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중 하나인 추석이 다가왔다. 모두들 오랜만에 만난 가족 친지들과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맛있는 음식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을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징검다리 연휴를 잘 활용해 국내외 여행을 꿈꾸는 이들도 상당수다.
하지만 추석이 더욱 슬픈 사람들이 있다. 일제시대 피지 못한 어린 나이에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영영 고향을 잃어버린 할머니, 돈을 벌겠다며 고향 함경도를 떠나 남한 땅을 찾아온 탈북자는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의 모습이다. 돈을 벌기 위해 먼 이국땅에 찾아왔건만 사고를 당해 오도 가도 못하는 한 외국인 노동자는 다민족 다인종 사회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내일신문이 추석을 앞두고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만났다.
“60년전 어머니 모습 아직도 생생”
13살에 위안부 끌려간 길원옥 할머니
“고향 떠난 건 13살 때인지 15살 때인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말이 그렇지 60년이 넘었는데 알 리가 없지. 갈 때는 조선 사람하고 같이 간 것 같아. 중국으로. 중국 북경에서 어디로 가서 지냈는데, 내 친구랑 둘이 갔는데, 아마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갔는지 어떻게 갔는데, 집에서 떠난 뒤로 다시는 자유라는 걸 모르고….”
길원옥(79)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학교 앞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서 다른 할머니 한 분과 생활을 돌봐주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 실무자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몇 조각 기억 밖에 없는 고향 생각을 더듬어 본다.
“열 살 남짓 됐을 때였을까, 엄마가 장사 나가서 안 들어오면 부뚜막에 올라앉아서 좁쌀 밥을 했는데, 찰기 없는 조밥이 오그르르 다 흩어져서 먹지도 못하게 해놨다고 야단맞았던 생각이 나. 두 살 많은 작은 오빠와 싸우다 엄마 아빠에게 일러 바쳐 오빠 혼 낸 기억도 나구….”
여든이 다 됐지만 가족에 대한 기억을 물으면 꼭 ‘엄마, 아부지’라 부르며 “큰 오빠, 둘째 오빠, 언니, 나, 내 동생까지 5남매”라고 한 사람씩 부른다. 기억의 깊은 곳에서 한 사람씩 떠올리려 애쓰는 것이다.
18살에 해방을 맞이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 고향에 바로 갈 수 없었던 길 할머니는 친구랑 돈을 벌기 위해 충청도 천안으로 갔다. 그리고 38선이 그어졌고, 다시는 고향소식을 알 수도,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길 할머니는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 했다. 인천에서 살며 31살 때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해서 길렀다.
“아이들 낳고 사라져 버린 친모 대신 길러 대학도 보내고 대학원도 보냈지. 그 아들이 지금 목사 해.”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할머니는 아들 공부 시키는 데 혹시 방해가 될까봐 이산가족을 찾을 때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서른여덟 살 됐을 때 누가 양아들이라고 얘기해 출생 비밀이 알려져 아들이 잠시 방황했지만 잘 지낸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이 올해 마흔여덟 살인데, 대학교 다니는 남매를 두고도 여자 아이 하나를 입양해 키운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일본 사람들한테 당하고 살 때가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그 때 지난 후에도 어려운 생활 많이 해서 일생을 고생했지. 이제 정대협와서 삼시세때 밥 제대로 찾아먹고 잠 제대로 자고,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지. 사람같이 못살다 80살이 다 돼 버렸어.”
길 할머니는 추석 연휴로 온 나라가 들떠 있는 4일에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도 맘 같으면 그네들 앞에 얼굴 내놓고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우리 후손에게 이런 일 안 생기게 하기 위해 갈거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빛이 빛났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고향의 아내 목숨 다할 때까지 사랑”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모르마마트씨
800만원의 돈을 주고 지난 2003년 한국에 들어온 모르마마트(41·가명)씨는 요즘 거짓말을 자주 한다.
고향에 있는 부인 나타샤(40·가명)씨가 전화를 해 “왜 자주 전화 안 해? 어디 아파?”하고 물어보면 그는 “응, 그냥. 안 아파”라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모르마마트씨는 지난해 5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빗길에 넘어져 왼쪽 허벅지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직도 뼈가 붙지 않아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그는 그 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고가 난 뒤론 고향에 전화도 두세 달에 한 번씩 건다. 그러면, 집에서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화가 걸려 온다. 비자 만료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돼 버린 그는 편지를 쓰지도 못한다. 받을 주소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마마트씨의 고향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동남쪽으로 500km 정도 떨어진 ‘가르시’시다. 그는 17살 되던 1982년 셀호스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1985년 졸업하고 당시 소련군에 입대했다.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톡 옆에 있는 하바로스크에서 2년 군대 생활을 마치고 풍습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6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고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그는 지난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양국간 실질적인 우호협력 증진을 다지기로 협약을 체결한 이듬 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족을 이렇게 오랫동안 볼 수 없게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당장 돌아갈 계획도 없다. “내가 지금 돌아가서 다시 한국에 오려면 비자 받는데 3~4년 걸리고 돈도 1000만원 이상 들어간다”며 “빨리 나아서 여기서 돈을 벌어야 된다”고 말했다.
1년 5개월 동안 일을 못하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800만원을 빌렸다. 그가 보내는 돈으로 고향에서는 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고향엔 부모님도 계시고 아들 둘 딸 하나도 있다. 그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그립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돈 벌러 왔는데, 제대로 돈도 못 벌고, 다치고…, 마음이 힘들다”고 말했다.
