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당쟁과 요즘의 정치판
김홍식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요즘 정치판을 보면 마치 조선 때 당쟁사를 보는 듯하다. 정치적 논쟁이라는 것이 사사건건, 민생은 팽개쳐버리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시기 어떤 사건이랄 것도 없이 모두 천편일률적이다.
얼마 전에는 교육부총리가 논문을 중복 게재했다고 낙마하더니 이제는 헌재 소장의 임명 절차에 관한 사소한 잘못으로 국회가 공전 중이다. 가을 국회이니 국감에다 정부예산 문제도 있을 것이고, 크게는 미국과의 FTA 체결, 세계화시대 경제정책의 방향 설정, 빈·부와 도·농 격차의 해결, 노동자 농민의 문제, 학교 교육의 방향 설정 등 큰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정치권은 사소한 인사청문회에 갇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예전 당쟁도 살펴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다. 상복을 2년 입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3년을 입어야 하는가?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적임자인가? 청나라와 선린외교를 펼칠 것인가, 아니면 외교에 있어 명나라와 의리를 지킬 것인가? 지금 평가하면 공리공론이라고 비하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이렇게 당쟁만 일삼다 보니 백성들은 임진, 병자의 병란을 겪었고 나중에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까지 당했다. 그런데도 서로 피를 토하고 싸웠던 이유는 뭘까. 단지 정권 쟁취만이 그들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세종과 성종, 영조의 정치에서 배우자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민생들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가진 자는 배 두드리고 살지만 없는 자는 굶기가 일쑤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는 없으니 부랑아는 거리를 휩쓸면서 사회불안을 야기한다. 이런 사회문제를 당장 치유해야 할 텐데 처방을 내리고 치료하는 정치인은 하나도 없다. 이때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성리학자들이 도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정치권에 등장한다.
현 사회문제를 고치려면 정치를 바르게 해야 하고, 정치를 바르게 하려면 수신제가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라고 비분강개한다. 백성들은 처음엔 환호한다. 우선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뚫는 듯한 시원함을 느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된다. 본질 문제는 제쳐 두고 조그만 절차, 도덕 문제에만 매달려 정쟁으로 모든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벗어난 임금이 있다. 아마도 세종과 성종, 후기에는 영조 정도였을 것이다. 세종과 성종은 선대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정적들을 확실하게 제거해서 반대파가 적었다는 특징이 있을 것이고 영조는 임금 노릇을 오래도록 했으며(52년 재위) 탕평책을 썼다는 다른 점이 있다. 또 이들은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임금이었다. 특히 성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마도 똑똑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하면 소모적 당쟁에서 벗어나 나랏님 노릇을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세종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고 오래도록 기용했다. 요즘은 YS 이래 언론에서 떠들기만 하면 장관을 바꾼다. 참여정부에서도 처음에는 퇴임까지 한배를 탈 것처럼 하더니, 청와대 조직은 물론이고 내각까지 겨우 1년을 넘기면 하마시킨다. 그러니 업무 파악도 못하고 조직 장악력도 떨어진다.
다음은 뚝심을 가지고 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성종은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과거에 합격한 신진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여론을 앞세우는 언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냄비처럼 금방 끊고 식는다. 사학법을 개정했으면 계속 밀고 나가서 시행이나 해보고 재개정 논의를 해야 한다.
심하게 반발만 하면 밀리고 타협하니 개나 도나 반대를 한다. 심지어 반대를 위한 반대도 많다. 대중 정치는 연예인 바라보듯 선동적이다. 철학강의 듣듯 장기적 안목으로 보지 않는다. 정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오불관언하라. 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여론을 업고 돌파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물러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마지막으로 싱크탱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어서 젊은 학자들에게 현실적인 학문을 독려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많은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각종 위원회를 두는 것도 이런 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아웃소싱해서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더니, 지금은 각 부처마다 너무나 많은 조직을 만들고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말았다.
