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했던 것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중등교사들로 역사와 국어과목의 교사가 많았지만, 윤리·미술·체육에서 조경과목의 교사들까지 합세하여 대단한 실학기행 단체가 되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한 역사탐방이자 유적지답사의 길고 먼 여행이었다.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하고 다산연구소가 주관한 실학산책 행사의 하나로 펼쳐진 아름답고 값진 기행에는 유명한 교수 6명에 취재기자단이 합해지고 주최측 인사들이 함께하여 도합 53명의 대단한 숫자였다.
국경일인 광복절에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의 다산유적지에서 출발, 수원의 화성을 관람하고 안산의 성호기념관과 묘소를 들러 예산의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과 묘소에서 조금 짬을 내서 냉수를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일로 남행, 전라북도 부안군의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을 찾았다.
거기가 어떤 곳인가. 희대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선생이 불후의 역작,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한 곳이 아니던가. 벼슬도 마다하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멀고 먼 산속에 숨어살면서 저술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국가경영의 마스터플랜인 대작, ‘반계수록’이 그곳에서 탄생되었다. 그런 곳인 ‘반계서당’의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슬픔과 비탄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은 찢겨지고 문짝까지 제대로 달려있지 못하고 대롱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 나름으로는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들인데, 그곳이 그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한다니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안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문화재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뿐이랴. 올라가는 길이나 주변의 환경정리도 너무나 허술하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나라 실학의 비조요 거장인 반계의 유적지가 그렇게 대접받는다면, 다른 유적지야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한 생각만 들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당국을 고발하자고 소리소리 외쳤으나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해가 지는 무렵이었으나 혹독한 더위는 식을 줄을 모르고 덥기만 했다. 다시 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목포에 늦어서야 도착해 잠을 자고 다음 날은 흑산도 행이다. 대형 페리호에 올라 바닷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정오 무렵에야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의 유배지인 사리(沙里)의 사촌서당(沙村書堂)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또 어떤 곳인가.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님으로, 큰 죄를 지은 바도 없건만 정치적 모함에 걸려 16년의 억울한 유배살이 끝에, 해배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한없이 억울한 손암이 유배 살던 집이 아닌가. 본디는 ‘복성재(復性齋)’라고도 했지만 책을 쓰고 학동들을 가르치던 곳이어서 마을 이름인 ‘사촌서당’이라고도 불렀다. 희대의 유명한 책, ‘현산어보(玆山魚譜)’가 저작된 곳이 아니던가. 그런 무렵이야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인 바다의 물고기를 분류하고 해설한 책이 바로 그 책이다. 그런 책이 저술된 유서 깊은 유적지, 풍우에 찢겨나간 창문이나 덜렁거리는 문짝을 보며, 우리는 또 비애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안군 당국은 무얼 했으며 관계기관은 무엇을 하는가. 집은 그런대로 튼실하게 지었고 초옥이지만 볼품도 있었지만, 전혀 관리를 하지 않고 있으니 천리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야 어쩌란 말인가. 희대의 실학자가 집필하던 곳이자 시대의 억울함이 서린 그런 역사적 현장이 그처럼 소홀하게 방치되어서야. 더구나 집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이어서 너무나 기가 막혔다.
흑산도라는 매력에, ‘현산어보’의 산실이라는 역사성 때문에 혹서를 무릅쓰고 천리의 먼 길을 찾아왔건만, 그런 흉가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했다. 지방자치제가 활성화 되면서, 곳곳에 문화유적지가 복원되며 관광객을 유치하느라 야단이건만, 어찌하여 부안군과 신안군만은 그 모양 그 꼴인지 마음이 아팠다.
