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을 다시 그린 사람들 _ 서울시청계천복원추진본부
청계천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고 했다. 태종이 1405년 개경을 출발해 새로운 수도 한양을 향하면서 청계천의 역사는 시작됐다. 1760년 영조는 준설공사를 통해 개천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청계천에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 빨래하는 아낙부터 산업화 과정의 굴삭기 모습. 1970년 ‘인간답게 살고 싶다’를 외치며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까지 모두 청계천의 시대모습이다.
2005년. 600년동안 수도 한양을 흐르던 청계천이 새로운 물길을 찾았다. 청계천 물길을 다시 그린 사람은 누굴까. 2년동안 머릿속에 청계천만 그리며 현장을 누빈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 90여명의 직원은 지난 2년간 청계천에서 호흡하고 청계천에서 밤을 보냈다. 그들은 청계천복원 공사의 최대 난제 중 하나인 6만5000개에 달하는 상가 문제를 해결했다. 상인들과 매일 먹은 술로 위장병까지 생겼지만 상인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청계천복원추진본부를 거쳐간 직원들은 이미 200명에 달한다.
2003년 7월1일.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청계천복원공사는 출발점을 내달렸다.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로 철거를 거쳐 개천 바닥이 드러나면서 청계천추진본부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청계천추진본부 사람들은 청계천에 가장 애착이 큰 사람들이다. 청계천복원 과정에서 구속자가 생기고 오해받은 일들도 있었다.
장석효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은 “2년전 불가능하다는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그 일이 마무리되고 있다. 물론 진행과정에서 불미스런 일도 있었지만 앞으로 남은 일이 더 많다. 우리는 밉던 곱던 청계천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운상가 상인보다 더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렸던 당시 최동윤 복원총괄담당관(현 총무과장)은 상인과의 술자리에 밤을 지새기도 했다. 청계천 주변 재개발을 담당하던 허 영 당시 복원사업단장은 벌써 SH공사를 거쳐 시 주택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복원관리담당관을 지냈던 안준호 심사평가담당관은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며 서울과 청계천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때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주변 재개발 사업을 총괄하던 박성근 당시 복원계획담당관이 강남구청으로 자리를 옮긴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됐기 때문이다. 정병일 복원계획담당관은 “청계천복원 과정에서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결과가 혼탁한 것으로 비춰져 가장 안타깝다”며 “청계천복원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 비리 공무원으로 호도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제 청계천을 지키지 못한다. 한시 조직인 청계천복원본부가 올해말 해체되기 때문이다. 10월1일 청계천 준공식 이후 일부는 본청이나 사업소로 다시 복귀한다. 지금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때다.
정효상 청계천복원기획단장은 “청계천 준공을 앞두고 각종 행사와 투어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지만 복원공사가 끝나면 그 바빴던 때가 그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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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고 했다. 태종이 1405년 개경을 출발해 새로운 수도 한양을 향하면서 청계천의 역사는 시작됐다. 1760년 영조는 준설공사를 통해 개천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청계천에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 빨래하는 아낙부터 산업화 과정의 굴삭기 모습. 1970년 ‘인간답게 살고 싶다’를 외치며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까지 모두 청계천의 시대모습이다.
2005년. 600년동안 수도 한양을 흐르던 청계천이 새로운 물길을 찾았다. 청계천 물길을 다시 그린 사람은 누굴까. 2년동안 머릿속에 청계천만 그리며 현장을 누빈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 90여명의 직원은 지난 2년간 청계천에서 호흡하고 청계천에서 밤을 보냈다. 그들은 청계천복원 공사의 최대 난제 중 하나인 6만5000개에 달하는 상가 문제를 해결했다. 상인들과 매일 먹은 술로 위장병까지 생겼지만 상인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청계천복원추진본부를 거쳐간 직원들은 이미 200명에 달한다.
2003년 7월1일.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청계천복원공사는 출발점을 내달렸다.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로 철거를 거쳐 개천 바닥이 드러나면서 청계천추진본부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청계천추진본부 사람들은 청계천에 가장 애착이 큰 사람들이다. 청계천복원 과정에서 구속자가 생기고 오해받은 일들도 있었다.
장석효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은 “2년전 불가능하다는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그 일이 마무리되고 있다. 물론 진행과정에서 불미스런 일도 있었지만 앞으로 남은 일이 더 많다. 우리는 밉던 곱던 청계천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운상가 상인보다 더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렸던 당시 최동윤 복원총괄담당관(현 총무과장)은 상인과의 술자리에 밤을 지새기도 했다. 청계천 주변 재개발을 담당하던 허 영 당시 복원사업단장은 벌써 SH공사를 거쳐 시 주택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복원관리담당관을 지냈던 안준호 심사평가담당관은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며 서울과 청계천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때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주변 재개발 사업을 총괄하던 박성근 당시 복원계획담당관이 강남구청으로 자리를 옮긴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됐기 때문이다. 정병일 복원계획담당관은 “청계천복원 과정에서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결과가 혼탁한 것으로 비춰져 가장 안타깝다”며 “청계천복원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 비리 공무원으로 호도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제 청계천을 지키지 못한다. 한시 조직인 청계천복원본부가 올해말 해체되기 때문이다. 10월1일 청계천 준공식 이후 일부는 본청이나 사업소로 다시 복귀한다. 지금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때다.
정효상 청계천복원기획단장은 “청계천 준공을 앞두고 각종 행사와 투어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지만 복원공사가 끝나면 그 바빴던 때가 그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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