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하순께, 어느 일요일이었다. 지금의 금융감독위원회 건물 3층에 공무원 두명이 홀연히 나
타났다.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처럼 이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3층 한 귀퉁이에 짐을 풀고 집기를
들이고, 무슨 일을 막 벌리려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 심부름꾼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공무원
중 한명이 바로 이우철 국장이다.
98년 1월 ‘감독기구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금융감독위원회가 설립되기 직전이었다. 지금의 금
융감독원은 없었다.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이 통합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97년부터 본격
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금융감독기구 개편의 실체들이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한 시기였다. 98년 어느 봄날, 금감위 건물에서 부산하게 움직인 이우철은 금감위 살림 시작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명으로 출발한 금감위 사무국
98년 4월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했다. 97년 6월에 대통령 직속 금융개혁위윈회는 금융개혁보고서를
통해 금융감독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으로 금감위를 설치하고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
용관리기금 등으로 분산돼 있던 금유감독기능을 통합하도록 권고했다.
97년 6월 정부는 금감위와 금감원을 설치해 금융감독을 일원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금융감독기구
설치에 관한 법률’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 법이 97년 12월 국회를 통과, 98년 4월 드디어 금감위가 설
립됐다.
금감위 업무를 도와주는 금감위 사무국도 이때 꾸려졌다. 당시 국무총리실에서 재경금융심의관 부이
사관으로 근무하던 이우철 국장은 금감위 사무국 기획행정실장직을 맡으면서 금감위 안살림을 꾸려
가기 시작했다.
금융감독기구 통합작업 실무맡아
금감위가 출범한 이후 이 국장에겐 금감위 안살림을 책임지는 일뿐만 아니라 금융감독기구 통합을
위한 실무작업까지 맡겨졌다.
당시 금융감독 업무는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으로 쪼개져 있었다. 감독
기구설치법 대로 이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금융
감독기구 개편방안을 멕킨지에 의뢰해 인원 및 직제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이들 4개 감독기구
의 인원은 1750명. 멕킨지는 보고서에서 인원을 400명 감축하도록 권고했다.
4개 기구를 하나로 묶는 작업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 동안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쭉 근무한 직원들
을 하나로 묶는 것도 힘들지만 인원과 직제개편을 통해 정리되는 인원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내부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다. 통합실무를 맡은 조정자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할 때였다.
당시 각 감독기구 노동조합과 가장 많이 부딪힌 공무원을 꼽으라면 단연 이 국장이다. 통합실무 과정
에서 때론 각 노조와 원수처럼 싸우기도 했고 술 먹으며 풀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
는 역할을 했다.
금감원 노조 관계자는 “어쨌든 IMF 그 다음해인 98년, 그 혼란기에 이 국장은 금감위와 금감원의 뼈
대를 세우고 각 감독기관 간 기능개편 작업 과정에서 조정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평가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폭 넓어
이 국장과 금감원 노조가 가장 심하게 부딪힌 것은 99년 5월이다. 당시 재경부가 갖고 있던 인허가권
이 금감위로 넘어오자 금감위 산하 공무원 인원도 늘어났다. 이 때 감독기구설치법에 있는 ‘금감위
산하 사무국에는 최소한의 공무원만 둔다’는 조항도 없어졌다. 당시 정부는 감독기구설치법의 ‘최
소 공무원설치’조항을 삭제하고 정부조직법 부칙조항으로 개정했다.
금감원의 반발은 거셌다. 금감원은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감독기구설치법을
바뀌가면서 금감위 공무원 인원을 늘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감원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이
국장 몫이었다.
“당시 이 국장과 많이 싸웠다. 술자리도 많았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우철 국장은 그때부터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많이 알았을 것이다. 금감위 안에서 이 국장만큼 금감원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감독기구개편 과정에서 이우철 국장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온 금감원 노조 관계자의 전언이다.
