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용 경북지사는 스스로 잡초 같은 인생역정을 살아왔다 말한다. 꿈꾸고 도전하고 성취하고, 또 다시 꿈꾸는 삶의 연속이었다.
1942년 경북 구미 선산의 시골 마을에서 어려운 가정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지사는 어린시절 가난의 세월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가뜩이나 어렵던 가세가 더욱 기울어졌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술찌끼를 집어먹고 학교에 가기도 했고, 이웃에게 꼴머슴으로 팔릴 뻔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해 홀로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쌀 두말을 팔아 사범학교 입학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졸업 후 구미초등학교에서 재직하며 야간에는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녔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1971년 행정고시(10회)에 합격했다. 조해녕 전 대구시장, 김광원 국회의원, 심우영 전 경북지사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이 고시 동기생이다.
공직에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돈도 없고 ‘빽’도 없었던 그는 한직을 맴돌았다. 시간이 흘러 병무청, 국립중앙도서관, 세무서, 청와대 민정비서실 등을 거쳐 용산세무서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정리했다. 95년 지방자치제 부활과 함께 구미시장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재선 때는 단독출마로 당선되는 등 11년간의 구미시장을 하면서 그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와 같은 활약을 펼쳤다. 3번의 시장 재임동안 그는 구미를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세계적인 디지털 도시로 변모시켜 놓았다. 28만 명의 인구를 38만 명으로 늘렸고 외환위기 때 구미 국가4공단을 만들었다. 수출 300억 달러 달성, 기초자치단체 주민 평균소득 1위, 수출과 생산액 전국 1위, 도시 젊음지수 전국 1위 등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경북지사 취임은 또 다른 ‘김관용 드라마’를 예고할 지도 모른다.
그는 ‘접인춘풍 임기추상(接人春風 臨己秋霜)’.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기를 다룰 때는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하게 대한다는 뜻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고, 태권도는 공인 3단이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즐겨 부른다. 부인 김춘희 여사가 끓여주는 김치 넣은 라면을 가장 즐기는 애처가이기도 하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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