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덕에 빨리 컸지만, 화면으로 위기 직면
방송사 앵커 출신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는 점에서 총선 등 각종 선거를 앞두고 영입 1순위에 꼽힌다. 단기간에 치러지는 선거의 속성상 대중적 인지도가 곧 지지도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96년 정계에 입문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15대 총선과 16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라는 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지도가 높은 ‘방송사 앵커’ 출신이라는 이력이 적잖이 뒷심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올해로 정 의장은 정치권에 입문한 지 만 10년이 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인식 속에 정동영은 여전히 ‘언론인’이란 이미지가 가장 크게 각인돼 있다.
내일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으로 실시한 이미지 조사에 따르면 ‘정동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거나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언론인’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 응답자 가운데 11.9%로 가장 많았다.
10년 세월동안 앵커 출신 정 의장은 여전히 브라운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브라운관에 갇힌 정치인 이미지 = 정 의장이 앵커 이미지를 벗지 못한 데에는 정계 입문 이후 최장수 ‘대변인’으로 활약한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뉴스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앵커’에서 당의 입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대변인’으로의 변신은 전달하는 내용은 바뀌었을지언정, 화면 등을 통해 ‘전달한다’는 업무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변에 능하다’가 4.4%를 기록하고, ‘깨끗, 신뢰’(4.2%), ‘똑똑함’(3.0%), ‘부드러움’(1.8%), ‘인상이 좋음’(1.0%), ‘편안함’(1.0%) 등이 비교적 높게 나온 것 역시 ‘앵커’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송과 정치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방송사가 정해진 시간에 여러 스탭들이 팀플레이를 통해 정제된 화면과 내용을 전달하는데 반해, 정치인은 매 순간 ‘생방송’될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정 의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인 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것은 방송과 정치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정제되지 않은 화면과 발언이 그대로 노출될 위험을 앵커 출신 정치인 정동영은 간과했던 것이다.
◆양극화된 정치적 자질 이미지 = 정 의장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이 혼재돼 있다.
추진력과 리더십, 정치적 자질에 대한 이미지가 6.5%로 다소 높았지만, 자질부족과 약하다는 평가 역시 5.3%로 만만치 않았다. 이같은 결과는 10년 정치인 생활동안 ‘앵커’ 이미지를 뛰어넘을 뚜렷한 ‘정치인 브랜드’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풍’과 ‘국민경선 지킴이’ 등 정 의장이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울만한 정치적 이력은 정치권 내에서는 주요한 이슈가 됐을지 몰라도, 국민 피부에 와 닿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정풍’ 등을 통해 ‘이중인격, 비겁, 야비’(2.6%)한 이미지가 생겼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열린우리당 대표(2.6%)와 통일부 장관(0.8%)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높지 않은 점은 우리 국민들이 직책을 매개로 정치인의 이미지를 형성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학생, 운동권 이미지 ‘미미’ = 정 의장에 대해 ‘운동권’(0.6%)이나 ‘진보적’(0.5%)이라는 이미지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잘 차려 입은 옷을 입고 브라운관을 매개로 대중에게 각인된 정 의장의 이미지 속에 대학시절 민청학련에 연루돼 감옥에 갔던 일화나 옷을 납품하기 위해 청계천을 오가며 고학했던 어두운 기억들을 함께 보여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 의장이 방송사 ‘앵커’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이전에 살아온 삶은 그다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17년 방송사 기자시절 앵커 정동영에게 비춰진 방송사 조명이 너무 밝았던 탓이다.
53년 7월27일 한반도에 ‘휴전선’이 그어진 날 태어난 정 의장은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70년대 들어 대학을 다녔다. 서울대 국사학과 72학번인 정 의장은 이해찬 전총리에게 ‘돌 던지는 것’을 배워 학생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고2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정 의장이 서울에 올라와 학생운동에 빠져 감옥을 오가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서울로 상경, 단칸방을 얻어 청계천에 옷을 납품하는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청계천이 복원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 의장은 어느 일요일 홀로 청계천을 찾아 리어카에 옷을 싣고 평화시장을 오가던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선 정 의장의 화려한 ‘앵커’ 이미지 이면에는 어두운 시대를 헤쳐오는 동안 깊이 패인 정 의장의 주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 의장에 대한 기타 이미지로는 ‘눈웃음’ ‘정의파’ ‘글로벌’과 함께 ‘오만하다’ ‘너무 개인적이다’ ‘무식하다’ ‘공격적이다’ 등도 있었다.
