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문자작의 항변
변호사 박 연 철
김명인 시인의 ‘소화 14년’이라는 시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낡은 서류갈피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가슴 아프게 기록한 시이다. 몇 군데를 인용한다.
“… 제국군대의 지까다비 뿌우연 먼지 중국대륙을 휩쓸던 때 국민복을 입고 작업모에 각반까지 두른 … 스물다섯 젊은 나이였을 나의 아버지 … 노무자로 끌려 다니면서 길림에서 봉천으로 봉천에서 다시 중경으로 … 열사의 조상을 갖지 못한 가계여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 희미한 사진속의 긴 세월 가라앉아 건너오면서 광산의 덕대로, 쌀장수로, 마침내 그것도 놓아버리고 …”
시인은 해방 전이나 후에나 마찬가지로 고난의 세월을 보낸 아버지를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시는 너무나 솔직하여 가슴을 몹시 아리게 한다. 나도 소화19년도(1944년도)에 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0대의 아버지가 같은 국민복, 작업모에 각반을 두른 모습으로 동급생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흥아성전(興亞聖戰)과 총후보국 (銃後輔國)을 위하여 수시로 동원되어 사역당하던 당시 학생들의 빛바랜 복장이었다.
우리는 늘 따뜻한 마음이 앞서서 잘못된 일을 쉽사리 덮어주거나, 그 반대로 비난하는 마음이 솟구쳐 전후의 배경과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제는 어지간히 많은 세월과 논쟁을 거쳐 왔으니 국권을 상실하였던 일제시대에 발생한 모든 일들을 냉철한 마음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일단락지어야 할 때가 왔다.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직면할 줄 알아야 하겠다. 선대들이 행한 일이라 하여, 선대의 체질, 정서, 지력 등을 유전받고, 재산과 습속을 계승하였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과 선대들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구속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선대들의 불안하였던 영혼이 우리를 향하여 염원하는 바일 것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선대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명하는 자세가 더 귀중하다고 생각된다. 일제시대의 친일행위자 가운데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록을 남겨놓은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반대로 해방 후에 자신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자서전을 남겨놓은 이들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현 정부에서 과거청산을 위하여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여 정리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한 총체적 반론도 있고, 개별인물에 대한 반론도 지속되고 있다. 가시 돋친 설전과 비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나, 모두 과거사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설혹 정부가 관여하는 과거사정리에 이견이 있더라도 이미 시작된 작업이므로 자신의 알고 있는 바와 자료, 의견들을 반민규명위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사정리는 자료가 풍부할수록 진실에 가깝게 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할수록 독단을 피하게 될 것이다.
일제시대까지 정리작업을 하다보면 자주독립의 가치가 무엇인지 저절로 우리 가슴판에 새겨질 것이라 믿는다. 일제시대에서는 자주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지금까지는 남쪽에서는 민주화운동사와 경제발전사를, 북쪽에서는 사회주의 흥망사를 확인하게 될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남북통일사’와 ‘국제화시대사’에 지난 근대사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지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회의적이었지만,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정체를 선포하였던 것은 그 당시 비현실적이고 회의적이었으나 100년 가까이 세월을 지내면서 계속 그 꿈이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들의 심장이 튼튼하여지고, 팔다리가 몰라보게 건강하여진 것이다.
지난 토요일 ‘서울 1945년’ 이라는 KBS 주말연속극에서 친일파 문자작의 열연을 주의깊게 시청하였다. 드라마속의 문자작은 친일파로서의 자부심과 신념, 가족과 형제를 지극히 사랑하는 강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모든 재산을 내어놓는 탄백(坦白)의 절차를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으로서 활동하던 시대가 지나갔으니 깨끗이 할복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문자작은 극중에서 조선왕조는 그 백성에게 가난하고 비루먹은 생활만을 강요하였으나, 일본은 자기에게 꿈을 주었으며 자신이 입신양명하고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문자작이여, 그대가 일제와 타협해가면서 그 제약 하에 모질게 자기발전을 도모하던 그때에도,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면서 민족자존을 지켜 낸 투사들이 적지 아니하였다. 일제의 어두운 장막이 갑자기 거두어지고 눈부신 자유의 들판에 서게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고 그 생명이 찬란하게 빛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도로 한국인으로 환원되었다. 아무런 조치도 없이 국적이 회복되었고, 성명복구령을 기다리지 않아도 창씨개명이전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은 쇠멸되지 아니하였다. 문자작 그대가 탄백하고 새로운 시대의 일원이 되었더라면, 그만한 역량이라면, 조국의 품안에서 맨손으로도 더 나은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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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박 연 철
김명인 시인의 ‘소화 14년’이라는 시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낡은 서류갈피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가슴 아프게 기록한 시이다. 몇 군데를 인용한다.
