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송영길은 늘 바쁘다. 상임위 활동과 각종 연구모임 참석, 지역구 보살피기 외에도 스스로를 쉴틈없이 만드는 일에 익숙하다.
이달초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일본어학과에 편입을 했다. ‘동북아 중심 국가 시대를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 의원의 ‘어학 도전’은 4년여전에 시작됐다. 초선이던 2000년 8월 몽골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북한 대표단의 영어실력에 충격을 받으면서다. 이때부터 영어와 중국어에 틈틈이 몰두했다. 어학공부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를 한가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그의 또다른 습관은 책읽기와 글쓰기다. 어디를 가든 작은 수첩에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 국내든 해외든 그가 가는 곳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작은 수첩이 언제나 함께 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일주일에 서너차례 올리는 ‘의정일기’는 이런 글쓰기 습관의 결과다.
◆학생에서 노동자, 인권변호사로 = 국회의원 송영길은 ‘황소’로 불린다. 부지런함과 뚝심으로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조치로 84년 연세대 첫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그는 졸업식장 대신 서대문구치소로 향하는 신세가 됐다.
경영학도였던 그가 택한 사회진출은 ‘위장취업’이었다. 85년 인천의 대우자동차 르망공장에서 배관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삶 한복판에 뛰어든다.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 송영길은 선퍼니처 가구공장, 까치마을 장갑공장 대진산업으로 직장을 옮겨다니다 독일 인권재단의 도움으로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열었다.
이어 ‘운수노보사’를 운영하며 택시노동자 운동과 노동 상담활동에 주력했다. 송 의원의 보좌진들은 “글쓰기는 이 시절 몸에 밴 습관”이라고 귀띔한다.
인천지역 노동운동가로 살던 그가 91년 어느날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훌쩍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90년 사회주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다.
한달여의 여행을 마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재야 노동운동이 지닌 한계를 절감하면서 ‘제도내 개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92년 서울로 상경,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 준비로 방향을 틀었다.
몇해 후 그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왔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의 인권변호사로 강간치상죄로 누명을 쓴 택시기사, 억울하게 숨진 노점상 등을 위해 밤낮으로 뛰었다.
국회의원 송영길의 주변에는 ‘20년 지기’들이 많다. 노동운동으로 인권변호사로 지내던 시절 맺었던 인간관계가 ‘묵은 된장처럼’ 오래 이어지기 때문이다.
송 의원의 핵심참모는 “무뚝뚝하고 잔정을 표현못해 오해도 사지만, 진실하고 믿음을 주는 스타일이라 한번 사귄 관계는 무척 오래간다”고 설명한다.
열린우리당 당의장 경선에 뛰어든 후 각 지방을 돌때마다 송 의원은 택시로 움직인다. 과거 택시노조운동 시절 함께 했던 동료들이 대구에서 구미로, 구미에서 춘천으로 ‘릴레이 자원봉사 운전기사’ 노릇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열적 개혁’ 논쟁 = 당의장 경선에 나선 송 의원의 키워드는 두가지다. ‘정통개혁론’, ‘함께하는 개혁론’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남북화해와 개혁의 흐름을 통합해야 다음번 집권의 초석이 마련되고, 여기에 초재선의 젊은 세대가 허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당의장 본선 대결이 들어서자마자 송 의원은 ‘분열적 개혁’에 대한 공격으로 논쟁의 한축에 서 있다.
20일 울산시당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도토리 키재기 하는 반개혁, 비개혁 논쟁은 우리당을 약화시킨다”며 같은 40대 후보인 유시민 의원을 정면 겨냥했다. 유 의원이 “송 후보를 빼고는 다른 후보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며 맞서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졌다.
초재선 그룹의 대표주자로 당의장 경선에 나선 송 의원이 대의원들로부터 어떤 점수를 받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이달초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일본어학과에 편입을 했다. ‘동북아 중심 국가 시대를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 의원의 ‘어학 도전’은 4년여전에 시작됐다. 초선이던 2000년 8월 몽골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북한 대표단의 영어실력에 충격을 받으면서다. 이때부터 영어와 중국어에 틈틈이 몰두했다. 어학공부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를 한가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그의 또다른 습관은 책읽기와 글쓰기다. 어디를 가든 작은 수첩에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 국내든 해외든 그가 가는 곳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작은 수첩이 언제나 함께 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일주일에 서너차례 올리는 ‘의정일기’는 이런 글쓰기 습관의 결과다.
◆학생에서 노동자, 인권변호사로 = 국회의원 송영길은 ‘황소’로 불린다. 부지런함과 뚝심으로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조치로 84년 연세대 첫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그는 졸업식장 대신 서대문구치소로 향하는 신세가 됐다.
경영학도였던 그가 택한 사회진출은 ‘위장취업’이었다. 85년 인천의 대우자동차 르망공장에서 배관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삶 한복판에 뛰어든다.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 송영길은 선퍼니처 가구공장, 까치마을 장갑공장 대진산업으로 직장을 옮겨다니다 독일 인권재단의 도움으로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열었다.
이어 ‘운수노보사’를 운영하며 택시노동자 운동과 노동 상담활동에 주력했다. 송 의원의 보좌진들은 “글쓰기는 이 시절 몸에 밴 습관”이라고 귀띔한다.
인천지역 노동운동가로 살던 그가 91년 어느날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훌쩍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90년 사회주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다.
한달여의 여행을 마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재야 노동운동이 지닌 한계를 절감하면서 ‘제도내 개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92년 서울로 상경,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 준비로 방향을 틀었다.
몇해 후 그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왔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의 인권변호사로 강간치상죄로 누명을 쓴 택시기사, 억울하게 숨진 노점상 등을 위해 밤낮으로 뛰었다.
국회의원 송영길의 주변에는 ‘20년 지기’들이 많다. 노동운동으로 인권변호사로 지내던 시절 맺었던 인간관계가 ‘묵은 된장처럼’ 오래 이어지기 때문이다.
송 의원의 핵심참모는 “무뚝뚝하고 잔정을 표현못해 오해도 사지만, 진실하고 믿음을 주는 스타일이라 한번 사귄 관계는 무척 오래간다”고 설명한다.
열린우리당 당의장 경선에 뛰어든 후 각 지방을 돌때마다 송 의원은 택시로 움직인다. 과거 택시노조운동 시절 함께 했던 동료들이 대구에서 구미로, 구미에서 춘천으로 ‘릴레이 자원봉사 운전기사’ 노릇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열적 개혁’ 논쟁 = 당의장 경선에 나선 송 의원의 키워드는 두가지다. ‘정통개혁론’, ‘함께하는 개혁론’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남북화해와 개혁의 흐름을 통합해야 다음번 집권의 초석이 마련되고, 여기에 초재선의 젊은 세대가 허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당의장 본선 대결이 들어서자마자 송 의원은 ‘분열적 개혁’에 대한 공격으로 논쟁의 한축에 서 있다.
20일 울산시당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도토리 키재기 하는 반개혁, 비개혁 논쟁은 우리당을 약화시킨다”며 같은 40대 후보인 유시민 의원을 정면 겨냥했다. 유 의원이 “송 후보를 빼고는 다른 후보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며 맞서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졌다.
초재선 그룹의 대표주자로 당의장 경선에 나선 송 의원이 대의원들로부터 어떤 점수를 받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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