구자홍 기자 jhkoo@naeil.com
방송사 앵커 출신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는 점에서 총선 등 각종 선거를 앞두고 영입 1순위에 꼽힌다. 단기간에 치러지는 선거의 속성상 대중적 인지도가 곧 지지도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96년 정계에 입문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15대 총선과 16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라는 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지도가 높은 ‘방송사 앵커’ 출신이라는 이력이 적잖이 뒷심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올해로 정 의장은 정치권에 입문한 지 만 10년이 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인식 속에 정동영은 여전히 ‘언론인’이란 이미지가 가장 크게 각인돼 있다.
내일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으로 실시한 이미지 조사에 따르면 ‘정동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거나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언론인’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 응답자 가운데 11.9%로 가장 많았다.
10년 세월동안 앵커 출신 정 의장은 여전히 브라운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브라운관에 갇힌 정치인 이미지 = 정 의장이 앵커 이미지를 벗지 못한 데에는 정계 입문 이후 최장수 ‘대변인’으로 활약한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뉴스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앵커’에서 당의 입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대변인’으로의 변신은 전달하는 내용은 바뀌었을지언정, 화면 등을 통해 ‘전달한다’는 업무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변에 능하다’가 4.4%를 기록하고, ‘깨끗, 신뢰’(4.2%), ‘똑똑함’(3.0%), ‘부드러움’(1.8%), ‘인상이 좋음’(1.0%), ‘편안함’(1.0%) 등이 비교적 높게 나온 것 역시 ‘앵커’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송과 정치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방송사가 정해진 시간에 여러 스탭들이 팀플레이를 통해 정제된 화면과 내용을 전달하는데 반해, 정치인은 매 순간 ‘생방송’될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정 의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인 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것은 방송과 정치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정제되지 않은 화면과 발언이 그대로 노출될 위험을 앵커 출신 정치인 정동영은 간과했던 것이다.
◆양극화된 정치적 자질 이미지 = 정 의장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이 혼재돼 있다.
추진력과 리더십, 정치적 자질에 대한 이미지가 6.5%로 다소 높았지만, 자질부족과 약하다는 평가 역시 5.3%로 만만치 않았다. 이같은 결과는 10년 정치인 생활동안 ‘앵커’ 이미지를 뛰어넘을 뚜렷한 ‘정치인 브랜드’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풍’과 ‘국민경선 지킴이’ 등 정 의장이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울만한 정치적 이력은 정치권 내에서는 주요한 이슈가 됐을지 몰라도, 국민 피부에 와 닿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정풍’ 등을 통해 ‘이중인격, 비겁, 야비’(2.6%)한 이미지가 생겼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열린우리당 대표(2.6%)와 통일부 장관(0.8%)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높지 않은 점은 우리 국민들이 직책을 매개로 정치인의 이미지를 형성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학생, 운동권 이미지 ‘미미’ = 정 의장에 대해 ‘운동권’(0.6%)이나 ‘진보적’(0.5%)이라는 이미지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잘 차려 입은 옷을 입고 브라운관을 매개로 대중에게 각인된 정 의장의 이미지 속에 대학시절 민청학련에 연루돼 감옥에 갔던 일화나 옷을 납품하기 위해 청계천을 오가며 고학했던 어두운 기억들을 함께 보여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 의장이 방송사 ‘앵커’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이전에 살아온 삶은 그다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17년 방송사 기자시절 앵커 정동영에게 비춰진 방송사 조명이 너무 밝았던 탓이다.
53년 7월27일 한반도에 ‘휴전선’이 그어진 날 태어난 정 의장은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70년대 들어 대학을 다녔다. 서울대 국사학과 72학번인 정 의장은 이해찬 전총리에게 ‘돌 던지는 것’을 배워 학생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고2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정 의장이 서울에 올라와 학생운동에 빠져 감옥을 오가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서울로 상경, 단칸방을 얻어 청계천에 옷을 납품하는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청계천이 복원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 의장은 어느 일요일 홀로 청계천을 찾아 리어카에 옷을 싣고 평화시장을 오가던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선 정 의장의 화려한 ‘앵커’ 이미지 이면에는 어두운 시대를 헤쳐오는 동안 깊이 패인 정 의장의 주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 의장에 대한 기타 이미지로는 ‘눈웃음’ ‘정의파’ ‘글로벌’과 함께 ‘오만하다’ ‘너무 개인적이다’ ‘무식하다’ ‘공격적이다’ 등도 있었다.
구자홍 기자 jhkoo@naeil.com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