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가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 것과 기계로 찍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45년 망치밥으로 살아온 김예섭(62)씨는 2006년 새해에도 망치질을 하고 있다. 대장간이라는 것이 세월에 묻혀진지 오래지만 김씨의 대장간에서는 아직도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두들겨 맞고 있다.
◆ 곁눈질로 시작한 대장장이= 서울 은평구 모래내시장 건너편에는 10평 남짓한 모래내대장간이 있다. 기자가 찾아간 아침 이른 시간 영하 11도를 가리키는 매서운 추위도 우습다는 듯 대장간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근처 대장간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만들어 지는 호미며 낫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열여덟이 되는 해 몸은 약골이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장간에 들어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김씨는 돈 한푼 받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눈치로 배우고 익혔다. 꼬박 3년을 일한 뒤 김씨는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김씨는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장이가 될 수 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김씨는 69년 봄 서울로 상경했다. 여전한 아버님의 반대에 다른 일을 찾아보겠노라며 올라왔지만 대장장이의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대번에 망치잡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6년의 망치질 끝에 진짜 대장장이라 말할 수 있는 집게잡이가 됐다. 김씨는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만들기 바쁘게 물건들이 동이 났다”며 “몸은 힘들었지만 물건 만드는 재미와 돈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고 말한다.
60~70년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주변에는 수 십 개의 대장간들이 몰려있었다. 현재도 신당동 한양공고 주변에 가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몇 개의 대장간을 만날 수 있다.
◆ 방송국 박물관은 새로운 고객= 집게잡이 6년을 마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뽑혀가 1년을 일했다. 김씨는 “다른 인부들은 월 200달러 남짓을 받고 일했지만 우리 대장장이 들은 월 330달러를 받았다”며 “기술을 인정받은 게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81년 중동에서 돌아와 그동안 번 돈을 모아 신당동에 대장간을 차렸다. 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87년 이곳 모래내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모래내대장간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4년에 운명을 달리한 박영감이 운영하다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을 김씨가 인수했다.
김씨가 만드는 물건은 종류만도 200여가지에 이른다. 그 200여가지도 쓰임새에 따라 크기 모양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 합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장간 하면 늘 생각나는 호미나 낫 등 농기구들은 한 물 간지 오래다. 이제는 공사현장의 인부들이 사용하는 공구를 주로 만든다. 덕분에 공사현장이 쉬는 겨울이 가장 한가한 계절이다.
모래내에서 자리를 잡던 87년 김씨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었다. 한 박물관에서 가야시대의 갑옷 샘플을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든 것을 계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 방송국 박물관 등과 전국 각지에서 별의별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오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방송국에서는 사극을 준비할 때면 늘 김씨에게 소품을 주문한다. MBC드라마 ‘허준’과 KBS ‘불멸의 이순신’에 나온 쇠로 만든 소품들은 상당수가 김씨의 손을 거쳐갔다.
김씨는 “‘해신’ 드라마 검투사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최수종씨가 사용했던 칼이 기억에 남는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 영원한 대장장이로 남고 싶어= 김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다. 비록 대장장이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남들 못지않게 자식들을 키웠다. 대학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자식들에게 대장장이로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후회 없는 삶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놈들에게 해보자고 이야기 하기도 했지만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며 “지금 젊은 사람이 배워놓으면 10년만 지나도 스타가 될텐데...”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씨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7시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느지막하게 나와 일을 한다. 일이라기보다는 쇠붙이를 가지고 논다. 화덕에서 달궈지는 쇠붙이를 보고 있노라면 6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새로운 열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망치질을 시작한 후 한 번도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고 최근에는 남에게 베풀 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장장이는 앞으로 더욱 전망이 있는 직업이다”고 강조한다. 유행을 타지 않고 재고 걱정도 없는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 누군가 젊은이에게 이 일을 전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10년만 지나면 이 직업은 스타가 될 수 있는 직업이다”며 “직업의 귀천이 없는 시대에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최고 아니냐”고 덧붙였다.