금융감독조직 개편논란이 한창인 지금 이 국장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기획예산처가 마련중인 감독기구 개편안에 금감원의 감독정책 기능을 금감위로 이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지금은 맡은바 업무에 서로 충실할
때”라고 솔직히 밝힌다.
노조 관계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우철 국장이‘금감위와 금감원은 운명공동체이자 한몸’이라
고 얘기하면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 시절, 이 국장은 은행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노·정간 조정자 역할도 충실히 해냈
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난 98년 동남 동화 경기은행 등 5개 은행이 퇴출되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합
병으로 은행권 인력감축 태풍이 불어닥칠 때였다.
당시 5개은행 행원들과 금융노조는 명동성당에서 인위적인 인력감축에 반대하며 6개월간 농성을 벌
이고 있었다. 99년 12월 이 국장은 당시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위원장님이 직접 명동성당에 가셔
셔 은행원들을 설득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이 국장은 이헌재 금감위원장
과 함께 명동성당을 찾아 은행원 설득에 나섰다.
조정자 역할 뛰어넘어야
지난해 8월 그는 금감위 기획행실장에서 감독법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부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
에서 금융감독을 직접 챙겨야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지난달 금감위 직제개편으로 감독법규관이 감
독정책2국으로 바뀌면서 현재 감독정책2국장을 맡고 있다.
감독정책2국은 은행을 제외한 금융권 정체를 담당한다. 증권 보험 투신 제2금융권의 금융정책이 이
제 그의 손을 거치게 됐다. 그 동안 이 국장은 조직과 조직간 또는 정부와 노동조합간에 숨은 조정
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제 이 국장이 맡은 자리는 조정자로서 역할에 머무를 곳이 나인 듯 싶다.
지난해까지 금융권 구조조정은 대충 마무리됐다. 전시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들어선 셈이다. 앞으로
이 국장의 역할여하에 따라 평화가 깨지고 다시 전시체제로 바뀔 수도 있다. 조정자로서 역할을 충실
히 해냈듯이 현재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해내는지 지켜볼 일이다.
타났다.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처럼 이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3층 한 귀퉁이에 짐을 풀고 집기를
들이고, 무슨 일을 막 벌리려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 심부름꾼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공무원
중 한명이 바로 이우철 국장이다.
98년 1월 ‘감독기구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금융감독위원회가 설립되기 직전이었다. 지금의 금
융감독원은 없었다.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이 통합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97년부터 본격
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금융감독기구 개편의 실체들이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한 시기였다. 98년 어느 봄날, 금감위 건물에서 부산하게 움직인 이우철은 금감위 살림 시작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명으로 출발한 금감위 사무국
98년 4월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했다. 97년 6월에 대통령 직속 금융개혁위윈회는 금융개혁보고서를
통해 금융감독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으로 금감위를 설치하고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
용관리기금 등으로 분산돼 있던 금유감독기능을 통합하도록 권고했다.
97년 6월 정부는 금감위와 금감원을 설치해 금융감독을 일원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금융감독기구
설치에 관한 법률’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 법이 97년 12월 국회를 통과, 98년 4월 드디어 금감위가 설
립됐다.
금감위 업무를 도와주는 금감위 사무국도 이때 꾸려졌다. 당시 국무총리실에서 재경금융심의관 부이
사관으로 근무하던 이우철 국장은 금감위 사무국 기획행정실장직을 맡으면서 금감위 안살림을 꾸려
가기 시작했다.
금융감독기구 통합작업 실무맡아
금감위가 출범한 이후 이 국장에겐 금감위 안살림을 책임지는 일뿐만 아니라 금융감독기구 통합을
위한 실무작업까지 맡겨졌다.
당시 금융감독 업무는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으로 쪼개져 있었다. 감독
기구설치법 대로 이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금융
감독기구 개편방안을 멕킨지에 의뢰해 인원 및 직제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이들 4개 감독기구
의 인원은 1750명. 멕킨지는 보고서에서 인원을 400명 감축하도록 권고했다.
