증세는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오 장관은 “책임감이 말더듬는 증세를 고치더라”고 덧붙였다.
160cm 남짓한 작은 키도 극복 대상이었다. 오 장관은 “작은 키 때문에 못한 것은 없다”며 “어릴 때 싸움 대회에선 2등을 했다”고 말했다.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귀고 싶은 여학생을 사귀지 못한 경우는 또한 없었다는 게 오 시장의 주장이다.
‘오거든 가거든’ ‘큰 돼지’ ‘빅 피그’ 등 학년과 급수를 바꿔가며 따라붙은 이름과 관련된 별명들도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엔 부친에게 이름을 바꿔달라고도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좋은 이름이니 언젠가는 이름 값 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만 들어야 했단다. 대학에선 친구들이 ‘박사’라고 불러 주었는데 오 장관은 실제 ‘박사(동아대학교 행정학)’가 되었다.
오 장관은 자신이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무엇보다 집안 분위기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빈 손으로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로 시작해 부산의 대표적인 제조업체까지 일군 과정 입지전적인 인물. 오 시장은 부모님을 보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졌다 밝혔다.
/부산=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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