“… 제국군대의 지까다비 뿌우연 먼지 중국대륙을 휩쓸던 때 국민복을 입고 작업모에 각반까지 두른 … 스물다섯 젊은 나이였을 나의 아버지 … 노무자로 끌려 다니면서 길림에서 봉천으로 봉천에서 다시 중경으로 … 열사의 조상을 갖지 못한 가계여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 희미한 사진속의 긴 세월 가라앉아 건너오면서 광산의 덕대로, 쌀장수로, 마침내 그것도 놓아버리고 …”
시인은 해방 전이나 후에나 마찬가지로 고난의 세월을 보낸 아버지를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시는 너무나 솔직하여 가슴을 몹시 아리게 한다. 나도 소화19년도(1944년도)에 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0대의 아버지가 같은 국민복, 작업모에 각반을 두른 모습으로 동급생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흥아성전(興亞聖戰)과 총후보국 (銃後輔國)을 위하여 수시로 동원되어 사역당하던 당시 학생들의 빛바랜 복장이었다.
우리는 늘 따뜻한 마음이 앞서서 잘못된 일을 쉽사리 덮어주거나, 그 반대로 비난하는 마음이 솟구쳐 전후의 배경과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제는 어지간히 많은 세월과 논쟁을 거쳐 왔으니 국권을 상실하였던 일제시대에 발생한 모든 일들을 냉철한 마음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일단락지어야 할 때가 왔다.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직면할 줄 알아야 하겠다. 선대들이 행한 일이라 하여, 선대의 체질, 정서, 지력 등을 유전받고, 재산과 습속을 계승하였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과 선대들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구속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선대들의 불안하였던 영혼이 우리를 향하여 염원하는 바일 것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선대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명하는 자세가 더 귀중하다고 생각된다. 일제시대의 친일행위자 가운데 진심으로 반성하는 기록을 남겨놓은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반대로 해방 후에 자신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자서전을 남겨놓은 이들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현 정부에서 과거청산을 위하여 상당한 예산을 투입하여 정리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한 총체적 반론도 있고, 개별인물에 대한 반론도 지속되고 있다. 가시 돋친 설전과 비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나, 모두 과거사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설혹 정부가 관여하는 과거사정리에 이견이 있더라도 이미 시작된 작업이므로 자신의 알고 있는 바와 자료, 의견들을 반민규명위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사정리는 자료가 풍부할수록 진실에 가깝게 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할수록 독단을 피하게 될 것이다.
일제시대까지 정리작업을 하다보면 자주독립의 가치가 무엇인지 저절로 우리 가슴판에 새겨질 것이라 믿는다. 일제시대에서는 자주독립운동사를, 해방 후 지금까지는 남쪽에서는 민주화운동사와 경제발전사를, 북쪽에서는 사회주의 흥망사를 확인하게 될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남북통일사’와 ‘국제화시대사’에 지난 근대사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지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회의적이었지만,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정체를 선포하였던 것은 그 당시 비현실적이고 회의적이었으나 100년 가까이 세월을 지내면서 계속 그 꿈이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들의 심장이 튼튼하여지고, 팔다리가 몰라보게 건강하여진 것이다.
지난 토요일 ‘서울 1945년’ 이라는 KBS 주말연속극에서 친일파 문자작의 열연을 주의깊게 시청하였다. 드라마속의 문자작은 친일파로서의 자부심과 신념, 가족과 형제를 지극히 사랑하는 강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모든 재산을 내어놓는 탄백(坦白)의 절차를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으로서 활동하던 시대가 지나갔으니 깨끗이 할복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문자작은 극중에서 조선왕조는 그 백성에게 가난하고 비루먹은 생활만을 강요하였으나, 일본은 자기에게 꿈을 주었으며 자신이 입신양명하고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문자작이여, 그대가 일제와 타협해가면서 그 제약 하에 모질게 자기발전을 도모하던 그때에도,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면서 민족자존을 지켜 낸 투사들이 적지 아니하였다. 일제의 어두운 장막이 갑자기 거두어지고 눈부신 자유의 들판에 서게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고 그 생명이 찬란하게 빛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도로 한국인으로 환원되었다. 아무런 조치도 없이 국적이 회복되었고, 성명복구령을 기다리지 않아도 창씨개명이전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은 쇠멸되지 아니하였다. 문자작 그대가 탄백하고 새로운 시대의 일원이 되었더라면, 그만한 역량이라면, 조국의 품안에서 맨손으로도 더 나은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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