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북한 지도부를 끌어안아야 북핵문제 풀 수 있어
최근 한미회담에서 두 정상이 북핵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데 확인하고 북한도 7월 6자회담 복귀를 시사함으로써 협상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정부가 반대편을 끌어안아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되었다.
언론인이자 존스홉킨스대학 부교수인 돈 오버도퍼는 노틸러스연구소 웹사이트 기고문을 통해 “미국 정부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었다”면서 “북핵문제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해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북아 국가 중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지만 북한과의 이해관계가 제 각기 달라 협상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이 외부로 누출될 경우 최대 피해국은 미국이 될 수 있으므로 누구보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의 기고문을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 핵위기의 기원
한반도 핵위기는 그 뿌리가 아주 깊기 때문에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한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2차대전 후 뜻하지 않게 돌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사실 하나의 나라다.
한국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오래된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7세기 후반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20세기 중반까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정부를 가진 나라로써 그 정체성을 수천년 동안 지켜왔다.
또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열강으로 둘러싸인 위험한 지역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힘든 역사를 살아온 만큼 국민성도 아주 강인하다.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한반도에 핵위기가 불어 닥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의 책임이 있다.
2차대전 말, 히로시마원폭 투하 직후 만주의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이어 일본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인정하고 한반도 남쪽에 대한 점령권을 확보하였다.
이 한반도 분할점령은 미국과 소련의 임시조치였지만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말았다. 전 미국외무부관리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4년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내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을 두 조각 낸 무거운 책임”이 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1950년 미국무부장관 딘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중단되었지만 또 다른 불안을 잉태했다.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동맹의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핵 1차위기와 협상
반면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60년대 초부터 핵개발을 시작한 북한은 1980년경 이미 영변원자로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영변원자로의 규모에 놀란 소련의 압력으로 1985년 NPT에 가입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했으나 IAEA와 북한의 마찰은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1993년 초 북한이 NPT탈퇴를 언급하자 북-미갈등은 전쟁직전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지만 지미 카터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가까스로 봉합됐다.
당시 카터를 만난 김일성은 북-미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수로 건설을 해주면 핵시설을 해체할 것이며 미국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IAEA사찰도 계속 받겠다고 다짐했다.
김일성은 카터와의 회담 후 3주일 만에 사망했지만 후계자인 김정일은 협상을 지속시켰고 양측은 1994년 10월 미국이 매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영변핵시설 동결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의 핵위기는 큰 고비를 넘기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북핵 2차위기 발생과 미국의 대응
그러나 2002년 여름,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관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확보한 미국은 북한이 협상을 어기고 우라늄핵프로그램을 개시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양측의 갈등국면이 재개됐다.
하지만 94년협의에서는 플루토늄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라늄농축이 북미합의를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남북한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협정에는 위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2002년11월 필자가 전 주한 미대사 도날드 그렉과 코리아소사어티부회장 프레드 캐리어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농축우라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어떤 부인도 하지 않았다. 방문단 일행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북한 당국은 “다음 3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미국의 핵우려를 깨끗이 해소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할 것. 즉 북한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공격이나 체제전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2. 북한의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말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지원도 바라지 않으니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할 것.
3.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을 핵무기나 혹은 다른 수단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평양에서 돌아온 방문단 일행은 미국정부에게 “즉시 협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정부내에는 “포용정책은 협상을 파기한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2년 11월14일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중단을 발표하였다.
결국 북한도 12월12일 영변원자로 재가동을 발표하고 12월21일 원자로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였다. 곧이어 NPT를 탈퇴하고 IAEA사찰단을 추방한 후 폐연로봉 재처리에 들어갔다.
부시정부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물쭈물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부시정부의 초기대응 실패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상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정부가 이라크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이라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시정부로서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북한의 이웃국가들을 북핵문제 해결에 동참시킨다”는 아이디어였는데 이것이 6자회담으로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2003년4월 미국 북한 중국의 3자회담이 북경에서 열렸고, 이어서 2003년 8월과 2004년2월, 6월 3차례에 걸쳐 6자회담이 진행되었다.
