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위협하다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1심 재판관 “조봉암 간첩 아니다” … 과거사 규명대상에 포함시켜야
지역내일
2005-06-13
(수정 2005-06-14 오전 10:37:10)
죽산 조봉암(1899~1959)은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거쳐 해방후 초대 농림장관, 국회부의장을 거쳐 야당 대통령 후보로 2,3대 대선에 출마했던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농림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당시 한민당과 지주계층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6·25전쟁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과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제창했다.
◆3대 대선 출마가 화근 = 죽산은 1956년 진보당 후보로 출마했던 3대 대선에서 당시 여당 후보였던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216만표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체포했다.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간첩혐의와 진보당에서 내건 평화통일론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조봉암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당시 죽산에 적용했던 간첩죄는 죽산과 같이 기소됐던 HID(대북공작기관) 공작원 출신 양명산(본명은 양이섭)씨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였다. 58년 6월17일에 있은 1심판결에서 재판부는 죽산에게 당원명부 유출에 대해서만 유죄(국보법위반 혐의)로 인정해 징역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석방했다. 그러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양씨가 자신의 증언을 번복했음에도 간첩혐의를 인정, 죽산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1심에서 석방됐던 진보당 관련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장택상 “죽산 공산주의자 아니다” = 당시 죽산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에 대해 당시 보수정객이었던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서북청년단 출신의 이성주 전 치안국장도 반대입장을 밝혔다.
특히 죽산 구명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장택상은 당시 신문기자들에게 “공산치하가 되면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을 가망이 있을지 몰라도 조봉암은 맨 먼저 저들에게 총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죽산은 해방직후 박헌영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뒀다.
죽산의 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씨도 4·19직후인 1960년 6월 법정신문과의 대담에서 “(이승만 정권이)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하여 간첩으로 몰아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기록을 보면 무엇 때문에 조봉암을 간첩이라고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조봉암이 간첩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양명산이 조봉암에게 주었다는 돈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북에서 보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죽산이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밝혔다.
4·19직후 진보당 관계자들이 주축을 이룬 사회대중당이 출범했지만 이듬해 발생한 5·16으로 사회대중당이 해산되고 주요 관계자 대부분이 사법처리되면서 죽산의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 당시에는 사회주의 경력의 죽산에 대해 명예회복 문제가 거론되기 어려웠다.
◆처형된지 30여년만에야 명예회복 청원 =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죽산 죽산이 처형된 지 29년이 되는 1988년 ‘죽산조봉암선생 추모사업회’(회장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가 만들어지면서다.
추모사업회는 1991년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민주당 공동대표였던 김대중 이기택 등 여야 정치인 86명이 서명한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진보당 서울시당 조직부장출신의 허영무(77) 죽산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장(추모사업회가 확대개편됨)은 “여야 대표들과 최고위원 모두가 청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죽산의 처형이 부당하고 불행한 민족사의 한 비극이었다는 인식에 전국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모사업회는 같은 해 국회의원 56명의 서명을 받아 청원과 함께 죽은 사람에 대한 사면복권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한 ‘사면복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죽산에 대한 사면청원과 사면복권법 개정안은 156회 국회가 여야격돌로 파행운영되면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지난 97년 정권교체로 집권한 국민의 정부와 현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만이 당차원에서 조봉암 사건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사법이 진실규명 걸림돌 될 수도 = 현 정부는 최근 과거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서훈을 하겠다고 밝혔고 3월에는 몽양 등 일부 인사들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과거 일제하 항일운동이나 해방후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되거나 은폐된 사건을 재조사하는 것을 골자로한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안’(일명 과거사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과거사법은 진실규명 대상에 대법원에 형이 확정된 사건은 제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조봉암 사건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기 때문에 과거사 규명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이 죽산 조봉암을 정적제거 차원에서 처형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건 관계자들과 재판부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과 해방 후 건국과정, 그리고 민주화에 끼친 죽산의 공적은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윤영철 기자 ycyun@naeil.com
◆3대 대선 출마가 화근 = 죽산은 1956년 진보당 후보로 출마했던 3대 대선에서 당시 여당 후보였던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216만표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체포했다.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간첩혐의와 진보당에서 내건 평화통일론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조봉암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당시 죽산에 적용했던 간첩죄는 죽산과 같이 기소됐던 HID(대북공작기관) 공작원 출신 양명산(본명은 양이섭)씨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였다. 58년 6월17일에 있은 1심판결에서 재판부는 죽산에게 당원명부 유출에 대해서만 유죄(국보법위반 혐의)로 인정해 징역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석방했다. 그러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양씨가 자신의 증언을 번복했음에도 간첩혐의를 인정, 죽산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1심에서 석방됐던 진보당 관련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장택상 “죽산 공산주의자 아니다” = 당시 죽산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에 대해 당시 보수정객이었던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서북청년단 출신의 이성주 전 치안국장도 반대입장을 밝혔다.
특히 죽산 구명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장택상은 당시 신문기자들에게 “공산치하가 되면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을 가망이 있을지 몰라도 조봉암은 맨 먼저 저들에게 총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죽산은 해방직후 박헌영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뒀다.
죽산의 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씨도 4·19직후인 1960년 6월 법정신문과의 대담에서 “(이승만 정권이)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하여 간첩으로 몰아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기록을 보면 무엇 때문에 조봉암을 간첩이라고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조봉암이 간첩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양명산이 조봉암에게 주었다는 돈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북에서 보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죽산이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밝혔다.
4·19직후 진보당 관계자들이 주축을 이룬 사회대중당이 출범했지만 이듬해 발생한 5·16으로 사회대중당이 해산되고 주요 관계자 대부분이 사법처리되면서 죽산의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 당시에는 사회주의 경력의 죽산에 대해 명예회복 문제가 거론되기 어려웠다.
◆처형된지 30여년만에야 명예회복 청원 =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죽산 죽산이 처형된 지 29년이 되는 1988년 ‘죽산조봉암선생 추모사업회’(회장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가 만들어지면서다.
추모사업회는 1991년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민주당 공동대표였던 김대중 이기택 등 여야 정치인 86명이 서명한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진보당 서울시당 조직부장출신의 허영무(77) 죽산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장(추모사업회가 확대개편됨)은 “여야 대표들과 최고위원 모두가 청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죽산의 처형이 부당하고 불행한 민족사의 한 비극이었다는 인식에 전국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모사업회는 같은 해 국회의원 56명의 서명을 받아 청원과 함께 죽은 사람에 대한 사면복권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한 ‘사면복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죽산에 대한 사면청원과 사면복권법 개정안은 156회 국회가 여야격돌로 파행운영되면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지난 97년 정권교체로 집권한 국민의 정부와 현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만이 당차원에서 조봉암 사건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사법이 진실규명 걸림돌 될 수도 = 현 정부는 최근 과거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서훈을 하겠다고 밝혔고 3월에는 몽양 등 일부 인사들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과거 일제하 항일운동이나 해방후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되거나 은폐된 사건을 재조사하는 것을 골자로한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안’(일명 과거사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과거사법은 진실규명 대상에 대법원에 형이 확정된 사건은 제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조봉암 사건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기 때문에 과거사 규명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이 죽산 조봉암을 정적제거 차원에서 처형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건 관계자들과 재판부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과 해방 후 건국과정, 그리고 민주화에 끼친 죽산의 공적은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윤영철 기자 ycyu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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