정부의 외곽 조직을 줄이고 아웃소싱해서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많은 것을 단독으로 결정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두뇌집단의 논의는 장려했다가 이 가운데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젠 제발 국회도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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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요즘 정치판을 보면 마치 조선 때 당쟁사를 보는 듯하다. 정치적 논쟁이라는 것이 사사건건, 민생은 팽개쳐버리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시기 어떤 사건이랄 것도 없이 모두 천편일률적이다.
얼마 전에는 교육부총리가 논문을 중복 게재했다고 낙마하더니 이제는 헌재 소장의 임명 절차에 관한 사소한 잘못으로 국회가 공전 중이다. 가을 국회이니 국감에다 정부예산 문제도 있을 것이고, 크게는 미국과의 FTA 체결, 세계화시대 경제정책의 방향 설정, 빈·부와 도·농 격차의 해결, 노동자 농민의 문제, 학교 교육의 방향 설정 등 큰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정치권은 사소한 인사청문회에 갇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예전 당쟁도 살펴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다. 상복을 2년 입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3년을 입어야 하는가?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적임자인가? 청나라와 선린외교를 펼칠 것인가, 아니면 외교에 있어 명나라와 의리를 지킬 것인가? 지금 평가하면 공리공론이라고 비하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이렇게 당쟁만 일삼다 보니 백성들은 임진, 병자의 병란을 겪었고 나중에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까지 당했다. 그런데도 서로 피를 토하고 싸웠던 이유는 뭘까. 단지 정권 쟁취만이 그들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세종과 성종, 영조의 정치에서 배우자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민생들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가진 자는 배 두드리고 살지만 없는 자는 굶기가 일쑤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는 없으니 부랑아는 거리를 휩쓸면서 사회불안을 야기한다. 이런 사회문제를 당장 치유해야 할 텐데 처방을 내리고 치료하는 정치인은 하나도 없다. 이때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성리학자들이 도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정치권에 등장한다.
현 사회문제를 고치려면 정치를 바르게 해야 하고, 정치를 바르게 하려면 수신제가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라고 비분강개한다. 백성들은 처음엔 환호한다. 우선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뚫는 듯한 시원함을 느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된다. 본질 문제는 제쳐 두고 조그만 절차, 도덕 문제에만 매달려 정쟁으로 모든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벗어난 임금이 있다. 아마도 세종과 성종, 후기에는 영조 정도였을 것이다. 세종과 성종은 선대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정적들을 확실하게 제거해서 반대파가 적었다는 특징이 있을 것이고 영조는 임금 노릇을 오래도록 했으며(52년 재위) 탕평책을 썼다는 다른 점이 있다. 또 이들은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임금이었다. 특히 성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마도 똑똑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하면 소모적 당쟁에서 벗어나 나랏님 노릇을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세종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고 오래도록 기용했다. 요즘은 YS 이래 언론에서 떠들기만 하면 장관을 바꾼다. 참여정부에서도 처음에는 퇴임까지 한배를 탈 것처럼 하더니, 청와대 조직은 물론이고 내각까지 겨우 1년을 넘기면 하마시킨다. 그러니 업무 파악도 못하고 조직 장악력도 떨어진다.
다음은 뚝심을 가지고 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성종은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과거에 합격한 신진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여론을 앞세우는 언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냄비처럼 금방 끊고 식는다. 사학법을 개정했으면 계속 밀고 나가서 시행이나 해보고 재개정 논의를 해야 한다.
심하게 반발만 하면 밀리고 타협하니 개나 도나 반대를 한다. 심지어 반대를 위한 반대도 많다. 대중 정치는 연예인 바라보듯 선동적이다. 철학강의 듣듯 장기적 안목으로 보지 않는다. 정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오불관언하라. 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여론을 업고 돌파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물러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마지막으로 싱크탱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어서 젊은 학자들에게 현실적인 학문을 독려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많은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각종 위원회를 두는 것도 이런 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아웃소싱해서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더니, 지금은 각 부처마다 너무나 많은 조직을 만들고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말았다.
정부의 외곽 조직을 줄이고 아웃소싱해서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많은 것을 단독으로 결정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두뇌집단의 논의는 장려했다가 이 가운데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젠 제발 국회도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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