다음 날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귀로에 들른 해남의 ‘녹우당’이나 강진의 ‘다산초당’은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그러나 반계서당과 사촌서당에서 느끼던 슬픔은 좀처럼 가시지 않아 돌아오던 차안에서까지 줄곧 비난의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 위대한 학자의 업적을 찬양할 줄 모르는 백성들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 반계나 손암과 같은 큰 학자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오호애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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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중등교사들로 역사와 국어과목의 교사가 많았지만, 윤리·미술·체육에서 조경과목의 교사들까지 합세하여 대단한 실학기행 단체가 되었다. 방학기간을 이용한 역사탐방이자 유적지답사의 길고 먼 여행이었다.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하고 다산연구소가 주관한 실학산책 행사의 하나로 펼쳐진 아름답고 값진 기행에는 유명한 교수 6명에 취재기자단이 합해지고 주최측 인사들이 함께하여 도합 53명의 대단한 숫자였다.
국경일인 광복절에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의 다산유적지에서 출발, 수원의 화성을 관람하고 안산의 성호기념관과 묘소를 들러 예산의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과 묘소에서 조금 짬을 내서 냉수를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일로 남행, 전라북도 부안군의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을 찾았다.
거기가 어떤 곳인가. 희대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선생이 불후의 역작,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한 곳이 아니던가. 벼슬도 마다하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멀고 먼 산속에 숨어살면서 저술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국가경영의 마스터플랜인 대작, ‘반계수록’이 그곳에서 탄생되었다. 그런 곳인 ‘반계서당’의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슬픔과 비탄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은 찢겨지고 문짝까지 제대로 달려있지 못하고 대롱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 나름으로는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들인데, 그곳이 그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한다니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안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문화재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뿐이랴. 올라가는 길이나 주변의 환경정리도 너무나 허술하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나라 실학의 비조요 거장인 반계의 유적지가 그렇게 대접받는다면, 다른 유적지야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한 생각만 들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당국을 고발하자고 소리소리 외쳤으나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해가 지는 무렵이었으나 혹독한 더위는 식을 줄을 모르고 덥기만 했다. 다시 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목포에 늦어서야 도착해 잠을 자고 다음 날은 흑산도 행이다. 대형 페리호에 올라 바닷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정오 무렵에야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의 유배지인 사리(沙里)의 사촌서당(沙村書堂)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또 어떤 곳인가.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님으로, 큰 죄를 지은 바도 없건만 정치적 모함에 걸려 16년의 억울한 유배살이 끝에, 해배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한없이 억울한 손암이 유배 살던 집이 아닌가. 본디는 ‘복성재(復性齋)’라고도 했지만 책을 쓰고 학동들을 가르치던 곳이어서 마을 이름인 ‘사촌서당’이라고도 불렀다. 희대의 유명한 책, ‘현산어보(玆山魚譜)’가 저작된 곳이 아니던가. 그런 무렵이야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인 바다의 물고기를 분류하고 해설한 책이 바로 그 책이다. 그런 책이 저술된 유서 깊은 유적지, 풍우에 찢겨나간 창문이나 덜렁거리는 문짝을 보며, 우리는 또 비애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안군 당국은 무얼 했으며 관계기관은 무엇을 하는가. 집은 그런대로 튼실하게 지었고 초옥이지만 볼품도 있었지만, 전혀 관리를 하지 않고 있으니 천리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야 어쩌란 말인가. 희대의 실학자가 집필하던 곳이자 시대의 억울함이 서린 그런 역사적 현장이 그처럼 소홀하게 방치되어서야. 더구나 집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이어서 너무나 기가 막혔다.
흑산도라는 매력에, ‘현산어보’의 산실이라는 역사성 때문에 혹서를 무릅쓰고 천리의 먼 길을 찾아왔건만, 그런 흉가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했다. 지방자치제가 활성화 되면서, 곳곳에 문화유적지가 복원되며 관광객을 유치하느라 야단이건만, 어찌하여 부안군과 신안군만은 그 모양 그 꼴인지 마음이 아팠다.
다음 날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귀로에 들른 해남의 ‘녹우당’이나 강진의 ‘다산초당’은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그러나 반계서당과 사촌서당에서 느끼던 슬픔은 좀처럼 가시지 않아 돌아오던 차안에서까지 줄곧 비난의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 위대한 학자의 업적을 찬양할 줄 모르는 백성들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 반계나 손암과 같은 큰 학자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오호애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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