양측의 의견접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3차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던 북한은 돌연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개발혐의를 부인하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6자회담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공식선언하였고 3월31일에는 핵보유국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급한 것은 미국, 북한 지도부를 포용해야
북한을 둘러싼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모두 북한과 제각기 다른 이해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이 점도 북핵해결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 이제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40세 이하로 바뀌었다. 이들은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 북한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일으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서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큰 위험이 아니다. 다만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 일본, 특히 대만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한편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도 바라지 않는다. 수십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지금처럼 일종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핵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북한에 대한 어떤 제재나 위협에도 반대하고 있다.
일본의 입장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을 만났던 고이즈미는 협상을 지지하는 한편 미국에게도 대북 포용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납북일본인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강경한 자세로 북한을 자극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때 북한과 가장 밀접했던 나라였지만 지금은 거의 영향력이 없어 방관자적 입장에 가깝다. 다만 협력적이고 건설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미국이야말로 북한의 핵 무장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나라다. 북한이 미국본토를 공격할 장거리 미사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알카에다나 미국에 적대적인 중동국가에게 핵무기나 그 기술을 이전할 경우 미국에게는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양분된 부시정부의 내부분열로 인해 미국의 북핵정책은 정체상태에 빠져 해결능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협상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다. 북핵문제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강경파들이 협상의 진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내분은 부시의 이중적인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북한을 악의 축이며 혐오의 대상이라고 비난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다짐하기로 한다.
북핵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도 않을 것이고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혹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서 미봉책으로 대충 처리하고 넘어가고 싶은 유혹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간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는 계속될 것이고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은 북한의 핵능력을 더욱 강화시켜줄 것이다. 결국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북한의 핵무장 능력은 커질 것이며, 해결은 그만큼 더 어려워 질 것이다.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유일한 해결책은 반대편을 끌어안는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지도자들을 싫어했지만 그들을 포용했고, 1970년대 이전에는 중국 지도부도 혐오했지만 그들을 포용하는 방법도 알아내었다. 이처럼 북한을 포용하는 방법 또한 어렵지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선택하던 간에 한반도의 핵문제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노틸러스 14 /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최근 한미회담에서 두 정상이 북핵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데 확인하고 북한도 7월 6자회담 복귀를 시사함으로써 협상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정부가 반대편을 끌어안아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되었다.
언론인이자 존스홉킨스대학 부교수인 돈 오버도퍼는 노틸러스연구소 웹사이트 기고문을 통해 “미국 정부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었다”면서 “북핵문제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해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북아 국가 중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지만 북한과의 이해관계가 제 각기 달라 협상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이 외부로 누출될 경우 최대 피해국은 미국이 될 수 있으므로 누구보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의 기고문을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 핵위기의 기원
한반도 핵위기는 그 뿌리가 아주 깊기 때문에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한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2차대전 후 뜻하지 않게 돌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사실 하나의 나라다.
한국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오래된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7세기 후반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20세기 중반까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정부를 가진 나라로써 그 정체성을 수천년 동안 지켜왔다.
또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열강으로 둘러싸인 위험한 지역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힘든 역사를 살아온 만큼 국민성도 아주 강인하다.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한반도에 핵위기가 불어 닥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의 책임이 있다.
2차대전 말, 히로시마원폭 투하 직후 만주의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이어 일본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인정하고 한반도 남쪽에 대한 점령권을 확보하였다.
이 한반도 분할점령은 미국과 소련의 임시조치였지만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말았다. 전 미국외무부관리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4년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내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을 두 조각 낸 무거운 책임”이 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1950년 미국무부장관 딘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중단되었지만 또 다른 불안을 잉태했다.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동맹의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핵 1차위기와 협상
반면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60년대 초부터 핵개발을 시작한 북한은 1980년경 이미 영변원자로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영변원자로의 규모에 놀란 소련의 압력으로 1985년 NPT에 가입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했으나 IAEA와 북한의 마찰은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1993년 초 북한이 NPT탈퇴를 언급하자 북-미갈등은 전쟁직전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지만 지미 카터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가까스로 봉합됐다.
