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인력공단은 전국에 걸쳐 21개의 직업전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직업전문학교의 기능사 양성 1년 과정에 입학한 신입생은 총 6555명. 그런데 그중 30% 가까이가 전문대나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었다. 2년 전(13.2%)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취업난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공단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이런 현상을 “대학 정원의 확대, ‘묻지마’식 대학 진학, 대학의 미흡한 실무 교육 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어려워지자 실무능력을 길러 경쟁력을 높이려는” 바람직한 흐름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려운 때가 닥치면 ‘허명’과 ‘거품’이 꺼지는 법,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효영씨(37세)는 이런 흐름의 맨 앞에 섰던 사람이다. 그이는 91년 울산대 주거환경소비자학과를 졸업한 뒤 인테리어업체에서 4년, 이어서 수학강사로 5년을 일하다가 2000년에 충북직업전문학교 멀티미디어과정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대졸자가 입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여자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이가 서른 넘어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어떤 일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기질 때문이었다.
학원 강사 일이 지루해질 무렵, 세상은 ‘뉴 밀레니엄의 도래’에 관한 담론으로 떠들썩했다. “다가오는 새천년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설레임”이, 당찬 데 비해선 의외로 낭만적 취향이 엿보이는 그이를 들뜨게 했는데, 마침 선배 언니와 잘 아는 어떤 사람이 기름을 부었다. 대기업의 IT 프로그램 짜주는 일을 하던 그 사람은 만날 때마다 IT와 관련된 온갖 ‘매력적인 이야기’를 해 주며 컴퓨터를 배우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동한 그이는 우선 중고 컴퓨터 한 대를 방구석에 들여다 놓고 “두려움을 없애려고 껐다 켰다만 하면서 6개월 이상 낯을 익히다” 마침내 결정했다.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멀티미디어 과정을 수료한 2000년 3월, 그이는 곧바로 청주의 디자인업체에 취직을 했다. “기존의 사업 외에 홈페이지 사업을 새로 시작한 업체였어요. 팀을 짜서 하는 일과 혼자 하는 일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해서 후자를 택했죠. 취직과 동시에 충북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했기 때문에 팀제로 하면 민폐를 끼칠 것 같아서요. 1년 동안 혼자 홈페이지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상급자인 실장님이 코치를 굉장히 잘해 주셨거든요. 가장 훌륭한 코치, 그게 뭔지 아시죠? 칭찬이에요.”
칭찬을 들을 때마다 “더 잘해야지”하고 욕심을 부린 덕에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제 전공, 즉 인테리어와 홈페이지 제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겁니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추어 기획하고, 설계하고, 조화롭게 마무리하는 것까지, 사이버 공간에서 집을 짓는 과정은 오프에서 집 짓는 거와 똑같아요.”
1년간 실전을 거친 그이는 이듬해 과감히 창업을 했다. 당시 청주시내의 홈페이지 제작업체는 커 봐야 직원 5명을 넘지 않는 영세한 규모고 수요도 많지 않아서 1,2년을 못 버티는 곳이 많았다.
마음이 잘 맞았던 실장, 그리고 직업전문학교 출신의 남자 동료 한 명과 함께 “영세업체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창업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마침 충북중소기업지원센터 내에 여성창업보육센터가 있어, 그 지원을 받아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별다른 준비 없이 창업했던” 그이는 2년간 수업비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울산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그이에게 청주는 아무 연고가 없는 도시였다. 따라서 인맥, 즉 영업력이 전무했다. 게다가 의욕이 넘쳐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교육컨텐츠 개발 사업에 손을 대 실패하고 말았다. ‘사업성’을 따지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하자,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사업은 ‘열심히 일하는 것’하곤 전혀 다른 거예요. 실패한 뒤 그걸 알았죠. ‘배우면서 한다’는 어리숙한 마음을 버리고 나니까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인원을 줄이고, 동업자 한 명과 김효영씨 둘이서 당분간 홈페이지 사업에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이런 판단은 적중해서 창업 4년째에 접어드는 지금 회사는 안정된 기반을 확보했다. “의뢰가 들어오면 일단 저는 카메라를 들고 고객을 찾아갑니다. 이미지를 잡기 위해서인데, 인테리어 할 때 먼저 현장을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나서 고객의 요구와 비용에 맞추어 기획하고 설계하죠. 고객이 ‘돈 낸 게 아깝지 않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일을 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그랬더니 한번 관계를 맺은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더라고요. 지금 주어진 일을 확실하게 하는 게 최고의 영업인 셈이지요.” 고객의 70%는 충북, 나머지 30%는 전국에 산재해 있다. 연매출은 1억에 조금 못 미치지지만 사업의 성격상 인건비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걸 감안하면 ‘2인 기업’ 치곤 괜찮은 실적이다. “고객들한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뭔지 아세요? ‘만들어주고 문 닫는 건 아니죠?’ 그런 일이 정말 많거든요. 3년간 유지했다는 것 자체를 저는 성공이라고 봅니다.” 그 와중에 대학원도 무사히 졸업했다. 연세 드신 교수님들께 몇 번이나 불려가 설명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석사학위 논문 제목이 재밌다. “3차원 사이버 공간에 표현된 청소년의 공간의식.”
