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6. 의상대사와 화엄10찰>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을까

지역내일 2000-12-29 (수정 2000-12-29 오후 3:16:20)
“둥! 둥! 둥!” 어둠이 깔린 지리산 화엄사, 장쾌한 법고(法鼓) 소리가 멀리 노고단까지 울려퍼
진다.
법고의식이 끝나면 범종 타종이 이어진다. 범종 소리는 범종각 가까이 서서 눈을 감고 들어보아야
한다. 공기를 매개로 전달되는 간접 진동이 이보다 더 클 수 있을까 . 깜짝 놀랄 만큼 크고 장중한 범
종 소리는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모든 고민과 번뇌를 떨쳐버린다.

원융회통(圓融會通)하는 부처의 가르침
‘화엄사’는 통일신라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화엄사에는 8세기경으
로 짐작되는 장대한 ‘석등’(국보 12호)과 그 앞의 ‘돌층계’, 각황전 뒤의 ‘자연석축’, ‘4사
자3층석탑’(국보 35호) 등 창건 당시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두 번의 태극을 이루며 올라가는 진입로가 부석사의 꺾어진 진입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화엄사의 건축미학은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돌층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탑 옆의 가파른 돌층계
를 밟고 조심조심 올라서면 거대한 석등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눈에 들어온다. 석등이 눈에 꽉 차면
석등 뒤로 각황전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나타난다.
만일 깜깜한 밤중에 석등에 켜진 등불을 보고 이 층계를 오르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각황전을 본다
고 생각해보라. 부처님을 만나면서 이 보다 더 큰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건축공간이 또 있을까. 지
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석등 중에서 제일 크다는 각황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국보 제
12호이다. 각황전 뒤에는 부석사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각황전 뒤의 백팔계단을 오르면 ‘4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과 연기
조사가 어머니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조각상이 나타난다. 4마리의 사자가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가
운데 온화한 표정의 어머니가 서 있고, 그 아래 사바세계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가 한잔의 차
를 공양하고 있다.
문자를 통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추상(抽象)의 화엄이 불심(佛心)이 넘쳐흐르는 구체(具體)의
화엄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유교의 효(孝)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되
었다면, 화엄의 효는 이렇듯 우주만물의 아름다운 인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토착적인 산악숭배사상과 결합
‘불국사’와 ‘석굴암’이 수도 서라벌에서 통일신라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전
국각지의 이름난 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찰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
어갔을까. 여기에는 큰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토착적인 산악숭배사상과 여러
가지 종교적 이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장이 창건한 ‘통도사’, 진표가 창건을 주도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승려들이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옷가지 등을 신령한 산에 모시고 절을 지
은 예이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에 절을 세운 경우인데 이는 당시 관
음신앙이 유행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의 성행은 사찰이 산간에 확산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화엄 사찰은 그 배치나 건물구성이 도시형(평지형) 사찰과는 완전히 달랐다. 산세에 따라 건물을 배
치함으로써 회랑(긴 복도)으로 둘러싸인 쌍탑식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던 것
이다.

삼국통일기에 당나라 유학한 의상
의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전 의상은 현장법사의 귀국 소식
을 듣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으나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는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중국행(行)에 성공한 의상은 현장법사가 아니라 지엄(智儼)을 찾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
의 제2조(祖)로 화엄사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의 강권에 의한 통일이 무너
지고 당나라의 이념통치가 확립되던 때였다. 광활한 국토에 다양한 민족, 여러가지 신앙이 뒤엉킨 통
일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이 필요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게 한
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 이기영. <화엄사상>.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을 본국
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고 기록한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의상은 귀국 후 양양 낙산사를 비롯, 전국의 산천을
두루 거쳐 이곳 부석사로 온다. 그는 당시 신라의 문무왕과 직접 교류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서라벌 장안이 아닌 태백산 쪽 변방에 절을 짓고 화엄의 가르침을 펼쳐나갔을
까.
“그때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다보
이는 태백산 줄기 봉황산 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안동대 국학부 이효걸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는 “결국 그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
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상은 비록 유학파였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원효의 정토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펼쳐나갔
다. 화엄사상은 우주론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대중들이 인식하기엔 무척 어려운 개념이다. 그렇지
만 ‘이 땅이 곧 정토’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대중적인 이해가 빠르다. 의상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통
해 대중들을 화엄의 세계로 이끌어낸 위대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부석사는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 ― 중국식 화엄종이 아닌 우리식 화엄종 ―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
찰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무량수불)는 좌우에 아무런 협시보살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
다. 서쪽에 앉아 있는 아미타여래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뒤에 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향
해 절을 하게 된다.
비로봉은 곧 비로자나여래를 뜻한다. 이는 아미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를 동일시했던 의상의 신라식
화엄사상을 잘 보여준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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