4개 기구를 하나로 묶는 작업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 동안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쭉 근무한 직원들
을 하나로 묶는 것도 힘들지만 인원과 직제개편을 통해 정리되는 인원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내부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다. 통합실무를 맡은 조정자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할 때였다.
당시 각 감독기구 노동조합과 가장 많이 부딪힌 공무원을 꼽으라면 단연 이 국장이다. 통합실무 과정
에서 때론 각 노조와 원수처럼 싸우기도 했고 술 먹으며 풀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
는 역할을 했다.
금감원 노조 관계자는 “어쨌든 IMF 그 다음해인 98년, 그 혼란기에 이 국장은 금감위와 금감원의 뼈
대를 세우고 각 감독기관 간 기능개편 작업 과정에서 조정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평가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폭 넓어
이 국장과 금감원 노조가 가장 심하게 부딪힌 것은 99년 5월이다. 당시 재경부가 갖고 있던 인허가권
이 금감위로 넘어오자 금감위 산하 공무원 인원도 늘어났다. 이 때 감독기구설치법에 있는 ‘금감위
산하 사무국에는 최소한의 공무원만 둔다’는 조항도 없어졌다. 당시 정부는 감독기구설치법의 ‘최
소 공무원설치’조항을 삭제하고 정부조직법 부칙조항으로 개정했다.
금감원의 반발은 거셌다. 금감원은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감독기구설치법을
바뀌가면서 금감위 공무원 인원을 늘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감원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이
국장 몫이었다.
“당시 이 국장과 많이 싸웠다. 술자리도 많았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우철 국장은 그때부터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많이 알았을 것이다. 금감위 안에서 이 국장만큼 금감원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감독기구개편 과정에서 이우철 국장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온 금감원 노조 관계자의 전언이다.
금융감독조직 개편논란이 한창인 지금 이 국장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기획예산처가 마련중인 감독기구 개편안에 금감원의 감독정책 기능을 금감위로 이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지금은 맡은바 업무에 서로 충실할
때”라고 솔직히 밝힌다.
노조 관계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우철 국장이‘금감위와 금감원은 운명공동체이자 한몸’이라
고 얘기하면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 시절, 이 국장은 은행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노·정간 조정자 역할도 충실히 해냈
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난 98년 동남 동화 경기은행 등 5개 은행이 퇴출되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합
병으로 은행권 인력감축 태풍이 불어닥칠 때였다.
당시 5개은행 행원들과 금융노조는 명동성당에서 인위적인 인력감축에 반대하며 6개월간 농성을 벌
이고 있었다. 99년 12월 이 국장은 당시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위원장님이 직접 명동성당에 가셔
셔 은행원들을 설득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이 국장은 이헌재 금감위원장
과 함께 명동성당을 찾아 은행원 설득에 나섰다.
조정자 역할 뛰어넘어야
지난해 8월 그는 금감위 기획행실장에서 감독법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부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
에서 금융감독을 직접 챙겨야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지난달 금감위 직제개편으로 감독법규관이 감
독정책2국으로 바뀌면서 현재 감독정책2국장을 맡고 있다.
감독정책2국은 은행을 제외한 금융권 정체를 담당한다. 증권 보험 투신 제2금융권의 금융정책이 이
제 그의 손을 거치게 됐다. 그 동안 이 국장은 조직과 조직간 또는 정부와 노동조합간에 숨은 조정
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제 이 국장이 맡은 자리는 조정자로서 역할에 머무를 곳이 나인 듯 싶다.
지난해까지 금융권 구조조정은 대충 마무리됐다. 전시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들어선 셈이다. 앞으로
이 국장의 역할여하에 따라 평화가 깨지고 다시 전시체제로 바뀔 수도 있다. 조정자로서 역할을 충실
히 해냈듯이 현재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해내는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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