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인천시 주안동 삼성목공소 ‘목공 명장’ 가풍국씨

‘바르고 굳세게’ 목공 연마 40년

지역내일 2005-04-20
가풍국 선생(59세)은 점심 사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그냥 나온 적이 몇 번 있다. 선생을 만나보면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한평생 나무를 만진 손은 고목의 껍질처럼 거칠고, 헝클어진 머리며 작업복 잠바 위로는 나무 먼지가 뿌옇다. 불행하게도, 영락없는 ‘노가다 일용 잡부’를 친절하게 맞이하는 식당 종업원은 “옷차림 보고 사람 판단하는” 우리나라엔 그리 흔치 않다. 그러나 가선생은 “여기 주문 안 받느냐”고 종업원을 부르는 법이 없다. 나중에 온 “번듯하게 차려입은” 손님들한테 주문받는 모습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러고도 오지 않으면 말없이 식당을 나온다. 선생이 “사람들이 벙어리로 알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또 “여자 옆에만 가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던” 숫기 없는 충청도 사내여서도 아니다. “돈 주고 밥 사먹으러 간 사람이 주문 받으라고 사정할 수는 없는 일 아녀유?” 종업원이 “본분”을 다하길 기다리다 아니다 싶으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 그것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선생의 방식이다. 식당 종업원은 모르겠지만 선생은 대한민국에 3명밖에 없는 목공 명장 중의 한 분이다.
선생이 목공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4년, 열아홉 살 때였다. 충남 몽산포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는 궁벽진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해에 무작정 상경해서 건축 현장에서 목공 일을 처음 접했다. “굶기도 숱하게 굶으며” 몇 년을 버티다 군대를 갔고, 제대 후 서산에서 목공소를 하는 형님 밑에 들어가 제대로 일을 배웠다. “우리 형님이 기술은 참 출중했어요. 목수라고 하면 우습게 알지만 신체 조건도 따라줘야 하고 머리도 있어야 해요. 10년은 배워야 문 한 짝 짤 수 있어요. 근데 형님 밑에서 한 2년 배우고 나니까 더 배울 게 없어요.” 그래서 그는 다시 서울의 건축 현장으로 돌아갔다. 기술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일하다 보니 이론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72년엔 건설기술교육원의 전신인 건설기능공 공공직업훈련소에 들어가 6개월 과정을 수료, 건축목공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선생의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틀림없이 인간문화재가 되었을 만큼” 길쌈의 명인이었다니, 선생의 솜씨는 그 내림인지도 모른다.)
그 뒤로 그는 5년 가까이 외국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일본 오키나와의 공장에서 영선반 목공 담당으로 2년, 이어서 스미토모 건설 소속으로 오오사카에서 1년. 오오사카에서 일할 땐 목공반장으로 일본인들을 데리고 이라크로 파견 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란에서 팔레비왕의 별장을 지으며 1년여를 보내다 이란혁명이 일어나 중도 귀국한 뒤, 이듬해인 1979년 인천시 주안동에 ‘삼성목공소’를 차려 오늘에 이른다.

