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8일 국가 원로님들이 시국성명을 내셨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습니다. 강정구 교수 때문에 원로님들이 역정을 내고 계신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강교수가 아무래도 지나치게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그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군대 시절에 북한군과 전투를 해 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로 보아 6·25 전쟁은 아닌 것 같고 월남에도 북한군은 없었으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해 자세한 사정을 캐물었습니다. 1968년 가을에 터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에 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 교수 소대는 참혹한 피해를 입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연이었는데, 이 일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원로님들도 일부 군 출신을 제외하고는 금시초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고교 1학년이었는데 6·25날이 되면 학생들이 잔꾀를 내어 선생님께 전쟁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 선생님 중에는 학도병 출신의 상이용사가 여러 분 계셨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동상으로 손가락이 모두 없어져 간신히 남아있는 마디에 분필을 끼워 쓰시던 영어 선생님의 사연이었습니다. 겨울에 후퇴하다 북한군을 만나 뒤섞인 채 혼전이 벌어졌는데 앞에서는 미군이, 뒤에서는 중공군이 사격하는 통에 가운데 낀 남북한 군인만 죽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밖에도 기가 막힌 실전담을 많이 들었지만 주로 힘들고 어려웠다는 이야기였지 무공을 자랑하는 분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진짜로 체험한 사람은 평화의 가치를 몸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다시 전쟁 없어야
남북이 극한 대치하던 어두운 시절에 국가 원로님들이 지키려고 고생하시던 소중한 가치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였습니다. 인권,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금 남북은 화해와 상생을 지향한 발걸음을 겨우 떼기 시작하였으며 아직도 주변정세는 살얼음판입니다.
개성공단에서 만든 상품이 서울 시내 백화점에서 버젓하게 팔리는 세상이 되었으면 분단 이후 60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정구 교수의 발언도 대승적 견지에서 의견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 정도의 일로 강교수를 빨리 구속하라고 재촉하는 원로님들은 1972년에 “이념과 체제를 넘어 민족적 입장에서 통일한다”는 7·4 공동성명을 김일성과 같이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 일의 실무를 맡아 평양을 몰래 오고 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서는 왜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원로님들은 국민저항권을 발동하여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지속되고 있는 좌파 정권을 끝장내자고 호소하셨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한 적도 없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나 민노당은 오히려 미국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욕을 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 문제로 노동조합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부가 어째서 좌파입니까? 삼성 편법상속 조사나 강남 아파트값 안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진짜 좌파가 집권하고 있으면 모순이 폭발해 계급혁명이 일어 나도록 문제를 방치하거나 악화시켰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정권과 좌파정부
저는 33년 전의 10월 18일 아침에 목격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날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10월 유신이라는 대통령 주도 군사반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학생들은 서울대 개교기념 체육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태릉선수촌으로 등교했습니다. 선수촌 입구에는 기관총을 거치한 장갑차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장전된 노란 실탄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대학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기약 없는 휴교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분노 속에서 ‘국민적 저항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제도적 민주주의가 복원되기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갔는지 원로님들이 저보다 더 실감하고 계실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가정을 하나 해보지요. 군사정권 시절 원로님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국민적 저항권을 행사하셨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종 구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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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때 고교 1학년이었는데 6·25날이 되면 학생들이 잔꾀를 내어 선생님께 전쟁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 선생님 중에는 학도병 출신의 상이용사가 여러 분 계셨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동상으로 손가락이 모두 없어져 간신히 남아있는 마디에 분필을 끼워 쓰시던 영어 선생님의 사연이었습니다. 겨울에 후퇴하다 북한군을 만나 뒤섞인 채 혼전이 벌어졌는데 앞에서는 미군이, 뒤에서는 중공군이 사격하는 통에 가운데 낀 남북한 군인만 죽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밖에도 기가 막힌 실전담을 많이 들었지만 주로 힘들고 어려웠다는 이야기였지 무공을 자랑하는 분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진짜로 체험한 사람은 평화의 가치를 몸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다시 전쟁 없어야
남북이 극한 대치하던 어두운 시절에 국가 원로님들이 지키려고 고생하시던 소중한 가치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였습니다. 인권,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금 남북은 화해와 상생을 지향한 발걸음을 겨우 떼기 시작하였으며 아직도 주변정세는 살얼음판입니다.
개성공단에서 만든 상품이 서울 시내 백화점에서 버젓하게 팔리는 세상이 되었으면 분단 이후 60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정구 교수의 발언도 대승적 견지에서 의견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 정도의 일로 강교수를 빨리 구속하라고 재촉하는 원로님들은 1972년에 “이념과 체제를 넘어 민족적 입장에서 통일한다”는 7·4 공동성명을 김일성과 같이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 일의 실무를 맡아 평양을 몰래 오고 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서는 왜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원로님들은 국민저항권을 발동하여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지속되고 있는 좌파 정권을 끝장내자고 호소하셨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한 적도 없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나 민노당은 오히려 미국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욕을 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 문제로 노동조합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부가 어째서 좌파입니까? 삼성 편법상속 조사나 강남 아파트값 안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진짜 좌파가 집권하고 있으면 모순이 폭발해 계급혁명이 일어 나도록 문제를 방치하거나 악화시켰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정권과 좌파정부
저는 33년 전의 10월 18일 아침에 목격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날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10월 유신이라는 대통령 주도 군사반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학생들은 서울대 개교기념 체육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태릉선수촌으로 등교했습니다. 선수촌 입구에는 기관총을 거치한 장갑차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장전된 노란 실탄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대학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기약 없는 휴교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분노 속에서 ‘국민적 저항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제도적 민주주의가 복원되기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갔는지 원로님들이 저보다 더 실감하고 계실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가정을 하나 해보지요. 군사정권 시절 원로님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국민적 저항권을 행사하셨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종 구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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