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들은 영토분쟁 어떻게 대응하나>영국-아르헨, 포클랜드(말비나스)섬
패전으로 땅뺏긴 아르헨, “여전히 우리 땅”
지역내일
2005-03-18
(수정 2005-03-18 오전 11:36:20)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약 200마일 정도 떨어진 섬을 두고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 섬을 ‘포클랜드’라고 부르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비나스’라고 부른다.
포클랜드제도(말비나스)가 영국령이 된 것은 1833년부터이다. 1831년 영국군대가 섬에 거주하던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모두 쫓아내자 1832년 영국인 탐험대가 섬을 접수하였고 곧 이어 1833년 영국정부는 정식으로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양국의 영토분쟁은 1968년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당시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아르헨티나로 넘겨주는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은 1968년 7월5일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이 합의된 날짜로부터 아르헨티나에 귀속될 것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130년 이상 끌어온 영토분쟁에 종지부를 찍는듯했다.
그러나 이 비밀협상은 당시 포클랜드주지사였던 코스모 해스커드경이 BBC에 나와 “섬을 이대로 넘겨줄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포클랜드 주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촉발시켰다. 그는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협상을 공개해버렸지만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의 지지를 얻어 정부를 압박하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영국정부는 평화협상을 포기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이관협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평화적 협상을 포기한 대가는 14년후 전쟁으로 나타났다.
협상이 결렬된 후 아르헨티나에서는 영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격화되었고, 1982년 3월26일 마침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전쟁을 결정하고 로자리오작전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영국은 외교적 해결을 위해 유엔안보리 소집을 요구하였다. 4월1일 열린 안보리는 아르헨티나정부에게 무력사용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르헨티나 해군은 4월2일 포클랜드상륙을 감행하였다.
4월3일 안보리는 결의안502호를 통해 양국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의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아르헨타니는 즉시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74일간의 전쟁끝에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6월20일 영국이 전쟁종료를 공식선언함으로써 포클랜드를 둘러싼 무력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1998년 전쟁이 끝난 후 16년만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던 카를로스 메넴은 “이런 전쟁이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면서도 “포클랜드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분쟁의 불씨가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영국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토를 빼앗아 갔다. 언젠가는 말비나스(포클랜드)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1999년 2월 30년간 비밀에 묻혀있던 포크랜드양해각서가 공개되자, 협상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로드 찰폰터는 “그때 협약을 강행했어야 했다. 여론에 밀려 협약을 포기한 것은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포클랜드제도(말비나스)가 영국령이 된 것은 1833년부터이다. 1831년 영국군대가 섬에 거주하던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모두 쫓아내자 1832년 영국인 탐험대가 섬을 접수하였고 곧 이어 1833년 영국정부는 정식으로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양국의 영토분쟁은 1968년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당시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아르헨티나로 넘겨주는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은 1968년 7월5일 “영국정부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이 합의된 날짜로부터 아르헨티나에 귀속될 것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130년 이상 끌어온 영토분쟁에 종지부를 찍는듯했다.
그러나 이 비밀협상은 당시 포클랜드주지사였던 코스모 해스커드경이 BBC에 나와 “섬을 이대로 넘겨줄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포클랜드 주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촉발시켰다. 그는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협상을 공개해버렸지만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의 지지를 얻어 정부를 압박하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영국정부는 평화협상을 포기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이관협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평화적 협상을 포기한 대가는 14년후 전쟁으로 나타났다.
협상이 결렬된 후 아르헨티나에서는 영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격화되었고, 1982년 3월26일 마침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전쟁을 결정하고 로자리오작전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영국은 외교적 해결을 위해 유엔안보리 소집을 요구하였다. 4월1일 열린 안보리는 아르헨티나정부에게 무력사용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르헨티나 해군은 4월2일 포클랜드상륙을 감행하였다.
4월3일 안보리는 결의안502호를 통해 양국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의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아르헨타니는 즉시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74일간의 전쟁끝에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였고 6월20일 영국이 전쟁종료를 공식선언함으로써 포클랜드를 둘러싼 무력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영토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1998년 전쟁이 끝난 후 16년만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던 카를로스 메넴은 “이런 전쟁이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면서도 “포클랜드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분쟁의 불씨가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영국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토를 빼앗아 갔다. 언젠가는 말비나스(포클랜드)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1999년 2월 30년간 비밀에 묻혀있던 포크랜드양해각서가 공개되자, 협상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로드 찰폰터는 “그때 협약을 강행했어야 했다. 여론에 밀려 협약을 포기한 것은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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