그이는 요즘 새 사무실을 알아보고 있다. 여성창업보육센터는 3년간만 사무실을 임대해 주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그이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예전에 3개월 걸리던 일을 이젠 1개월이면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가 무얼 말하는지, 왜 대접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처음엔 밤새워서 일 많이 했어요. 그러고 나면 나면 왠지 일 많이 한 것 같아서 뿌듯하고. 하하. 근데 이젠 가급적 밤샘을 안 합니다. 효율적으로 쪼개서 하는 게 낫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도 사업의 성격상 밤을 안 새울 순 없어서 체력 관리를 철저히 해요. 라면 먹지 않고 꼭 밥 먹습니다. 밤샘할 땐 옆에 과일을 잔뜩 쌓아두고 먹죠. 이런 걸 ‘짬밥’이라고 하나요? 무엇보다도 이제는 사업이 뭔지 압니다. 이제 막 창업하려는 후배가 있으면 멘토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그이는 보육센터 내의 후배 ‘사장님’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들을 열심히 얘기해 주러 다닌다. 울산대와 충북대의 후배들에게 진로와 관련한 특강도 가끔 하러 간다. 작년엔 충북직업전문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직업전문학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김효영씨가 입학했던 해, 여자는 딱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 기숙사 반장을 맡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남자들 ‘군기’를 잡았다니, 여릿여릿한 겉모습만 보고 속지 마시라. 그이는 두 살 터울의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끼어 자랐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은근히 아들을 편애했어요. 게다가 부모님이 무척 검소한 분들이어서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 여기고, ‘잘못하다가 대학도 못 갈라. 내가 얼른 자립해야지’하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결코 가난한 집은 아니었던 거 있죠?” 이야기 끝에 깔깔깔 웃는 모습은 영낙없이 스무살 명랑소녀지만, 한 시간만 이야기해 보면 그이가 대단히 튼튼한 내면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면 그이는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 틀어박힌다”고 한다. 그러면 원기가 회복된단다. 남자친구를 몇 번 사귄 적이 있는데, 다들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돌아서더란다. 어떤 이는 “나와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까지 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은 애인, 혹은 아내에게서 “나와 일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의 남자의 표정, 바로 그것이다. 그이는 ‘관습적으로’ 남성적 기질로 운위되는 기질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지극히 여성적인 외모도 외모려니와 쓸데없이 ‘폼’ 잡거나 비장한 척, 잘난 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자’는 분명 아니다.
“편한 길 놔두고 왜 그렇게 일부러 힘들게 사냐는 이야기 많이 듣지만, 저는 새로운 시도, 거기에 따르는 스릴이 좋아요. 위험한 만큼 더 신나고 재밌잖아요.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하겠죠. 하지만 예전처럼 기존의 것을 딱 접고 제로 상태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서운 걸 보면 저도 나이가 든 거죠? 지금까지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생각입니다. 아, 제가 꼭 시도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아이 낳는 거요.”