고성수 기자 ssg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45년 망치밥으로 살아온 김예섭(62)씨는 2006년 새해에도 망치질을 하고 있다. 대장간이라는 것이 세월에 묻혀진지 오래지만 김씨의 대장간에서는 아직도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두들겨 맞고 있다.
◆ 곁눈질로 시작한 대장장이= 서울 은평구 모래내시장 건너편에는 10평 남짓한 모래내대장간이 있다. 기자가 찾아간 아침 이른 시간 영하 11도를 가리키는 매서운 추위도 우습다는 듯 대장간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근처 대장간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만들어 지는 호미며 낫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열여덟이 되는 해 몸은 약골이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장간에 들어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김씨는 돈 한푼 받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눈치로 배우고 익혔다. 꼬박 3년을 일한 뒤 김씨는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김씨는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장이가 될 수 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김씨는 69년 봄 서울로 상경했다. 여전한 아버님의 반대에 다른 일을 찾아보겠노라며 올라왔지만 대장장이의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대번에 망치잡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6년의 망치질 끝에 진짜 대장장이라 말할 수 있는 집게잡이가 됐다. 김씨는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만들기 바쁘게 물건들이 동이 났다”며 “몸은 힘들었지만 물건 만드는 재미와 돈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고 말한다.
60~70년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주변에는 수 십 개의 대장간들이 몰려있었다. 현재도 신당동 한양공고 주변에 가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몇 개의 대장간을 만날 수 있다.
◆ 방송국 박물관은 새로운 고객= 집게잡이 6년을 마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뽑혀가 1년을 일했다. 김씨는 “다른 인부들은 월 200달러 남짓을 받고 일했지만 우리 대장장이 들은 월 330달러를 받았다”며 “기술을 인정받은 게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81년 중동에서 돌아와 그동안 번 돈을 모아 신당동에 대장간을 차렸다. 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87년 이곳 모래내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모래내대장간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4년에 운명을 달리한 박영감이 운영하다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을 김씨가 인수했다.
김씨가 만드는 물건은 종류만도 200여가지에 이른다. 그 200여가지도 쓰임새에 따라 크기 모양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 합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장간 하면 늘 생각나는 호미나 낫 등 농기구들은 한 물 간지 오래다. 이제는 공사현장의 인부들이 사용하는 공구를 주로 만든다. 덕분에 공사현장이 쉬는 겨울이 가장 한가한 계절이다.
모래내에서 자리를 잡던 87년 김씨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었다. 한 박물관에서 가야시대의 갑옷 샘플을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든 것을 계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 방송국 박물관 등과 전국 각지에서 별의별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오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방송국에서는 사극을 준비할 때면 늘 김씨에게 소품을 주문한다. MBC드라마 ‘허준’과 KBS ‘불멸의 이순신’에 나온 쇠로 만든 소품들은 상당수가 김씨의 손을 거쳐갔다.
김씨는 “‘해신’ 드라마 검투사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최수종씨가 사용했던 칼이 기억에 남는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 영원한 대장장이로 남고 싶어= 김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다. 비록 대장장이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남들 못지않게 자식들을 키웠다. 대학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자식들에게 대장장이로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후회 없는 삶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놈들에게 해보자고 이야기 하기도 했지만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며 “지금 젊은 사람이 배워놓으면 10년만 지나도 스타가 될텐데...”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씨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7시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느지막하게 나와 일을 한다. 일이라기보다는 쇠붙이를 가지고 논다. 화덕에서 달궈지는 쇠붙이를 보고 있노라면 6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새로운 열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망치질을 시작한 후 한 번도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고 최근에는 남에게 베풀 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장장이는 앞으로 더욱 전망이 있는 직업이다”고 강조한다. 유행을 타지 않고 재고 걱정도 없는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 누군가 젊은이에게 이 일을 전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10년만 지나면 이 직업은 스타가 될 수 있는 직업이다”며 “직업의 귀천이 없는 시대에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최고 아니냐”고 덧붙였다.
고성수 기자 ssg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