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6월 서울지법 민사 단독 판사 28인은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이란 건의문을 제출했다. 건의문에는 과거 군사정권에 휘둘렸던 사법부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법관의 관료화를 막고 대법원장의 인사권 견제를 통해 소신 있는 판결을 보장해야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건의문이 나오자 변호사 단체와 사법연수생들도 동조하고 나섰고 결국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이 퇴진했다. 1993년 사법민주화운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3차 사법파동’으로 불린다.
최근 발간된 우리법연구회 논문집(II)에 실린 김종훈 변호사의 ‘1993년 사법민주화운동 회고’라는 글과 박시환 변호사가 공개한 건의문 내용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3차 파동 발단이 된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 = 3차 사법파동이 발생한 1993년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한참 높아질 때였다. 하지만 유독 사법부만큼은 개혁의 무풍지대였다고 김 변호사는 회고하고 있다. 사법개혁이라고 해봐야 기껏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금지 정도가 논의될 뿐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라는 문건을 쓰게 됐고, 이 글이 3차 사법파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글은 당초 법률신문에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됐고, 내막을 알고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문건의 내용은 사법부 스스로의 반성과 함께 사법 독립을 위해 법관 신분보장, 법관회의의 제도화 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문건이 언론에 공개된 후 법원 수뇌부는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문건을 일선 법원까지 내려 보내 법관들에게 열람시켜 의견을 수렴하도록 한 것. 또 전화통지문으로 긴급하게 전국법원장회의를 소집했고 이례적으로 이용훈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을 참석시켰다. 이 지원장은 이에 앞서 서부지원 법관회의를 열어 법관 전원에게 의견개진을 요구했고, 그 내용을 종합해 법원장회의에서 발언했다. 그렇게 해서 법원장 회의에서 사법부 개혁방안이 나왔다.
◆건의문은 이창훈 변호사 ‘취중작품’ = 하지만 법원 수뇌부의 개혁방안은 소장판사들의 기대에는 미흡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이란 건의서다.
박시환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법원 안팎으로부터 명문으로 인정받았던 이 건의서는 사실 이창훈 변호사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 하루 저녁에 ‘일필휘지’로 쓴 작품이다.
건의서에서는 우선 사법개혁이 필요하게 된 근본원인에 대한 검토와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전제하고 국가 정치권력이 국민 기본권을 유린할 때 침묵했던 사법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또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법관인사위원회 의결기구화 등을 통한 대법원장의 인사권 견제, 수평적 법관회의, 또는 전국법관회의 설치 고려, 사법개혁에 대한 지속적인 법관의견 수렴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건의문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 단독판사 40명중 28명이 찬성하고, 10명은 반대, 2명은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명기돼 있다.
내용도 그렇지만 건의서라는 형식도 파격적이었다. 1, 2차 사법파동 때만해도 법관들의 의견은 공개성명서를 통해서 표출됐다. 건의서는 내용과 대상, 목적이 더욱 뚜렷하다는 점에서 강한 의미를 띤다.
◆정치판사 논쟁 = 김종훈 변호사는 3차 사법파동 당시 최대 화두는 ‘정치판사 논쟁’이었다고 보았다. 정치판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그가 꼽은 것은 서울형사지방법원, 국보위 파견, 청와대 파견 등이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5·16 쿠데타 이후 주동세력이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김제형 당시 서울지방법원장이 영장발부를 거부하는 등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자 형사재판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됐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실제 1980년 이후 서울형사지법은 그보다 규모가 큰 서울민사지법보다 상위의 지위를 누렸고, 승진이나 보직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또 5·16 직후 국보위에 파견됐던 판사, 5, 6공화국 시절 청와대에 파견 나갔던 판사들 역시 승진과 보직에서 혜택을 받으며 정치판사화 했다고 김 변호사는 비판하고 있다.
