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는 다른 사람들 보다 도덕적인지. 목사님들은 자신이 한 설교내용의 반이라도 생활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목탁을 두드리며 백팔 번뇌를 쫓는 승려는 그 중에 몇 개라도 떨쳐 버렸는지 묻고 싶다. 이들은 가끔 선을 외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위선 적일 때가 있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에서 연극 배우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신부처럼.
<몬트리올 예수="">는 극중 극 형식으로 짜여 있다. 5명의 배우가 공연하는 연극과 그들을 둘러싼 현실이 씨줄과 날줄 엮듯이 진행된다. 몬트리올 성당 신부가 30년 동안 똑같은 대본으로 공연한 성극에 변화를 주려고 순수 예술을 고집하는 다니엘에게 연극을 맡긴다. 그는 현대적 해석으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죽음이 2천년 전 사건이 아닌 지금의 몬트리올, 뉴욕, 서울, 위선과 죄로 물든 도시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절규하듯 전한다. 종교계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공연은 종교계 고위층의 비위를 거슬려 중지된다. 연극을 강행하려는 배우와 공연을 막으려는 경비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연기하던 다니엘이 십자가가 쓰러져 밑에 깔려죽는다.
뇌사 상태에서 눈과 심장의 장기 기증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준 다니엘. 그가 편안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신부에게 묻는다. "삶에는 안이한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것은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20 년만의 추위였다. 추위에 눈 쌓인 빙판 길은 걷는 것은 몹시 힘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조심조심 걷는데도 미끄러지고 찬바람은 두꺼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시린 귀를 손으로 감싸고 아파트 담을 돌아가려는데 60대 남자가 쓰러져 있다.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 위를 보고 쓰러져 있었는데 차림도 말쑥하고 얼굴도 점잖은 듯 보였다. 술 냄새도 나지 않고 누구와 싸운 흔적도 없다.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다 나는 멈칫 하고 섰다. 감기로 몸도 아프고 추위에 약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쓰러진 사람은 체구가 컸다. 다가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할 상황 같고 병원에 옮겨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로는 옮길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바쁘게 지나간다. 쓰러진 사람을 흘깃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어느새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말자. 만약 병원에 데려 가면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야하는데 만약 보호자가 없다면. 지금 죽어 있다면. 머리 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행동은 그 보다 더 민첩했다. 그러나, 발은 무거운 것 같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 했다. 뒤에 오던 남자가 나를 지나쳐 길 건너 교통 순경을 부른다. 경찰은 장소를 확인했다. 순간 갇힌 곳에서 풀려 난 듯 한 기분이었다.
집까지는 5분 정도 거리인데도 꽤 멀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뜨거운 차 한잔을 마셨는데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고 쓰러졌으면 혈압이나 심장이 원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구급 처치를 해야하는데. 병원 가서 살았을까. 각가지 추측과 함께 떠오른 것은 종종 걸음으로 뒤돌아서 걷는 내 모습이었다.
오랜 기간 교회를 다녔다. 수 없이 듣고 보던 말씀. 여리고를 향해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매까지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 곳을 지나던 평소 거룩한 척 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그 옆을 피하여 지나가고, 사마리아인 하나가 불쌍한 사람을 구해 주었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평소 비난하던 사랑 없고 동정심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한치도 틀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입으로만 말하고 귀로는 스쳐 지나간 이웃 사랑이었다. 차가운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평소 손이 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심코 시든 화초에 물을 주다가 손이 보이자 주던 물을 멈추고 말았다.
감독 : 데니 아르깡
주연 : 로데오 블뤼토
영화 노트
캐나다는 영어권 국가지만 퀘백주는 불어권 중심이다. 몬트리올은 퀘백주의 수도이다.
캐나다의 음유 시인 레오나드 코헨( 대표곡 : 수잔, 블루 레인 코트)이 몬트리올 맥길 대학 출신. 그의 '블루 레인 코트'를 들으면 우산과 레인 코트 없이 비를 온 몸이 젖도록 맞고 싶어진다.
몬트리올>몬트리올>
<몬트리올 예수="">는 극중 극 형식으로 짜여 있다. 5명의 배우가 공연하는 연극과 그들을 둘러싼 현실이 씨줄과 날줄 엮듯이 진행된다. 몬트리올 성당 신부가 30년 동안 똑같은 대본으로 공연한 성극에 변화를 주려고 순수 예술을 고집하는 다니엘에게 연극을 맡긴다. 그는 현대적 해석으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죽음이 2천년 전 사건이 아닌 지금의 몬트리올, 뉴욕, 서울, 위선과 죄로 물든 도시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절규하듯 전한다. 종교계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공연은 종교계 고위층의 비위를 거슬려 중지된다. 연극을 강행하려는 배우와 공연을 막으려는 경비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연기하던 다니엘이 십자가가 쓰러져 밑에 깔려죽는다.
뇌사 상태에서 눈과 심장의 장기 기증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준 다니엘. 그가 편안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신부에게 묻는다. "삶에는 안이한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것은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20 년만의 추위였다. 추위에 눈 쌓인 빙판 길은 걷는 것은 몹시 힘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조심조심 걷는데도 미끄러지고 찬바람은 두꺼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시린 귀를 손으로 감싸고 아파트 담을 돌아가려는데 60대 남자가 쓰러져 있다.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 위를 보고 쓰러져 있었는데 차림도 말쑥하고 얼굴도 점잖은 듯 보였다. 술 냄새도 나지 않고 누구와 싸운 흔적도 없다.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다 나는 멈칫 하고 섰다. 감기로 몸도 아프고 추위에 약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쓰러진 사람은 체구가 컸다. 다가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할 상황 같고 병원에 옮겨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로는 옮길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바쁘게 지나간다. 쓰러진 사람을 흘깃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어느새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말자. 만약 병원에 데려 가면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야하는데 만약 보호자가 없다면. 지금 죽어 있다면. 머리 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행동은 그 보다 더 민첩했다. 그러나, 발은 무거운 것 같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 했다. 뒤에 오던 남자가 나를 지나쳐 길 건너 교통 순경을 부른다. 경찰은 장소를 확인했다. 순간 갇힌 곳에서 풀려 난 듯 한 기분이었다.
집까지는 5분 정도 거리인데도 꽤 멀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뜨거운 차 한잔을 마셨는데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고 쓰러졌으면 혈압이나 심장이 원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구급 처치를 해야하는데. 병원 가서 살았을까. 각가지 추측과 함께 떠오른 것은 종종 걸음으로 뒤돌아서 걷는 내 모습이었다.
오랜 기간 교회를 다녔다. 수 없이 듣고 보던 말씀. 여리고를 향해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매까지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 곳을 지나던 평소 거룩한 척 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그 옆을 피하여 지나가고, 사마리아인 하나가 불쌍한 사람을 구해 주었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평소 비난하던 사랑 없고 동정심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한치도 틀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입으로만 말하고 귀로는 스쳐 지나간 이웃 사랑이었다. 차가운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평소 손이 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심코 시든 화초에 물을 주다가 손이 보이자 주던 물을 멈추고 말았다.
감독 : 데니 아르깡
주연 : 로데오 블뤼토
영화 노트
캐나다는 영어권 국가지만 퀘백주는 불어권 중심이다. 몬트리올은 퀘백주의 수도이다.
캐나다의 음유 시인 레오나드 코헨( 대표곡 : 수잔, 블루 레인 코트)이 몬트리올 맥길 대학 출신. 그의 '블루 레인 코트'를 들으면 우산과 레인 코트 없이 비를 온 몸이 젖도록 맞고 싶어진다.
몬트리올>몬트리올>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