세상에는 ‘실제’보다 넘치게 ‘표현’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표현’이 모자라 ‘실제’가 가려지는 것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 선생의 목공소도 선생을 닮았다. 60평쯤 되는 목공소는 낡고 초라하다. 그러나 옹색한 소파에 앉아 찬찬히 들여다보면, 먼지 뒤덮인 작업장 가운데 놓인 연탄난로며 철사로 손잡이를 매단 조그만 양은 주전자를 넘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것들’이 눈에 하나씩 하나씩 들어온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인 목공이며 전통창호, 나무 관련 전문서적들, 작업대 옆구리에 걸린 손때 묻은 대패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옛 연장들….
특히 출입문 위쪽과 맞은편 벽에 걸린 두 개의 액자는 선생의 생각과 이력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출입문 맞은편 액자엔 한자로 이렇게 쓰여 있다. “기능연마 장인본분”. “안중근 선생이 이런 글을 남겼어요. ‘위국헌신 군인본분’. 목수는 다행히 몸을 바칠 필요까지는 없지. 기능만 부지런히 연마하면 돼요.” 그리고 출입문 위의 액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훈: 바르고 굳세게”. 지금은 서른살 난 아들 재현씨와 단둘이 일하지만 “잘 나가던 시절에는” 직원들을 너댓명 데리고 일했다. 그때 써 붙인 ‘사훈’이다.
선생이 얼마나 “바르고 굳세게” 살아왔는지를 밝히려면 해외 취업 때의 일화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키나와에서 일하던 시절 선생은 “남들이 술 마시고 노는 시간에” 독학으로 일어를 익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학교를 못 다녔어요. 형님이 사업하다 망해서 집안이 완전히 기울어서. 대신 동네 서당엘 4년간 다니며 사서를 뗐어요. 한문 실력이 있으니 일어는 쉽지. 오오사카 갈 때 그 덕을 봤죠. 일어할 줄 아냐고 해서 그렇다니까 면접관이 두 말 않고 뽑아줬어요. 한번 배워둔 건 언젠간 꼭 써 먹을 때가 있어요.”
이란에 갔을 땐 영어를 독학했다. 당시 이란 현장엔 7개국 사람들이 함께 일했는데, 선생을 포함해 한국인 10명은 이란인의 조수로 배정되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선생은 영어 할 줄 아는 동료를 데리고 미국인 목수 책임자를 찾아가 미국인 팀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의 기술을 알아본 책임자는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영어를 못한다고 가끔 구박을 했다. 아내에게 당시 유명한 영어교재였던 [잉글리쉬 900]을 보내달라고 해 영어를 익히고 있던 선생은 그때마다 이렇게 응수했단다. “너는 한국말 할 줄 알아?(Can you speak Korean?)” 서너달 만에 손짓 발짓을 섞어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선생은 마침내 목공 감독이 되었다. “난 미국인, 일본인 부려먹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어조에 묻어나는 자부심이 조금도 넘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공부 제대로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선생은 쉰 살에 고졸 검정고시를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쉰이 가까워 오니 눈도 침침해져 이때를 놓치면 공부는 영영 못하겠다 싶어” 목공소 지하창고에서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아무도 몰래 공부한 결과였다. “매일 밤 어디를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느냐”고 의심하던 아내는 합격 축하전화가 온 뒤 오해를 풀었다. “대학은 현세에선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접었으나, 주변의 권유로 전남 강진에 있는 성화대 건축과를 들어가 작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게으른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열댓살 된 어느 날, 아침밥을 먹는 그에게 아버지가 다짜고짜 지게 작대기를 들이댔다. 영문도 모르고 작대기를 피해 마당을 돌다가 그예 동네 솔밭으로 도망가 며칠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나무를 해오던지, 소꼴을 베어 오던지 일을 하고 아침을 먹어야지 아무 일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거였단다. “그땐 아버지가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알죠. 진리를 가르쳐 주신 거라는 걸.”
부지런한 선생은 보통 새벽 6시쯤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집에서 5분 거리인 목공소로 출근한다. 바쁠 땐 밤도 새지만 요즘은 “주문 들어오면 문 한 짝 얼른 만들어다 주고 그 돈 받아 생활”할 만큼 경기가 안 좋다. 완성품 문짝들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목공소의 70%가 문을 닫았다.
“제가 문 잘 짜는 연구만 했지 돈 잘 버는 연구는 못했어요.” 30평짜리 다세대주택과 목공소가 “40년 목공을 연마한” 명장의 전 재산이다.
“참다운 기능인이라면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게 선생의 소신인데, 산간도로 개설지역이나 아파트 재건축 현장 등지에서 베어 버려지는 지름 12~18cm의 토종 생목들을 수집해 연구개발한 ‘원목 나이테 상감 도어’가 선생의 독창적 개발품이다. 원목의 나이테를 그대로 살린 이 문은 일본에서도 발명특허를 따냈다. 또 그렇게 구한 토종 수목들 백가지를 표본화하여 관련 교육기관에 기증하는 것도 “척 보면 무슨 나무인 줄 아는” 선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은 잡기라고는 모른다. 본분인 ‘기능연마’ 외에 선생이 하는 일이 있다면 명장 모임이나 기능장 모임, 문화재 관련 기능인들의 모임(선생은 문화재 소목장이기도 하다)에 가끔 참석하는 것, 기능대회 심사를 보러 출타하는 일뿐이다. 그럴 때를 빼고는 일이 있거나 없거나 10시까지 목공소를 지킨다. 퇴근 뒤, “막걸리 두 병 마시며 공상도 하고 사색도 하는,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일상의 낙이라면 낙이다. 강남 부자동네에 전시하면 필시 히트를 칠 것만 같은 선생의 “문짝들”을 보고 있자니 선생의 뒤를 잇고 있는 아들 재현씨는 ‘돈 버는 연구’도 제발 좀 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나는 나무가 너무 좋다”는 목공 명장의 한시 한 수를 전한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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