‘해방’이니 ‘자유’ 같은 말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그이는 그 어떤 억압과 편견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는 ‘해방된 여성’,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인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올해 직업전문학교의 기능사 양성 1년 과정에 입학한 신입생은 총 6555명. 그런데 그중 30% 가까이가 전문대나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었다. 2년 전(13.2%)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취업난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공단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이런 현상을 “대학 정원의 확대, ‘묻지마’식 대학 진학, 대학의 미흡한 실무 교육 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어려워지자 실무능력을 길러 경쟁력을 높이려는” 바람직한 흐름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려운 때가 닥치면 ‘허명’과 ‘거품’이 꺼지는 법,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효영씨(37세)는 이런 흐름의 맨 앞에 섰던 사람이다. 그이는 91년 울산대 주거환경소비자학과를 졸업한 뒤 인테리어업체에서 4년, 이어서 수학강사로 5년을 일하다가 2000년에 충북직업전문학교 멀티미디어과정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대졸자가 입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여자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이가 서른 넘어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어떤 일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기질 때문이었다.
학원 강사 일이 지루해질 무렵, 세상은 ‘뉴 밀레니엄의 도래’에 관한 담론으로 떠들썩했다. “다가오는 새천년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설레임”이, 당찬 데 비해선 의외로 낭만적 취향이 엿보이는 그이를 들뜨게 했는데, 마침 선배 언니와 잘 아는 어떤 사람이 기름을 부었다. 대기업의 IT 프로그램 짜주는 일을 하던 그 사람은 만날 때마다 IT와 관련된 온갖 ‘매력적인 이야기’를 해 주며 컴퓨터를 배우라고 부추겼다. 마음이 동한 그이는 우선 중고 컴퓨터 한 대를 방구석에 들여다 놓고 “두려움을 없애려고 껐다 켰다만 하면서 6개월 이상 낯을 익히다” 마침내 결정했다.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멀티미디어 과정을 수료한 2000년 3월, 그이는 곧바로 청주의 디자인업체에 취직을 했다. “기존의 사업 외에 홈페이지 사업을 새로 시작한 업체였어요. 팀을 짜서 하는 일과 혼자 하는 일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해서 후자를 택했죠. 취직과 동시에 충북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했기 때문에 팀제로 하면 민폐를 끼칠 것 같아서요. 1년 동안 혼자 홈페이지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상급자인 실장님이 코치를 굉장히 잘해 주셨거든요. 가장 훌륭한 코치, 그게 뭔지 아시죠? 칭찬이에요.”
칭찬을 들을 때마다 “더 잘해야지”하고 욕심을 부린 덕에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제 전공, 즉 인테리어와 홈페이지 제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겁니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추어 기획하고, 설계하고, 조화롭게 마무리하는 것까지, 사이버 공간에서 집을 짓는 과정은 오프에서 집 짓는 거와 똑같아요.”
1년간 실전을 거친 그이는 이듬해 과감히 창업을 했다. 당시 청주시내의 홈페이지 제작업체는 커 봐야 직원 5명을 넘지 않는 영세한 규모고 수요도 많지 않아서 1,2년을 못 버티는 곳이 많았다.
마음이 잘 맞았던 실장, 그리고 직업전문학교 출신의 남자 동료 한 명과 함께 “영세업체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창업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마침 충북중소기업지원센터 내에 여성창업보육센터가 있어, 그 지원을 받아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별다른 준비 없이 창업했던” 그이는 2년간 수업비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울산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그이에게 청주는 아무 연고가 없는 도시였다. 따라서 인맥, 즉 영업력이 전무했다. 게다가 의욕이 넘쳐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교육컨텐츠 개발 사업에 손을 대 실패하고 말았다. ‘사업성’을 따지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하자,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사업은 ‘열심히 일하는 것’하곤 전혀 다른 거예요. 실패한 뒤 그걸 알았죠. ‘배우면서 한다’는 어리숙한 마음을 버리고 나니까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인원을 줄이고, 동업자 한 명과 김효영씨 둘이서 당분간 홈페이지 사업에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이런 판단은 적중해서 창업 4년째에 접어드는 지금 회사는 안정된 기반을 확보했다. “의뢰가 들어오면 일단 저는 카메라를 들고 고객을 찾아갑니다. 이미지를 잡기 위해서인데, 인테리어 할 때 먼저 현장을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나서 고객의 요구와 비용에 맞추어 기획하고 설계하죠. 고객이 ‘돈 낸 게 아깝지 않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일을 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그랬더니 한번 관계를 맺은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더라고요. 지금 주어진 일을 확실하게 하는 게 최고의 영업인 셈이지요.” 고객의 70%는 충북, 나머지 30%는 전국에 산재해 있다. 연매출은 1억에 조금 못 미치지지만 사업의 성격상 인건비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걸 감안하면 ‘2인 기업’ 치곤 괜찮은 실적이다. “고객들한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뭔지 아세요? ‘만들어주고 문 닫는 건 아니죠?’ 그런 일이 정말 많거든요. 3년간 유지했다는 것 자체를 저는 성공이라고 봅니다.” 그 와중에 대학원도 무사히 졸업했다. 연세 드신 교수님들께 몇 번이나 불려가 설명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석사학위 논문 제목이 재밌다. “3차원 사이버 공간에 표현된 청소년의 공간의식.”
