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전4권 중 1·2권
비봉출판사/각권 1만2000원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 우리 배가 거의 다 물러나 돌아옴에 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으며 … 이때에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학익진 대형을 이루도록 명령을 내리고 … 승리한 기세를 업고 용약분발하여 서로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 살과 탄환을 교대로 쏘아부치니 …’
- 충무공의 장계(견내량 파왜병장)
충무공은 임진왜란 당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날 그날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청소년 때 ‘난중일기’를 읽어본 독자들은 ‘아닌데… 말로만 일기지, 드문드문 썼던 걸’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충무공은 후방에 있을 때 난중일기를 썼고 전장에서는 메모 형식의 ‘선상일지’를 적었다. 귀항 후에는 이를 문장으로 고쳐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따라서 ‘난중일기’와 충무공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기록된 순서대로 읽으면 거의 완벽한 ‘임진왜란사’가 된다.
◆2~3시간 만에 끝난 한산도대첩 = 앞에서 인용한 장계는 ‘한산대첩’을 보고한 ‘견내량 파왜병장(見乃梁 破倭兵狀)’의 일부이다.
견내량은 지금 거제대교가 놓여 있는 거제도와 통영시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견내량 북쪽 사등면 포구에서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 앞바다까지는 약 18km. 이순신(전라좌수영) 함대의 거짓 퇴각을 본 왜선들은 한산도 방향으로 흐르는 조수를 타고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수륙양면의 맹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선들은 2시간 정도의 추격전 끝에 한산도 앞바다에 이른다. 그때 도주하던 이순신 함대는 돌연 뒤로 돌아 예의 ‘학익진’을 펼친다. 같은 순간 일본 함대 뒤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전라우수영) 함대와 원 균(경상우수영) 함대가 같이 학익진을 펼치고 퇴로를 차단했다.
한산도해전에서 와키자카 함대는 불과 2~3시간 만에 궤멸됐다. 수천명의 일본 수군이 사망했고 전선 70여척이 불타거나 침몰했다. 반면 조선함대가 치른 희생은 사망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날 적장 와키자카는 갑옷을 벗고 졸병 복색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건진다. 뒷날 그는 정유재란 때 칠천량해전(지금의 광양만 일대)에서 원 균 통제사를 상대로 이날의 치욕을 되갚는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사천포와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이순신이 전선 13척으로 방어하는 ‘울돌목(명량해협·진도대교 일대)’으로 향한다.
◆‘학이 날개를 접은 모습’으로 울돌목 막아서 = 울돌목 해전에서 조선 함대는 불과 13척, 왜군은 전투선 130여척에 수송선 300여척의 엄청난 규모였다.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결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이 해전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울돌목 해전에서 길목을 막아선 이순신 선단의 판옥선들은 날개를 접은 모습의 학익진을 펴고 주위를 에워싼 왜선들에게 최소한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화력은 선두를 선 왜장과 왜장선에 집중시켰고 왜장이 집중타를 맞고 바다로 떨어지자 그 시체를 건져내 토막을 쳐 매달았다. 이처럼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단계적으로 승기를 잡아나갔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천행(天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해전사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울돌목 해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지리학적 탐구의 결과였다.
이순신은 정유재란을 맞아 왜군을 막아낼 제2의 전선을 찾았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바로 ‘울돌목 방어선’이다. 이 위치를 찾기 위해 이순신이 그 유명한 ‘백의종군 암행길’을 떠났을 때 권 율 도원수는 몇 사람의 군관을 대동시켜 그의 암행을 도왔다.
◆백병전 없는 순수 ‘포격전’ = 충무공이 구사한 해전의 특징은 ‘백병전’이 없는 순수한 ‘포격전’이라는 점이다. 이는 거북선과 학익진 전법 때문에 가능한 전술이었는데, 세계 해전사에서 보면 무려 3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순신이 23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앞선 해전술 때문이었다. 일본군들의 주특기였던 백병전을 감행했다면 농어민들이 주축이었던 조선 수군은 신 립 장군의 8000군사처럼 초기에 모두 궤멸되었을 것이다.
