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⑭ 삼성테크윈 창원2사업장의 ‘고상한 보수주의자’ 김광식
“어느 곳이든 한 자리에서 오래 꾸준히 일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습니다”
지역내일
2005-02-23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직업능력개발을 위해 전국에 걸쳐 21개의 직업전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창원의 한백창원직업전문학교는 벨기에 정부의 지원(‘한백’의 ‘백’은 벨기에를 가리킨다)을 받아 1977년 설립되었다. 70년대 초반 미국과 독일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정수직업훈련원, 한독부산직업훈련원과 함께 우리나라 기능·기술교육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직업훈련원’이란 명칭은 94년 ‘직업전문학교’로 바뀌었다.)
“기계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추어 뜻있고 자질 있는 청소년에게 효율적인 직업훈련을 실시, 장차 산업사회의 역군이 될 성실하고 유능한 기능인을 양성”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는데, 학비 면제에 숙식 제공, 게다가 훈련보조금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400명 모집에 3200명이 몰릴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당시엔 구청장, 교육감, 경찰서장이 면접을 보았는데, 김광식씨는 78년 9월 이 훈련원의 제2기 훈련생으로 응시해 수월하게 합격했다. ‘훈련원 운영진이 모집하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 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어서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고, 성실했다.
자립을 위해 일찍 기능인의 길을 선택
김광식씨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해병대에서 17년을 근무한 뒤 퇴직했다. 그러나 서른일곱의 나이에 퇴직금을 일시에 받아 나온 아버지는 이것저것 시도하다 그 돈을 허망하게 날린 뒤로 술에 절어 살았다. 어머니가 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팔아 근근이 가계를 꾸렸고, 4남매 중 셋째였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벌어서 공부해야겠다, 기술을 배워 어서 자립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어른 한 분이 돈 없이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직업훈련원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는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기능대회에 출전할 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 위주의 특수훈련과정을 마친 그는 훈련원 졸업과 동시에 창원 기계공단 내의 대우종합기계에 입사했다. 당시 기능대회 입상 경력자들에게는 방위산업체로서 병력특혜업체인 대우종합기계에 우선적으로 입사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그곳에서 7년간 일한 뒤 그는 기술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마음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창원기능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뒤 1년간 항공기 관련 중소기업에서 관리직으로 일한 다음 89년 삼성테크윈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워낙 평범해서 기사 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신 걱정을 해 주다가 “정 기사가 안 되겠다 싶으면 없던 일로 하면 되지요?”하는 단서를 달고 들려준 그의 “평범한” 이력이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주역
입사 17년이 지난 지금 김광식씨는 삼성테크윈 창원2사업장 대형가공파트 과장으로 항공기 엔진 케이스 생산라인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 초 케이스 생산라인의 반장이 된 김광식씨 밑에는 모두 17명의 사원들이 있다. 작년까지는 직접 생산에 참여했지만 반장이 된 뒤로는 생산관리가 주된 일이다. “저희 제품은 단가가 하나에 수천만원씩 됩니다. 불량이 하나라도 나면 손실이 굉장히 크죠. 그래서 제가 생산해 낸 제품에 대해선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도록 품질에 신경을 씁니다. 더구나 항공기 엔진이라 사람 목숨과도 직결되잖아요. 또 저희 사업장에선 차세대 전투기 F-15기 관련 부품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부만 생산하고 GE의 기술 지도를 받지만 곧 100% 국산화할 겁니다. 저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기술로 보답을 해야죠.” 올해 초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홍보광고에 출연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최첨단 항공우주산업,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하고 외치는 광고 속 모습은 ‘연출’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닌 ‘순정한’ 애국심이 있다.
가장 소중한 가치는 함께 어울려 사는 것
그의 이력은 평범할지 모르나 이력을 이야기하는 그의 방식에는 평범치 않은 미덕이 있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 지금과는 달리 군대와 똑같았던 훈련원 시절의 고된 기억, 그리고 고향 부산을 떠나 공장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배운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아 고생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어조에는 원망이나 아픔이 전혀 묻어있지 않다. “아버지도 가족사 때문에 나름의 상처가 있었고”,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어려웠다”지만, 자신이 처한 조건을 묵묵히, 어떠한 원망이나 단서도 없이 받아 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데, 선량하고 온화한 그의 얼굴은 그의 47년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고 있다.