그이는 요즘 새 사무실을 알아보고 있다. 여성창업보육센터는 3년간만 사무실을 임대해 주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그이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예전에 3개월 걸리던 일을 이젠 1개월이면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가 무얼 말하는지, 왜 대접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처음엔 밤새워서 일 많이 했어요. 그러고 나면 나면 왠지 일 많이 한 것 같아서 뿌듯하고. 하하. 근데 이젠 가급적 밤샘을 안 합니다. 효율적으로 쪼개서 하는 게 낫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도 사업의 성격상 밤을 안 새울 순 없어서 체력 관리를 철저히 해요. 라면 먹지 않고 꼭 밥 먹습니다. 밤샘할 땐 옆에 과일을 잔뜩 쌓아두고 먹죠. 이런 걸 ‘짬밥’이라고 하나요? 무엇보다도 이제는 사업이 뭔지 압니다. 이제 막 창업하려는 후배가 있으면 멘토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그이는 보육센터 내의 후배 ‘사장님’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들을 열심히 얘기해 주러 다닌다. 울산대와 충북대의 후배들에게 진로와 관련한 특강도 가끔 하러 간다. 작년엔 충북직업전문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직업전문학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김효영씨가 입학했던 해, 여자는 딱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 기숙사 반장을 맡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남자들 ‘군기’를 잡았다니, 여릿여릿한 겉모습만 보고 속지 마시라. 그이는 두 살 터울의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끼어 자랐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은근히 아들을 편애했어요. 게다가 부모님이 무척 검소한 분들이어서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 여기고, ‘잘못하다가 대학도 못 갈라. 내가 얼른 자립해야지’하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결코 가난한 집은 아니었던 거 있죠?” 이야기 끝에 깔깔깔 웃는 모습은 영낙없이 스무살 명랑소녀지만, 한 시간만 이야기해 보면 그이가 대단히 튼튼한 내면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면 그이는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 틀어박힌다”고 한다. 그러면 원기가 회복된단다. 남자친구를 몇 번 사귄 적이 있는데, 다들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돌아서더란다. 어떤 이는 “나와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까지 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은 애인, 혹은 아내에게서 “나와 일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의 남자의 표정, 바로 그것이다. 그이는 ‘관습적으로’ 남성적 기질로 운위되는 기질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지극히 여성적인 외모도 외모려니와 쓸데없이 ‘폼’ 잡거나 비장한 척, 잘난 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자’는 분명 아니다.
“편한 길 놔두고 왜 그렇게 일부러 힘들게 사냐는 이야기 많이 듣지만, 저는 새로운 시도, 거기에 따르는 스릴이 좋아요. 위험한 만큼 더 신나고 재밌잖아요.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하겠죠. 하지만 예전처럼 기존의 것을 딱 접고 제로 상태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서운 걸 보면 저도 나이가 든 거죠? 지금까지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생각입니다. 아, 제가 꼭 시도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아이 낳는 거요.”
‘해방’이니 ‘자유’ 같은 말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그이는 그 어떤 억압과 편견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는 ‘해방된 여성’,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인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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