20세기 일본 해군은 충무공 해전술 연구를 통해 ‘학익진’의 원리를 터득한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은 청일해전과 러일해전에서 연거푸 승리한다. 일본해군의 학익진(丁자진) 해전원리를 계승한 영국해군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해군을 물리친다. 2차대전 때는 미국해군이 레이테만에서 학익진(T자진)으로 일본의 태평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책을 엮은 ‘이순신역사연구회’는 교사, 기업연수원 강사, 기업 홍보담당자 등으로 구성된 동아리다. 이 책은 이들이 지난 25년 동안 자료 수집, 연구, 토론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로서, 총 4권 중 1·2권이 먼저 출간됐다.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이순신역사연구회/전4권 중 1·2권
비봉출판사/각권 1만2000원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 우리 배가 거의 다 물러나 돌아옴에 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으며 … 이때에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학익진 대형을 이루도록 명령을 내리고 … 승리한 기세를 업고 용약분발하여 서로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 살과 탄환을 교대로 쏘아부치니 …’
- 충무공의 장계(견내량 파왜병장)
충무공은 임진왜란 당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날 그날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청소년 때 ‘난중일기’를 읽어본 독자들은 ‘아닌데… 말로만 일기지, 드문드문 썼던 걸’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충무공은 후방에 있을 때 난중일기를 썼고 전장에서는 메모 형식의 ‘선상일지’를 적었다. 귀항 후에는 이를 문장으로 고쳐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따라서 ‘난중일기’와 충무공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기록된 순서대로 읽으면 거의 완벽한 ‘임진왜란사’가 된다.
◆2~3시간 만에 끝난 한산도대첩 = 앞에서 인용한 장계는 ‘한산대첩’을 보고한 ‘견내량 파왜병장(見乃梁 破倭兵狀)’의 일부이다.
견내량은 지금 거제대교가 놓여 있는 거제도와 통영시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견내량 북쪽 사등면 포구에서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 앞바다까지는 약 18km. 이순신(전라좌수영) 함대의 거짓 퇴각을 본 왜선들은 한산도 방향으로 흐르는 조수를 타고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수륙양면의 맹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선들은 2시간 정도의 추격전 끝에 한산도 앞바다에 이른다. 그때 도주하던 이순신 함대는 돌연 뒤로 돌아 예의 ‘학익진’을 펼친다. 같은 순간 일본 함대 뒤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전라우수영) 함대와 원 균(경상우수영) 함대가 같이 학익진을 펼치고 퇴로를 차단했다.
한산도해전에서 와키자카 함대는 불과 2~3시간 만에 궤멸됐다. 수천명의 일본 수군이 사망했고 전선 70여척이 불타거나 침몰했다. 반면 조선함대가 치른 희생은 사망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날 적장 와키자카는 갑옷을 벗고 졸병 복색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건진다. 뒷날 그는 정유재란 때 칠천량해전(지금의 광양만 일대)에서 원 균 통제사를 상대로 이날의 치욕을 되갚는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사천포와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이순신이 전선 13척으로 방어하는 ‘울돌목(명량해협·진도대교 일대)’으로 향한다.
◆‘학이 날개를 접은 모습’으로 울돌목 막아서 = 울돌목 해전에서 조선 함대는 불과 13척, 왜군은 전투선 130여척에 수송선 300여척의 엄청난 규모였다.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결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이 해전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울돌목 해전에서 길목을 막아선 이순신 선단의 판옥선들은 날개를 접은 모습의 학익진을 펴고 주위를 에워싼 왜선들에게 최소한으로 응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화력은 선두를 선 왜장과 왜장선에 집중시켰고 왜장이 집중타를 맞고 바다로 떨어지자 그 시체를 건져내 토막을 쳐 매달았다. 이처럼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단계적으로 승기를 잡아나갔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천행(天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해전사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울돌목 해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지리학적 탐구의 결과였다.
이순신은 정유재란을 맞아 왜군을 막아낼 제2의 전선을 찾았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바로 ‘울돌목 방어선’이다. 이 위치를 찾기 위해 이순신이 그 유명한 ‘백의종군 암행길’을 떠났을 때 권 율 도원수는 몇 사람의 군관을 대동시켜 그의 암행을 도왔다.
◆백병전 없는 순수 ‘포격전’ = 충무공이 구사한 해전의 특징은 ‘백병전’이 없는 순수한 ‘포격전’이라는 점이다. 이는 거북선과 학익진 전법 때문에 가능한 전술이었는데, 세계 해전사에서 보면 무려 3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순신이 23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앞선 해전술 때문이었다. 일본군들의 주특기였던 백병전을 감행했다면 농어민들이 주축이었던 조선 수군은 신 립 장군의 8000군사처럼 초기에 모두 궤멸되었을 것이다.
20세기 일본 해군은 충무공 해전술 연구를 통해 ‘학익진’의 원리를 터득한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은 청일해전과 러일해전에서 연거푸 승리한다. 일본해군의 학익진(丁자진) 해전원리를 계승한 영국해군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해군을 물리친다. 2차대전 때는 미국해군이 레이테만에서 학익진(T자진)으로 일본의 태평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책을 엮은 ‘이순신역사연구회’는 교사, 기업연수원 강사, 기업 홍보담당자 등으로 구성된 동아리다. 이 책은 이들이 지난 25년 동안 자료 수집, 연구, 토론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로서, 총 4권 중 1·2권이 먼저 출간됐다.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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