얼굴이 말해주는 그대로 그는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조화롭게,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하죠. 그러나 기계가 할 수 없는 일, 사람의 노력으로만 메꿀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부품만 해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한 군데서라도 삐끗하면 전체 품질에 곧바로 영향이 오죠. 단결이 제일 중요합니다. 단결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필요하지만 집단, 조직, 공동체를 위해선 그런 것들을 양보하고 절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칫 군사독재 시절의 집단주의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기적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집단의 목표’를 내세우며 비난하거나 강요할 사람이 아닌 것을, 그저 부탁하고 제안하고 설득할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어디서든 갈등이나 싸움이 있으면 괴로워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사이좋게, 즐겁게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조화와 평화를 제일로 치는 이런 성정을 그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하고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 덕으로 돌리지만, 아버지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은 그것이 ‘타고난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회사 사람 거의 전원이 문상을 왔었다는 이야기 역시 그의 ‘인덕’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가족과 사회, 국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
조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답게 그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 술, 정확히 말하면 술‘자리’를 좋아한다. “오늘은 이쪽 팀, 내일은 저쪽 팀, 퇴근길에 우연히 만났다고 한 잔, 오랜만에 만났다고 한 잔, 선배랑 한 잔, 후배랑 한 잔” 하느라 그는 늘 귀가가 늦다. 그가 제일 기분 좋을 때도 “월 매출 목표 달성한 뒤 반원들과 한 잔 할 때”다. 그의 술자리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 박미정씨다. “평소엔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가정적인 사람이죠. 깔끔하고 꼼꼼해서 청소도 저보다 더 깨끗이 해요. 아마 술 안 마시면 오히려 제가 잔소리깨나 들을 거예요. 근데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 하나로 평소에 딴 점수를 다 잃죠.” 아내가 쌓아두었다가 가끔씩 화를 터뜨리면 한동안 근신을 한다는 김광식씨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가는” 사람이다.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공납금을 못 낸 아들을 위해, 생선을 팔다 돈이 채워지는 대로 시장에서 달려와 돈을 내고 갔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여성’에 대한 그의 원체험인 까닭이다. “저는 사실 내 능력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내만 해도, 알뜰하고 분명한 그 사람이 없었다면 술자리 좋아하고 우유부단한 제가 집이라도 한 칸 장만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교수’. 평소엔 말이 별로 없다가 술자리에선 느리지만 이것저것 점잖게 이야기를 제법 많이 하는 그를 두고 친구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가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어디든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습니다. 거기다 자기 말고 ‘그 옆’, 또 ‘그 옆의 옆’도 둘러볼 줄 알면 금상첨화지요.” 요즘엔 ‘목사님’ 소리도 들었다. “아내를 따라” 가물에 콩나듯 교회를 가곤 했던 그가 요즘은 성가대에 들어 자주 교회엘 가는데,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도들이 성경책 든 그를 보고 목사인 줄 알고 가끔 그리 부른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것”이다. ‘명장’이나 ‘기술사’처럼, 기능인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한 목표에 도전치 못한 걸 이르는 말이다. “마음은 있지만 머리가 안 따라주어서”라고 그는 웃지만,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라는 게 객관적일 것이다. 어울려 한 잔 해야 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조절하고 중재하는 게 더 급해서 이 부드럽고 고상한 보수주의자에게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기계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추어 뜻있고 자질 있는 청소년에게 효율적인 직업훈련을 실시, 장차 산업사회의 역군이 될 성실하고 유능한 기능인을 양성”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는데, 학비 면제에 숙식 제공, 게다가 훈련보조금까지 지급되었기 때문에 400명 모집에 3200명이 몰릴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당시엔 구청장, 교육감, 경찰서장이 면접을 보았는데, 김광식씨는 78년 9월 이 훈련원의 제2기 훈련생으로 응시해 수월하게 합격했다. ‘훈련원 운영진이 모집하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 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했고, ‘어서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고, 성실했다.
자립을 위해 일찍 기능인의 길을 선택
김광식씨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해병대에서 17년을 근무한 뒤 퇴직했다. 그러나 서른일곱의 나이에 퇴직금을 일시에 받아 나온 아버지는 이것저것 시도하다 그 돈을 허망하게 날린 뒤로 술에 절어 살았다. 어머니가 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팔아 근근이 가계를 꾸렸고, 4남매 중 셋째였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벌어서 공부해야겠다, 기술을 배워 어서 자립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어른 한 분이 돈 없이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직업훈련원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는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기능대회에 출전할 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 위주의 특수훈련과정을 마친 그는 훈련원 졸업과 동시에 창원 기계공단 내의 대우종합기계에 입사했다. 당시 기능대회 입상 경력자들에게는 방위산업체로서 병력특혜업체인 대우종합기계에 우선적으로 입사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그곳에서 7년간 일한 뒤 그는 기술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마음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창원기능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뒤 1년간 항공기 관련 중소기업에서 관리직으로 일한 다음 89년 삼성테크윈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워낙 평범해서 기사 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신 걱정을 해 주다가 “정 기사가 안 되겠다 싶으면 없던 일로 하면 되지요?”하는 단서를 달고 들려준 그의 “평범한” 이력이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주역
입사 17년이 지난 지금 김광식씨는 삼성테크윈 창원2사업장 대형가공파트 과장으로 항공기 엔진 케이스 생산라인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 초 케이스 생산라인의 반장이 된 김광식씨 밑에는 모두 17명의 사원들이 있다. 작년까지는 직접 생산에 참여했지만 반장이 된 뒤로는 생산관리가 주된 일이다. “저희 제품은 단가가 하나에 수천만원씩 됩니다. 불량이 하나라도 나면 손실이 굉장히 크죠. 그래서 제가 생산해 낸 제품에 대해선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도록 품질에 신경을 씁니다. 더구나 항공기 엔진이라 사람 목숨과도 직결되잖아요. 또 저희 사업장에선 차세대 전투기 F-15기 관련 부품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부만 생산하고 GE의 기술 지도를 받지만 곧 100% 국산화할 겁니다. 저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기술로 보답을 해야죠.” 올해 초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홍보광고에 출연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최첨단 항공우주산업,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하고 외치는 광고 속 모습은 ‘연출’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닌 ‘순정한’ 애국심이 있다.
