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태릉선수촌 최초의 여성촌장 이에리사

사라예보의 나비, 선수촌으로 날다

지역내일 2005-04-14
“본의 아니게 날로 겸손해지는 거 같습니다. 주위에서 보내는 기대의 무게에 눌려서요. 하하하.”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 태릉선수촌 개촌 40년 만의 일이다. 여자가 선수촌장으로 임명된 것이. 그 기대와 환호를 한꺼번에 받는 주인공이 바로 이에리사 촌장(51). 1973년 한국 여자탁구팀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선수권 단체전 정상에 오르던 그날, 사라예보의 낭보를 전하던 사진 속 날렵하고 다부진 모습은 그 사이 꽤 부드럽고 넉넉해져 있었다.
하지만 ‘선수 본능’, 패기는 여전했다.
“여성인 저를 택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선수생활을 잘해서나, 유명해서가 아니라 지금 선수촌에 필요한 변화를 끌어낼 적임자로 지목한 거니까요.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시대는 지났어요. 과학적인 훈련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하는 역할, 동시에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하는 삭막한 이곳에 인간적인 교감이 흐르게 하는 역할이 선수촌장의 몫이라 생각돼요.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정말 잘 해내고 싶어요.”
지원자로서의 선수촌장, 인간적인 교감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신 누구보다 선수촌의 생활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여려질 때가 있어요.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잘 해야 하니까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죠. 그러기 위해 선수와 감독·코치가 전권을 갖도록 할 생각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거든요. 대신 책임도 함께 지도록 하고요. 그게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방법임을 확인해 왔거든요.”
이 촌장은 특히 지도자 재훈련에 관심을 기울일 계획이다. 예전처럼 지시와 통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선수들의 자발성을 유도해 내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율적이되 엄격한 훈련을 해야 하고 선수들이 힘들어 할 때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정신적인 선배도 되어야 하는 자리가 지도자라는 자리예요. 또 선수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순간순간 판단을 해야 해요. 동시에 그런 판단과 실력이 선수들한테 신뢰를 얻어야 해요. 그래야 믿고 받아들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평소 치밀하게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외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자리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서러운 것이야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스포츠계는 더 하다. 남자 선수들이 많은 지원에도 지지부진한 성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 한국의 낭자들은 세계 스포츠무대를 활보했다. 그럼에도 여성은 잘해야 코치이고 여자 선수팀 감독마저 여전히 남자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러게요. 여자 선수들이 훨씬 좋은 성적을 내왔는데….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더 이상 여성을 무시할 수가 없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물론 촌장 선정에는 여러 가지가 검토됐을 거예요.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 스포츠인의 기득권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을 반영한 결정이 아닐까 싶어요.”
이 촌장은 동시에 자기 밥그릇을 챙기지 못한 여성 스포츠인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자들이 뭘 좀 하려면 기득권을 가진 남자들 사이에 파고들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인내가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데 그걸 감내하는 여자 스포츠인이 드물기도 했어요.”
그런 상황은 이 촌장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터. 그 길을 헤쳐 오면서 수많은 번민의 날을 보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항상 외톨박이였어요. 내가 내쳐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고요. 그럴 때마다 ‘코치로도, 지도자로도 잘 해보고 싶어. 선수도 잘 했는데 못할 게 어디 있어?’라며 스스로에게 위로했지요. 옆에서 감싸주는 이가 있나, 기분 나쁘고 섭섭한 거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고 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하하하.”
이 촌장의 집무실엔 커다란 원탁 테이블과 의자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벽엔 백두산 천지를 담은 대형사진이 걸려 있다. 이 촌장은 조만간 이것들을 치우고 대신 경쾌한 회의용 테이블을 들여놓을 것이란다. 선수와 함께 호흡하는 촌장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권위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손정미 기자 jmshon@naeil.com·사진 이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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