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유린’ 침묵한 사법부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사실상 인정

지역내일 2005-11-11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강요 악순환 조성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사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유신과 5공화국 시절 ‘제도 권력의 불법’에 대해 법원이 철저히 외면했다는 것이다.
국민의 최후 인권 수호기관이어야 할 법원이 오히려 수사기관의 고문과 사건 조작을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는 지적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해 이뤄진 허위자백과 이를 기초로 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가 그대로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돼 유죄판결이 났다. 이는 유독 시국사건과 공안사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사법부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 명백히 밝혀야 할 지점이다.

“검사의 기소장은 길이가 14매, 자수로는 8286자의 장문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제1심 판결문의 이유 부분의 길이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히 14매, 자수로는 8286자입니다. 판결이유는 검사의 기소장과 글자하나 틀림없이 일치합니다. 8246자의 그 복잡하고 많은 내용의 기소장을 한 자의 고침도 없이 제록스, 복사한 것입니다.”
지난 78년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후 상고이유서에서 1심 판결을 빗대 표현할 말이다.
검찰의 수사기록을 중심으로 재판을 진행한 법원의 이른바 ‘조서재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서재판’은 피고인의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만들었고 결국 자백을 받기 위한 수사기관의 고문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조장했다.
고문과 조작이 상당히 드러난 사건에 대해서도 법원은 ‘진실’에 침묵했다.

◆대표적 ‘인권유린’ 인혁당 사건 =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해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은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통해 피의자조서와 진술조서를 허위로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법정에서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협박에 의해 진술됐거나, 재판에서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헌법 제12조7항)’는 법조항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지난 82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전재권 정만진 이태환 유진곤 조만호씨 등 5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당시 재판 도중 검사는 하재완씨(사형선고 받은 후 사망)에게 “너 아직 덜 맞았구나. 나중에 더 때려주지”라는 말을 해 피의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변호인들은 상고이유서에 이 같은 고문 사실을 적나라하게 담았지만 대법관들은 법정을 개정한지 10분만에 판결문을 낭독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고문에 의해 피고인들의 몸상태가 극도로 악화돼 있었기 때문에 재판관들이 고문의 흔적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송씨 간첩단 사건 = 조작간첩 사건 피고인들은 대부분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법원은 자백을 토대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 중에서 80년대 대표적인 조작간첩사건이 ‘송씨 일가 간첩단’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에서 내려온 송씨 한 사람을 며칠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일가 7, 8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당시 변론을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송기준씨를 만났는데 4개월 동안 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채 안기부에 불법 구속돼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며 “송기복씨 같은 경우는 평양에 갔다 왔다고 돼 있는데 고문에 못 이겨서 말한 것이 자백한 것으로 돼 있더라”고 회고했다.
송지섭씨의 변론을 맡았던 조준희 변호사는 당시 검사가 조사할 때 안기부직원들이 구치소에 와서 위협하는 내용이 담긴 구치소 접견 기록을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송씨가 심하게 폭행당한 것도 병원기록을 통해 입증했지만 사법부는 결국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변호인들은 “재판 과정이나 결과 가 형사소송법의 이상과 동떨어진 오판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오송회 사건 = 5공화국 시절 대표적이 공안조작 사건 중 하나는 ‘오송회 사건’이다. ‘오송회 사건’은 82년 공안당국이 전북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이 오송회라는 용공단체를 조직, 학생들을 좌경의식화해 폭력혁명을 선동했다며 검거한 사건(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교사 5명이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서 4·19 위령제를 지냈다는 게 빌미가 됐다. 이들은 모두 영장 없이 불법연행을 당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물증 없는 자백강요와 변호인의 조력기획 박탈 등 전형적인 인권유린을 당했다.
‘오송회 사건’으로 투옥됐다 KBS에 복직한 조성용씨는 “40여 일간 전주 시내에 위치한 대공분실 안가에 감금돼 잠도 자지 못하고 전기 고문과 각목 세례, 물고문 등 온갖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주범으로 몰렸던 이광웅 교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난 92년 끝내 숨졌다. ‘국가 권력 기관이 조작해낸 한 편의 소설과 같은 허구’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진실과 허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지난 86년 검찰이 성고문 가해자인 경찰관 문귀동씨에 대해 무혐의 처리한 후 수사종결처분을 내려 사회적으로 논란이 불거졌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씨를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몰아세웠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문귀동씨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해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하며 결정문에 납득하기 힘든 내용을 담았다. 범죄 내용을 대부분 인정하면서도 성추행을 목격한 증인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씨는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정신청을 기각했던 당시 서울고법 특별부 부장판사는 이후 법원장으로 승진발령됐다. 이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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