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고문 지낸 애국지사 김가진, 유해봉환 누가 막나
국가보훈처 “한일합방 당시 작위 받아 포상 부적합”…민족문제연 “사람 평가는 마지막 행적이 가장 중요”
지역내일
2005-06-03
(수정 2005-06-03 오전 10:54:27)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모하고 그들의 정신을 계승발전하는 것은 후손들의 책무다.
동농 김가진(1846~1922)은 대한제국에서 농상공부 대신을 지낸 개화파 관료다. 경술국치 때 일제가 대한제국의 고위관리 출신 75명에게 일제히 준 작위를 거절하지 못했던 동농은 3.1운동을 계기로 비밀결사 활동을 벌이고,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고문을 지낸다.
◆임정이 준 면죄부 누가 박탈하나 = 나약한 지식인의 굴레를 깨고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 동농의 삶을 결코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경술국치 당시 그가 범한 과오는 상해 임시정부가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사면과 복권을 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동농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탈락한 것은 후손들의 ‘월권’이다.
이런 까닭으로 동농의 유해는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상해 송경령능원 안에 있는 동농의 무덤은 1960년대 말 홍위병이 봉분과 비석을 파괴해 흔적이 없다. 동농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만 된다면 우리 정부가 중국정부와 교섭을 해서 유해를 찾아낼 수 있다.
일제와 관련된 동농의 행적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 까지는 일제침략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극대응하면서 개화파 관료 또는 애국계몽운동가로 보냈다.
1910년에서 1919년까지는 좌절과 궁핍 속에 칩거하던 시절이다.
3·1운동 이후 4년 동안은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와 상해임정 고문으로서 타협없는 독립운동을 벌였다. 동농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자 임정은 그를 고문으로 추대했다.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해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맡았다.
동농은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운명했다. 향년 77세였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세 차례 서훈 보류 = 이같은 동농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놓고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윤경로(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교수나 친일문제에 전문성이 높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마지막 행적이 가장 중요하다”며 “동농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농의 후손들은 과거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세 차례나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모두 보류됐다. 1995년에는 1심에서 2등급 대통령장으로 결정됐지만 2심에서 취소됐다.
일부 심사위원은 “동농이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과오가 가장 크다”고 주장했다. 독립유공자 결정은 만장일치제다. 황원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장은 “동농이 죽는 순간까지 작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해로 망명하는 순간 작위는 버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임시정부 고문이 일본작위를 갖고 있었다는 보훈처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보훈처는 “동농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906년 11월 의병장 민종식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찰사의 관할 구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관찰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거병을 해서 5월 19일부터 31일까지 홍주성을 점령했다. 이 때 의병부대와 전투를 벌인 주력은 일본군이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민종식 의병장은 11월 20일 일본군에 의해 공주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민종식 의병장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년 후 순종이 즉위할 때 특사로 석방됐다.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무색 = 일부 심사위원과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은 동농의 경우 친일과 항일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보훈처는 “동농이 독립운동 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항일공적 보다는 친일 과오가 더 커서 포상을 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보훈처가 이처럼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선 후’보다 ‘경 중’을 앞세우는 것은 ‘선 항일- 후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는, 변절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변절 혐의가 있는데도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사람이 2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2005년 3월 몽양 여운형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등 독립유공자의 확대와 발굴에 노력하고 있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은 임정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손자다.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동농의 서훈과 유해봉환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명식 기자 msshin@naeil.com
동농 김가진 (1846~1922)
서얼 출신으로 조선 최초 종1품 올라
일본을 근대화 모델 … 반청(反淸)자주외교 갑오경장 주역으로 참여해 개혁 추진
일제가 준 남작 거절 못한 채 칩거
3·1운동 후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
상해망명 임정 고문…무장투쟁 지지
동농 김가진(1846~1922)은 대한제국에서 농상공부 대신을 지낸 개화파 관료다. 경술국치 때 일제가 대한제국의 고위관리 출신 75명에게 일제히 준 작위를 거절하지 못했던 동농은 3.1운동을 계기로 비밀결사 활동을 벌이고,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고문을 지낸다.
◆임정이 준 면죄부 누가 박탈하나 = 나약한 지식인의 굴레를 깨고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 동농의 삶을 결코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경술국치 당시 그가 범한 과오는 상해 임시정부가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사면과 복권을 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동농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탈락한 것은 후손들의 ‘월권’이다.
이런 까닭으로 동농의 유해는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상해 송경령능원 안에 있는 동농의 무덤은 1960년대 말 홍위병이 봉분과 비석을 파괴해 흔적이 없다. 동농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만 된다면 우리 정부가 중국정부와 교섭을 해서 유해를 찾아낼 수 있다.
일제와 관련된 동농의 행적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 까지는 일제침략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극대응하면서 개화파 관료 또는 애국계몽운동가로 보냈다.
1910년에서 1919년까지는 좌절과 궁핍 속에 칩거하던 시절이다.
3·1운동 이후 4년 동안은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와 상해임정 고문으로서 타협없는 독립운동을 벌였다. 동농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자 임정은 그를 고문으로 추대했다.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해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맡았다.
동농은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운명했다. 향년 77세였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세 차례 서훈 보류 = 이같은 동농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놓고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윤경로(현 한성대 총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교수나 친일문제에 전문성이 높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세열 사무총장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마지막 행적이 가장 중요하다”며 “동농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농의 후손들은 과거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세 차례나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모두 보류됐다. 1995년에는 1심에서 2등급 대통령장으로 결정됐지만 2심에서 취소됐다.
일부 심사위원은 “동농이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과오가 가장 크다”고 주장했다. 독립유공자 결정은 만장일치제다. 황원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장은 “동농이 죽는 순간까지 작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해로 망명하는 순간 작위는 버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임시정부 고문이 일본작위를 갖고 있었다는 보훈처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보훈처는 “동농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906년 11월 의병장 민종식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찰사의 관할 구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관찰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거병을 해서 5월 19일부터 31일까지 홍주성을 점령했다. 이 때 의병부대와 전투를 벌인 주력은 일본군이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민종식 의병장은 11월 20일 일본군에 의해 공주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민종식 의병장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년 후 순종이 즉위할 때 특사로 석방됐다.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무색 = 일부 심사위원과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은 동농의 경우 친일과 항일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보훈처는 “동농이 독립운동 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항일공적 보다는 친일 과오가 더 커서 포상을 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보훈처가 이처럼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선 후’보다 ‘경 중’을 앞세우는 것은 ‘선 항일- 후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는, 변절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변절 혐의가 있는데도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사람이 2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2005년 3월 몽양 여운형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등 독립유공자의 확대와 발굴에 노력하고 있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은 임정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손자다.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동농의 서훈과 유해봉환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명식 기자 msshin@naeil.com
동농 김가진 (1846~1922)
서얼 출신으로 조선 최초 종1품 올라
일본을 근대화 모델 … 반청(反淸)자주외교 갑오경장 주역으로 참여해 개혁 추진
일제가 준 남작 거절 못한 채 칩거
3·1운동 후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
상해망명 임정 고문…무장투쟁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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