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소는 관청이나 경찰소 근처에 가면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대서소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까막눈 민원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두꺼운 안경 너머로 민원서류를 검토하던 대서소의 아련한 풍경, 지금은 일부러 찾아가 만나보고 싶은 모습이다.
“행정관청 문서가 한자 일색일 때 대서소 할 맛이 났지. 그 때는 오다가다 들르는 뜨내기 손님이 많아 항상 북적북적했어. 그런데 지금은 벌이가 안돼. 임대료도 내 주머니 털어 내는 걸 뭐…”
박병호(85)씨는 을지로3가 터줏대감이다. 이곳에서만 대서소 행정사 경력 30년이다. 행정사협회의 비공식 집계로 서울지역에서 가장 연로한 행정사인 박씨는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갖가지 사연을 가진 민원인을 많이 만났다.
◆“줄어든 수입보다 사람 냄새가 더 그리워” = 서울에서 성공해보겠다고 부친의 논을 몰래 판 목숨 같은 돈을 떼였다며 내용증명을 요구하는 사람부터 허가 나지 않을 곳에 여관을 짓게 해달라며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까지 박씨를 거쳐 간 민원인은 헤아릴 수 없다.
사무실 주변 상가 사람들의 훈장 역할도 박씨의 몫이었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 상인들이 업무가 끝난 시간에도 한글과 한자로 된 서류뭉치를 가져와 무슨 말인지 알려달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세월의 명암은 대서소를 비켜가지 않았다. 관공서들이 대민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에 반비례해 대서소를 찾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박씨는 줄어든 수입보다 사람 냄새가 더 그리웠다고 했다. “얼마 전만해도 문전성시를 이뤘던 사무실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더라고. 애초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했어. 사비 털어 임대료 내는 것쯤이야 뭐가 그리 대수겠어. 그런데 사람들이 끊기니까 뭔지 모르게 허전한 게, 많이 아쉽더라고. ‘늙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지.”
◆잘나가던 경찰에서 갑작스런 퇴직 = 박씨는 잘 나가던 경찰이었다. 강원도에서 오래 근무한 끝에 능력을 인정받고 당시 치안본부로 발령 받아 경찰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의 맛도 봤다. 경감 직위로 성북경찰서 사찰계장을 하던 무렵, 그는 정년을 채우지 못한 채 경찰을 떠나야 했다.
한 5년간은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경찰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돈이 넉넉할 리 없었다. 하지만 박씨는 애초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76년에 을지로3가 임대건물에서 시작한 대서소도 공직에 있으면서 해왔던 일이라 자신이 있었지,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남들 다 친다는 타자기도 안배우고 손으로 직접 서류를 만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덕분에 엄지와 검지, 중지손가락에 못이 심하게 박혔고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돈벌이에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자식농사는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큰 아들은 지금 환갑이 훌쩍 넘어 은퇴했지만 방송국 책임 PD까지 올랐다. 둘째 아들은 미국 LA에 이민 가 건축업 관련 일로 돈 버는 재미를 보고 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목숨다할 때까지 사무실 지키고 싶어” = 박씨는 언제부터인지 노환으로 인해 귀가 어두워졌다. 행정사는 민원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이제는 업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풍기가 있어 거동마저 불편하다. 마음 같아서야 목숨 다할 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싶지만 욕심이란 걸 잘 안다. 박씨는 “평생 나 때문에 고생한 집 사람도 노환 때문에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대서소를 접고 남은 기간 편히 지내려고 해”라고 말했다.
박씨는 평생 간직해온 좌우명을 보여줬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수첩에 볼펜으로 눌러 쓴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이다. 커다란 액자에 보관된 일필휘지는 아니었지만 박씨의 인생여정이 담긴 글이었다. ‘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적선지가필유여경 적불선지가필요여양)’ 박씨는 “덕행을 하는 자는 그 후손이 복을 받고, 덕행을 행하지 않는 자는 그 후손에게 재앙이 내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내가 80여년 살아보니까 모두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더라고… 젊은이도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기운 있을 때 남 많이 돕고 살아. 그러면 나중에 그대로 돌아오는 법이야”라고 말했다. “
대서사 6명중 1명만 밥벌이”
‘대서사’라는 직업이 생긴 것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현대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부터다. 이후 1941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조선광업 대서사 규제규칙’이라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1961년 제정된 행정서사법에 따라 ‘행정서사’라고 부르다가 1999년 이 법이 행정사법으로 전문 개정되면서 명칭도 ‘행정사’로 바뀌었다.
