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스승, 그들의 모델]⑦ 김부겸 의원과 제정구

아름다운 사람 제정구에게 ‘상생’을 배웠다

지역내일 2005-03-22 (수정 2005-03-24 오전 11:06:29)
1980년 어느 봄날 서울대 캠퍼스. 복학생 제정구가 정치학과 전공수업에서 교수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제정구는 “인민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허구”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신반대 시위로 투옥됐다가 복학한 김부겸에게 빈민운동을 하는 선배 제정구의 이 한마디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당시 김부겸은 고작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막이 오른 80년,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김부겸은 그해 9월 제정구가 세운 빈민공동체인 복음자리(경기도 시흥 소재) 마을을 찾았다. 제정구는 그 때 김부겸에게 “(사회)운동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교만하면 몰락한다”고 충고했다. 그 때부터 빈민운동가 제정구는 김부겸의 정신적 스승이 돼 있었다.

◆선택의 고통 속에서 제정구 만나다 = 88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인 86년 10월. 서울 상계동 빈민촌에 대한 정부의 기습철거가 시작됐다. 가재도구와 함께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은 무자비하게 건물을 부수는 철거반원이 무서워 울었고, 분노한 주민들은 그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처절한 생존투쟁을 전개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던 빈민들에게 제정구는 한줄기 빛이었다. 제정구는 상계동 빈민들과 함께 철거투쟁을 벌여 88년 1월 부천시 고강동에 빈민들이 살아갈 조그만 땅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부천에서도 빈민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부천시는 올림픽 성화 봉송로와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빈민들이 애써 지은 집을 허물어버렸다. 결국 상계동 주민들은 2m 깊이의 굴을 파고 들어가, 성화봉송 주자가 그들 옆을 지나는 10여초를 위해 10개월 동안 기다려야 했다.
88년 10월, 서울 올림픽은 빈민들의 고통을 뒤로 한 채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 후로도 서울 전역에서 무자비한 철거가 진행됐고, 그 곳엔 항상 ‘빈민운동가 제정구’가 있었다.
김부겸이 빈민운동가가 아닌 ‘정치인 제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재야운동에 한계를 느끼던 제정구는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현실정치에 뛰어 들었다. 그 해 총선에서 한겨레민주당은 서울종로에 제정구, 도봉에 유인태, 동작에 김부겸, 부천소사에 원혜영 등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1개 의석도 얻지 못하는 패배를 맛 봤다.
당시 정치권은 DJ(김대중)의 호남선과 YS(김영삼)의 경부선 중 하나를 타도록 강요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정구는 DJ와 YS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법야권 통합이라는 원칙과 소신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정치권에서는 이와 비슷한 ‘선택의 고통’이 계속됐다. 그 때마다 김부겸은 제정구의 뒤를 따랐다.

◆제정구 정치참모장 역할한 김부겸= 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에 맞서 야권에서 통합민주당이 탄생했다. 제정구는 92년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93년 제정구는 민주당 당무기획실장을 맡아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김부겸은 당무기획부실장으로 제정구를 보좌했다. 당시 김부겸은 제정구의 정치참모장 역할을 했다.
95년 민주당이 4대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을 배출하는 등 대승을 거뒀을 때였다. 92년 대선 패배로 정계를 은퇴했던 DJ가 정계복귀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민주당을 깨고 나가자 제정구 김부겸 등 재야파 정치인들의 고통스런 선택이 또 다시 시작됐다.
당시 20여명의 재야 출신 인사들은 서울시청 뒤 어느 호텔에 모여 ‘DJ의 힘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이익을 챙길 것인가’ 아니면 ‘실패(총선 패배)의 위험을 감수더라도 명분을 지킬 것인가….’ 고통스럽고 답답한 토론을 벌였다고 김부겸은 술회했다.
“정치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신 선생님(DJ)께 감사하지만 이 시기에 분당의 명분은 없다”며 DJ에게 반기를 든 제정구는 구당(救黨)모임을 결성한 날 기자들에게 “재선 삼선이 되기보다 초선으로 장렬히 전사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제정구가 김부겸 김민석 등 젊은 후배들에게 던진 충고는 이랬다.
“적어도 나이 40살까지는 대의명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그 후에 현실을 따른다 하더라도 굳이 탓할 생각은 없다.”
당시 김부겸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다고 한다. 나이 40이 채 되지 않았던 김부겸은 대세에 편승해 DJ를 따라나설 용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부겸은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고, 97년 대선 전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한나라당 간판으로, 제정구가 물려준 지역구에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제정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2000년의 일이다.

◆“그이는 정말로 아름다웠어요.” = 폐암으로 56살 짧은 인생을 마감한 제정구. 99년 2월 장례식장에서 흘러나온 제정구의 생전음성은 지금도 제정구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98년 7월, 서강대에서 학생과 가톨릭 신도들에게 강의한 내용이었다.
“저는 암에 걸렸습니다. 저는 편안하게 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암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상극’의 역사였습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21세기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먼저 살아야 하는 ‘상생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상생’이란 말이 지금은 너무도 흔하게 쓰이지만 정치권에 회자된 것은 제정구 장례식장에서의 육성녹음 이후부터였다. 지역과 이념의 분열주의를 경멸하다시피 하며 비타협적 소신을 견지했던 제정구가 상생이란 화두를 던졌을 때 주위 사람들도 놀랐다고 한다.
현재 집권여당의 원내 수석부대표인 정치인 김부겸. 그의 화두 역시 ‘화합과 상생’다. 김부겸은 ‘상생의 가치’를 스승인 제정구에게 배웠다며 늘 자랑스러워한다.
제정구의 사망 후 제정구의 아내는 어느 방송과 인터뷰에서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이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스승의 발자취가 아름다웠듯, 정치인 김부겸도 아름다운 정치의 길을 걷게 될까.

/신창훈 기자 chuns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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