당시 카터를 만난 김일성은 북-미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수로 건설을 해주면 핵시설을 해체할 것이며 미국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IAEA사찰도 계속 받겠다고 다짐했다.
김일성은 카터와의 회담 후 3주일 만에 사망했지만 후계자인 김정일은 협상을 지속시켰고 양측은 1994년 10월 미국이 매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영변핵시설 동결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의 핵위기는 큰 고비를 넘기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북핵 2차위기 발생과 미국의 대응
그러나 2002년 여름,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관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확보한 미국은 북한이 협상을 어기고 우라늄핵프로그램을 개시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양측의 갈등국면이 재개됐다.
하지만 94년협의에서는 플루토늄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라늄농축이 북미합의를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남북한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협정에는 위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2002년11월 필자가 전 주한 미대사 도날드 그렉과 코리아소사어티부회장 프레드 캐리어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농축우라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어떤 부인도 하지 않았다. 방문단 일행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북한 당국은 “다음 3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미국의 핵우려를 깨끗이 해소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할 것. 즉 북한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공격이나 체제전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2. 북한의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말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지원도 바라지 않으니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할 것.
3.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을 핵무기나 혹은 다른 수단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평양에서 돌아온 방문단 일행은 미국정부에게 “즉시 협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정부내에는 “포용정책은 협상을 파기한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2년 11월14일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중단을 발표하였다.
결국 북한도 12월12일 영변원자로 재가동을 발표하고 12월21일 원자로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였다. 곧이어 NPT를 탈퇴하고 IAEA사찰단을 추방한 후 폐연로봉 재처리에 들어갔다.
부시정부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물쭈물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부시정부의 초기대응 실패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상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정부가 이라크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이라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시정부로서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북한의 이웃국가들을 북핵문제 해결에 동참시킨다”는 아이디어였는데 이것이 6자회담으로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2003년4월 미국 북한 중국의 3자회담이 북경에서 열렸고, 이어서 2003년 8월과 2004년2월, 6월 3차례에 걸쳐 6자회담이 진행되었다.
양측의 의견접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3차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던 북한은 돌연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개발혐의를 부인하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6자회담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공식선언하였고 3월31일에는 핵보유국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급한 것은 미국, 북한 지도부를 포용해야
북한을 둘러싼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모두 북한과 제각기 다른 이해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이 점도 북핵해결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 이제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40세 이하로 바뀌었다. 이들은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 북한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일으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서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큰 위험이 아니다. 다만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 일본, 특히 대만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한편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도 바라지 않는다. 수십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지금처럼 일종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핵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북한에 대한 어떤 제재나 위협에도 반대하고 있다.
일본의 입장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을 만났던 고이즈미는 협상을 지지하는 한편 미국에게도 대북 포용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납북일본인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강경한 자세로 북한을 자극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때 북한과 가장 밀접했던 나라였지만 지금은 거의 영향력이 없어 방관자적 입장에 가깝다. 다만 협력적이고 건설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미국이야말로 북한의 핵 무장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나라다. 북한이 미국본토를 공격할 장거리 미사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알카에다나 미국에 적대적인 중동국가에게 핵무기나 그 기술을 이전할 경우 미국에게는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양분된 부시정부의 내부분열로 인해 미국의 북핵정책은 정체상태에 빠져 해결능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협상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다. 북핵문제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강경파들이 협상의 진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내분은 부시의 이중적인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북한을 악의 축이며 혐오의 대상이라고 비난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다짐하기로 한다.
북핵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도 않을 것이고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혹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서 미봉책으로 대충 처리하고 넘어가고 싶은 유혹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간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는 계속될 것이고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은 북한의 핵능력을 더욱 강화시켜줄 것이다. 결국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북한의 핵무장 능력은 커질 것이며, 해결은 그만큼 더 어려워 질 것이다.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유일한 해결책은 반대편을 끌어안는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지도자들을 싫어했지만 그들을 포용했고, 1970년대 이전에는 중국 지도부도 혐오했지만 그들을 포용하는 방법도 알아내었다. 이처럼 북한을 포용하는 방법 또한 어렵지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선택하던 간에 한반도의 핵문제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노틸러스 14 /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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