이 때문에 3차 사법파동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폐지 주장이 제기됐고, 사법수뇌부도 이를 받아들여 김덕주 대법원장이 기획한 ‘사법제도심의연구위원회’에서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의 통합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하지만 사법파동으로 김 대법원장이 사임하면서 서울형사지법 폐지는 윤 관 대법원장시대로 넘어갔다. 물론 윤 대법원장 후 발족한 사법제도발전위원회에서 서울형사지법 폐지를 적극 주도한 것은 김 변호사 본인이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최근 발간된 우리법연구회 논문집(II)에 실린 김종훈 변호사의 ‘1993년 사법민주화운동 회고’라는 글과 박시환 변호사가 공개한 건의문 내용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3차 파동 발단이 된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 = 3차 사법파동이 발생한 1993년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한참 높아질 때였다. 하지만 유독 사법부만큼은 개혁의 무풍지대였다고 김 변호사는 회고하고 있다. 사법개혁이라고 해봐야 기껏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금지 정도가 논의될 뿐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라는 문건을 쓰게 됐고, 이 글이 3차 사법파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글은 당초 법률신문에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됐고, 내막을 알고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문건의 내용은 사법부 스스로의 반성과 함께 사법 독립을 위해 법관 신분보장, 법관회의의 제도화 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문건이 언론에 공개된 후 법원 수뇌부는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문건을 일선 법원까지 내려 보내 법관들에게 열람시켜 의견을 수렴하도록 한 것. 또 전화통지문으로 긴급하게 전국법원장회의를 소집했고 이례적으로 이용훈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을 참석시켰다. 이 지원장은 이에 앞서 서부지원 법관회의를 열어 법관 전원에게 의견개진을 요구했고, 그 내용을 종합해 법원장회의에서 발언했다. 그렇게 해서 법원장 회의에서 사법부 개혁방안이 나왔다.
◆건의문은 이창훈 변호사 ‘취중작품’ = 하지만 법원 수뇌부의 개혁방안은 소장판사들의 기대에는 미흡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이란 건의서다.
박시환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법원 안팎으로부터 명문으로 인정받았던 이 건의서는 사실 이창훈 변호사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 하루 저녁에 ‘일필휘지’로 쓴 작품이다.
건의서에서는 우선 사법개혁이 필요하게 된 근본원인에 대한 검토와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전제하고 국가 정치권력이 국민 기본권을 유린할 때 침묵했던 사법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또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법관인사위원회 의결기구화 등을 통한 대법원장의 인사권 견제, 수평적 법관회의, 또는 전국법관회의 설치 고려, 사법개혁에 대한 지속적인 법관의견 수렴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건의문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 단독판사 40명중 28명이 찬성하고, 10명은 반대, 2명은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명기돼 있다.
내용도 그렇지만 건의서라는 형식도 파격적이었다. 1, 2차 사법파동 때만해도 법관들의 의견은 공개성명서를 통해서 표출됐다. 건의서는 내용과 대상, 목적이 더욱 뚜렷하다는 점에서 강한 의미를 띤다.
◆정치판사 논쟁 = 김종훈 변호사는 3차 사법파동 당시 최대 화두는 ‘정치판사 논쟁’이었다고 보았다. 정치판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그가 꼽은 것은 서울형사지방법원, 국보위 파견, 청와대 파견 등이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5·16 쿠데타 이후 주동세력이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김제형 당시 서울지방법원장이 영장발부를 거부하는 등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자 형사재판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됐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실제 1980년 이후 서울형사지법은 그보다 규모가 큰 서울민사지법보다 상위의 지위를 누렸고, 승진이나 보직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또 5·16 직후 국보위에 파견됐던 판사, 5, 6공화국 시절 청와대에 파견 나갔던 판사들 역시 승진과 보직에서 혜택을 받으며 정치판사화 했다고 김 변호사는 비판하고 있다.
이 때문에 3차 사법파동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폐지 주장이 제기됐고, 사법수뇌부도 이를 받아들여 김덕주 대법원장이 기획한 ‘사법제도심의연구위원회’에서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의 통합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하지만 사법파동으로 김 대법원장이 사임하면서 서울형사지법 폐지는 윤 관 대법원장시대로 넘어갔다. 물론 윤 대법원장 후 발족한 사법제도발전위원회에서 서울형사지법 폐지를 적극 주도한 것은 김 변호사 본인이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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