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파르나스 공동묘지 가는 길목에 카페 ‘자유’가 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생전에 아침식사를 하면서 조간신문을 읽었던 카페이다. 사르트르가 작고한지 4반세기인데도 ‘자유’ 는 옛 모습 그대로 영업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사르트르가 옛날 아침을 먹던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희미하게 기억이 날뿐이라는 대답이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같이 자신이 창간한 리베라시옹을 읽고 대화하며 ‘카페오레’와 ‘크르와상’을 들었다고 한다. 공동묘지 입구에서 오른쪽 5번째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나란히 묻혀 있다. ‘사르트르 1905-1980’ 그리고 ‘보부아르 1908-1986’라고 새긴 작은 묘석만이 20세기 최대의 작가, 철학자의 유택임을 알려줄 뿐이다.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의 표시도 없어 쓸쓸하다.
‘현대’에 ‘오적’ 실은 사르트르
1974년 여름 사르트르는 그의 ‘가족’인 르몽드지 문화부 미셀 콩타 기자를 당시 파리특파원이던 나에게 보냈다. 콩타는 나에게 사르트르의 특별한 ‘부탁’을 전한다고 했다. 놀라운 부탁이었다. 사르트르가 창간한 ‘현대’지에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번역해 실을 예정인데, 베트남 역자가 일본어 텍스트로 불어번역을 했으나 난해한 구절이 많아 주석을 자세히 달아주겠느냐는 것이었다.
대단히 난감한 부탁이었다. 한국대사관의 정보부원이 김지하를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한 운동권 후배 S의 옥중증언을 나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고 유신시대라는 한국 상황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탁’을 수락했다. 주로 고관대작들과 군의 장성을 풍자한 부분을 한 달간 다듬고 자세한 주석을 달았다. 나는 콩타에게 ‘현대’지에는 시를 싣지 않는 원칙을 깨고 왜 사르트르가 ‘오적’을 싣는지 물었다. 콩타는 ‘한국민주주의를 위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사르트르가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적’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하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고 제3세계문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안다. 보부아르가 전화로 사르트르의 감사를 나에게 전했다.
사르트르와 아롱은 파리고등사범 동갑내기 동기임에도 이념논쟁은 격렬했다. 아롱의 한국전쟁 남침설과 사르트르의 북침설이 대결했다. 사르트르는 결국 남한의 유도에 의한 남침으로 수정하지만 구소련의 기밀문서는 남침을 확인해 아롱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롱과 사르트르는 반나치 레지스탕스였다. 아롱은 드골과 같이 임시정부에서, 사르트르는 국내서 ‘자유와 사회주의’라는 좌파조직에서 저항운동을 했다. 아롱은 자유주의 우파였고 사르트르는 ‘공산당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공산당의 비난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하는데 아롱과 사르트르가 손을 잡음으로써 말년에 학창시절의 우정을 회복한다.
아롱이 작고(1983년)하기 전 1980년3월24일, 나는 마지막 회견을 했다. ‘서울의 봄’이 세계 언론의 이슈로 연일 대서특필될 때였다.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번 서울을 방문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더 시간이 걸린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로 열매를 맺는다. 한국지식인들은 민주주의가 쉽게 온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겉으로 민주를 외치지만 감투를 탐하는 위선자가 많더라. 한국민주주의의 취약성이 여기에 있다!” 냉혹한 경고였다. 그래서 아롱과의 이 인터뷰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아롱의 ‘서울의 봄’ 경고
그러나 그의 예고는 적중했다. 곧 광주민주운동이 터졌고 5공 독재 7년 후 1987년 시민항쟁결과 민주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아롱, 프랑스의 20세기 최대의 석학들의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사르트르의 유택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르트르와 아롱, 누가 더 위대하며 더 옳았는가? 오늘도 논쟁거리다. 나는 철학과 문학으로 사르트르가 위대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아편’과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서 설파했듯 정치와 이념문제에 대한 혜안은 구소련의 멸망에서 보듯 아롱에게 있다고 말한다. 아롱은 1976년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답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는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썼다.”고. 그러나 ‘존재와 무’ ‘구토’와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사르트르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천려의 일실’을 범했다.
‘현대’에 ‘오적’ 실은 사르트르
1974년 여름 사르트르는 그의 ‘가족’인 르몽드지 문화부 미셀 콩타 기자를 당시 파리특파원이던 나에게 보냈다. 콩타는 나에게 사르트르의 특별한 ‘부탁’을 전한다고 했다. 놀라운 부탁이었다. 사르트르가 창간한 ‘현대’지에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번역해 실을 예정인데, 베트남 역자가 일본어 텍스트로 불어번역을 했으나 난해한 구절이 많아 주석을 자세히 달아주겠느냐는 것이었다.
대단히 난감한 부탁이었다. 한국대사관의 정보부원이 김지하를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한 운동권 후배 S의 옥중증언을 나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고 유신시대라는 한국 상황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탁’을 수락했다. 주로 고관대작들과 군의 장성을 풍자한 부분을 한 달간 다듬고 자세한 주석을 달았다. 나는 콩타에게 ‘현대’지에는 시를 싣지 않는 원칙을 깨고 왜 사르트르가 ‘오적’을 싣는지 물었다. 콩타는 ‘한국민주주의를 위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사르트르가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적’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하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고 제3세계문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안다. 보부아르가 전화로 사르트르의 감사를 나에게 전했다.
사르트르와 아롱은 파리고등사범 동갑내기 동기임에도 이념논쟁은 격렬했다. 아롱의 한국전쟁 남침설과 사르트르의 북침설이 대결했다. 사르트르는 결국 남한의 유도에 의한 남침으로 수정하지만 구소련의 기밀문서는 남침을 확인해 아롱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롱과 사르트르는 반나치 레지스탕스였다. 아롱은 드골과 같이 임시정부에서, 사르트르는 국내서 ‘자유와 사회주의’라는 좌파조직에서 저항운동을 했다. 아롱은 자유주의 우파였고 사르트르는 ‘공산당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공산당의 비난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하는데 아롱과 사르트르가 손을 잡음으로써 말년에 학창시절의 우정을 회복한다.
아롱이 작고(1983년)하기 전 1980년3월24일, 나는 마지막 회견을 했다. ‘서울의 봄’이 세계 언론의 이슈로 연일 대서특필될 때였다.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번 서울을 방문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더 시간이 걸린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로 열매를 맺는다. 한국지식인들은 민주주의가 쉽게 온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겉으로 민주를 외치지만 감투를 탐하는 위선자가 많더라. 한국민주주의의 취약성이 여기에 있다!” 냉혹한 경고였다. 그래서 아롱과의 이 인터뷰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아롱의 ‘서울의 봄’ 경고
그러나 그의 예고는 적중했다. 곧 광주민주운동이 터졌고 5공 독재 7년 후 1987년 시민항쟁결과 민주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아롱, 프랑스의 20세기 최대의 석학들의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사르트르의 유택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르트르와 아롱, 누가 더 위대하며 더 옳았는가? 오늘도 논쟁거리다. 나는 철학과 문학으로 사르트르가 위대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아편’과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서 설파했듯 정치와 이념문제에 대한 혜안은 구소련의 멸망에서 보듯 아롱에게 있다고 말한다. 아롱은 1976년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답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는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썼다.”고. 그러나 ‘존재와 무’ ‘구토’와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사르트르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천려의 일실’을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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