대한행정사회중앙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모두 6500명의 행정사가 등록돼 있으며 이 가운데 5000여명 가량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중앙회는 3500명 정도가 행정사를 본업으로 삼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00명가량이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행정사를 출신별로 따져보면 일반 공무원 출신이 50%, 경찰출신이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교육공무원 등이 나머지 5%를 차지하고 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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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관청 문서가 한자 일색일 때 대서소 할 맛이 났지. 그 때는 오다가다 들르는 뜨내기 손님이 많아 항상 북적북적했어. 그런데 지금은 벌이가 안돼. 임대료도 내 주머니 털어 내는 걸 뭐…”
박병호(85)씨는 을지로3가 터줏대감이다. 이곳에서만 대서소 행정사 경력 30년이다. 행정사협회의 비공식 집계로 서울지역에서 가장 연로한 행정사인 박씨는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갖가지 사연을 가진 민원인을 많이 만났다.
◆“줄어든 수입보다 사람 냄새가 더 그리워” = 서울에서 성공해보겠다고 부친의 논을 몰래 판 목숨 같은 돈을 떼였다며 내용증명을 요구하는 사람부터 허가 나지 않을 곳에 여관을 짓게 해달라며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까지 박씨를 거쳐 간 민원인은 헤아릴 수 없다.
사무실 주변 상가 사람들의 훈장 역할도 박씨의 몫이었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 상인들이 업무가 끝난 시간에도 한글과 한자로 된 서류뭉치를 가져와 무슨 말인지 알려달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세월의 명암은 대서소를 비켜가지 않았다. 관공서들이 대민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에 반비례해 대서소를 찾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박씨는 줄어든 수입보다 사람 냄새가 더 그리웠다고 했다. “얼마 전만해도 문전성시를 이뤘던 사무실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더라고. 애초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했어. 사비 털어 임대료 내는 것쯤이야 뭐가 그리 대수겠어. 그런데 사람들이 끊기니까 뭔지 모르게 허전한 게, 많이 아쉽더라고. ‘늙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지.”
◆잘나가던 경찰에서 갑작스런 퇴직 = 박씨는 잘 나가던 경찰이었다. 강원도에서 오래 근무한 끝에 능력을 인정받고 당시 치안본부로 발령 받아 경찰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의 맛도 봤다. 경감 직위로 성북경찰서 사찰계장을 하던 무렵, 그는 정년을 채우지 못한 채 경찰을 떠나야 했다.
한 5년간은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경찰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돈이 넉넉할 리 없었다. 하지만 박씨는 애초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76년에 을지로3가 임대건물에서 시작한 대서소도 공직에 있으면서 해왔던 일이라 자신이 있었지,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남들 다 친다는 타자기도 안배우고 손으로 직접 서류를 만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덕분에 엄지와 검지, 중지손가락에 못이 심하게 박혔고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돈벌이에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자식농사는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큰 아들은 지금 환갑이 훌쩍 넘어 은퇴했지만 방송국 책임 PD까지 올랐다. 둘째 아들은 미국 LA에 이민 가 건축업 관련 일로 돈 버는 재미를 보고 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목숨다할 때까지 사무실 지키고 싶어” = 박씨는 언제부터인지 노환으로 인해 귀가 어두워졌다. 행정사는 민원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이제는 업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풍기가 있어 거동마저 불편하다. 마음 같아서야 목숨 다할 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싶지만 욕심이란 걸 잘 안다. 박씨는 “평생 나 때문에 고생한 집 사람도 노환 때문에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대서소를 접고 남은 기간 편히 지내려고 해”라고 말했다.
박씨는 평생 간직해온 좌우명을 보여줬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수첩에 볼펜으로 눌러 쓴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이다. 커다란 액자에 보관된 일필휘지는 아니었지만 박씨의 인생여정이 담긴 글이었다. ‘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적선지가필유여경 적불선지가필요여양)’ 박씨는 “덕행을 하는 자는 그 후손이 복을 받고, 덕행을 행하지 않는 자는 그 후손에게 재앙이 내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내가 80여년 살아보니까 모두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더라고… 젊은이도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기운 있을 때 남 많이 돕고 살아. 그러면 나중에 그대로 돌아오는 법이야”라고 말했다. “
대서사 6명중 1명만 밥벌이”
‘대서사’라는 직업이 생긴 것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현대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부터다. 이후 1941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조선광업 대서사 규제규칙’이라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1961년 제정된 행정서사법에 따라 ‘행정서사’라고 부르다가 1999년 이 법이 행정사법으로 전문 개정되면서 명칭도 ‘행정사’로 바뀌었다.
대한행정사회중앙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모두 6500명의 행정사가 등록돼 있으며 이 가운데 5000여명 가량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중앙회는 3500명 정도가 행정사를 본업으로 삼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00명가량이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행정사를 출신별로 따져보면 일반 공무원 출신이 50%, 경찰출신이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교육공무원 등이 나머지 5%를 차지하고 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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