가장 소중한 가치는 함께 어울려 사는 것
그의 이력은 평범할지 모르나 이력을 이야기하는 그의 방식에는 평범치 않은 미덕이 있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 지금과는 달리 군대와 똑같았던 훈련원 시절의 고된 기억, 그리고 고향 부산을 떠나 공장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배운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아 고생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어조에는 원망이나 아픔이 전혀 묻어있지 않다. “아버지도 가족사 때문에 나름의 상처가 있었고”,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어려웠다”지만, 자신이 처한 조건을 묵묵히, 어떠한 원망이나 단서도 없이 받아 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데, 선량하고 온화한 그의 얼굴은 그의 47년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고 있다.
얼굴이 말해주는 그대로 그는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조화롭게,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하죠. 그러나 기계가 할 수 없는 일, 사람의 노력으로만 메꿀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부품만 해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한 군데서라도 삐끗하면 전체 품질에 곧바로 영향이 오죠. 단결이 제일 중요합니다. 단결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필요하지만 집단, 조직, 공동체를 위해선 그런 것들을 양보하고 절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칫 군사독재 시절의 집단주의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기적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집단의 목표’를 내세우며 비난하거나 강요할 사람이 아닌 것을, 그저 부탁하고 제안하고 설득할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어디서든 갈등이나 싸움이 있으면 괴로워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사이좋게, 즐겁게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조화와 평화를 제일로 치는 이런 성정을 그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하고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 덕으로 돌리지만, 아버지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은 그것이 ‘타고난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회사 사람 거의 전원이 문상을 왔었다는 이야기 역시 그의 ‘인덕’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가족과 사회, 국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
조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답게 그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 술, 정확히 말하면 술‘자리’를 좋아한다. “오늘은 이쪽 팀, 내일은 저쪽 팀, 퇴근길에 우연히 만났다고 한 잔, 오랜만에 만났다고 한 잔, 선배랑 한 잔, 후배랑 한 잔” 하느라 그는 늘 귀가가 늦다. 그가 제일 기분 좋을 때도 “월 매출 목표 달성한 뒤 반원들과 한 잔 할 때”다. 그의 술자리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 박미정씨다. “평소엔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가정적인 사람이죠. 깔끔하고 꼼꼼해서 청소도 저보다 더 깨끗이 해요. 아마 술 안 마시면 오히려 제가 잔소리깨나 들을 거예요. 근데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 하나로 평소에 딴 점수를 다 잃죠.” 아내가 쌓아두었다가 가끔씩 화를 터뜨리면 한동안 근신을 한다는 김광식씨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가는” 사람이다.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공납금을 못 낸 아들을 위해, 생선을 팔다 돈이 채워지는 대로 시장에서 달려와 돈을 내고 갔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여성’에 대한 그의 원체험인 까닭이다. “저는 사실 내 능력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내만 해도, 알뜰하고 분명한 그 사람이 없었다면 술자리 좋아하고 우유부단한 제가 집이라도 한 칸 장만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교수’. 평소엔 말이 별로 없다가 술자리에선 느리지만 이것저것 점잖게 이야기를 제법 많이 하는 그를 두고 친구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가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어디든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습니다. 거기다 자기 말고 ‘그 옆’, 또 ‘그 옆의 옆’도 둘러볼 줄 알면 금상첨화지요.” 요즘엔 ‘목사님’ 소리도 들었다. “아내를 따라” 가물에 콩나듯 교회를 가곤 했던 그가 요즘은 성가대에 들어 자주 교회엘 가는데,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도들이 성경책 든 그를 보고 목사인 줄 알고 가끔 그리 부른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것”이다. ‘명장’이나 ‘기술사’처럼, 기능인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한 목표에 도전치 못한 걸 이르는 말이다. “마음은 있지만 머리가 안 따라주어서”라고 그는 웃지만,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라는 게 객관적일 것이다. 어울려 한 잔 해야 할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조절하고 중재하는 게 더 급해서 이 부드럽고 고상한 보수주의자에게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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