처음 대구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의정부 수원 화성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선풍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고, 섬유공장에서 원단을 펴는 일도 하고, 개를 키우는 농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던 그는 오토바이 사고 후 일을 못하고 있는 지금이 무척 힘들다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1년 5개월 동안 일을 못했다. 많이 답답하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추석과 같은 명절은 없지만 노동절이나 설날 그리고 독립기념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것 먹으며 공원에 산책도 가곤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그는 “허허” 웃는다. 그리고 혼자 소리로 낮게 말한다. “보고 싶으면, 돈이 있어야….”
아이들 자랑을 해보라니 그는 금방 웃는다. 열일곱 살 큰 아들은 축구를 잘 하고, 열두 살 작은 아들은 태권도를 잘한단다. 열네 살 딸은 이제 미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내는 15살 때부터 사랑했다. 정말 마음이 좋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모르마마트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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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석이 더욱 슬픈 사람들이 있다. 일제시대 피지 못한 어린 나이에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영영 고향을 잃어버린 할머니, 돈을 벌겠다며 고향 함경도를 떠나 남한 땅을 찾아온 탈북자는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의 모습이다. 돈을 벌기 위해 먼 이국땅에 찾아왔건만 사고를 당해 오도 가도 못하는 한 외국인 노동자는 다민족 다인종 사회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내일신문이 추석을 앞두고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만났다.
“60년전 어머니 모습 아직도 생생”
13살에 위안부 끌려간 길원옥 할머니
“고향 떠난 건 13살 때인지 15살 때인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말이 그렇지 60년이 넘었는데 알 리가 없지. 갈 때는 조선 사람하고 같이 간 것 같아. 중국으로. 중국 북경에서 어디로 가서 지냈는데, 내 친구랑 둘이 갔는데, 아마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갔는지 어떻게 갔는데, 집에서 떠난 뒤로 다시는 자유라는 걸 모르고….”
길원옥(79)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학교 앞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서 다른 할머니 한 분과 생활을 돌봐주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 실무자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몇 조각 기억 밖에 없는 고향 생각을 더듬어 본다.
“열 살 남짓 됐을 때였을까, 엄마가 장사 나가서 안 들어오면 부뚜막에 올라앉아서 좁쌀 밥을 했는데, 찰기 없는 조밥이 오그르르 다 흩어져서 먹지도 못하게 해놨다고 야단맞았던 생각이 나. 두 살 많은 작은 오빠와 싸우다 엄마 아빠에게 일러 바쳐 오빠 혼 낸 기억도 나구….”
여든이 다 됐지만 가족에 대한 기억을 물으면 꼭 ‘엄마, 아부지’라 부르며 “큰 오빠, 둘째 오빠, 언니, 나, 내 동생까지 5남매”라고 한 사람씩 부른다. 기억의 깊은 곳에서 한 사람씩 떠올리려 애쓰는 것이다.
18살에 해방을 맞이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 고향에 바로 갈 수 없었던 길 할머니는 친구랑 돈을 벌기 위해 충청도 천안으로 갔다. 그리고 38선이 그어졌고, 다시는 고향소식을 알 수도,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길 할머니는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 했다. 인천에서 살며 31살 때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해서 길렀다.
“아이들 낳고 사라져 버린 친모 대신 길러 대학도 보내고 대학원도 보냈지. 그 아들이 지금 목사 해.”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할머니는 아들 공부 시키는 데 혹시 방해가 될까봐 이산가족을 찾을 때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서른여덟 살 됐을 때 누가 양아들이라고 얘기해 출생 비밀이 알려져 아들이 잠시 방황했지만 잘 지낸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이 올해 마흔여덟 살인데, 대학교 다니는 남매를 두고도 여자 아이 하나를 입양해 키운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일본 사람들한테 당하고 살 때가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그 때 지난 후에도 어려운 생활 많이 해서 일생을 고생했지. 이제 정대협와서 삼시세때 밥 제대로 찾아먹고 잠 제대로 자고,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지. 사람같이 못살다 80살이 다 돼 버렸어.”
길 할머니는 추석 연휴로 온 나라가 들떠 있는 4일에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도 맘 같으면 그네들 앞에 얼굴 내놓고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우리 후손에게 이런 일 안 생기게 하기 위해 갈거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빛이 빛났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고향의 아내 목숨 다할 때까지 사랑”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모르마마트씨
800만원의 돈을 주고 지난 2003년 한국에 들어온 모르마마트(41·가명)씨는 요즘 거짓말을 자주 한다.
고향에 있는 부인 나타샤(40·가명)씨가 전화를 해 “왜 자주 전화 안 해? 어디 아파?”하고 물어보면 그는 “응, 그냥. 안 아파”라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모르마마트씨는 지난해 5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빗길에 넘어져 왼쪽 허벅지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직도 뼈가 붙지 않아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그는 그 후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고가 난 뒤론 고향에 전화도 두세 달에 한 번씩 건다. 그러면, 집에서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화가 걸려 온다. 비자 만료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돼 버린 그는 편지를 쓰지도 못한다. 받을 주소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마마트씨의 고향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동남쪽으로 500km 정도 떨어진 ‘가르시’시다. 그는 17살 되던 1982년 셀호스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1985년 졸업하고 당시 소련군에 입대했다.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던 블라디보스톡 옆에 있는 하바로스크에서 2년 군대 생활을 마치고 풍습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6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고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그는 지난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양국간 실질적인 우호협력 증진을 다지기로 협약을 체결한 이듬 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족을 이렇게 오랫동안 볼 수 없게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당장 돌아갈 계획도 없다. “내가 지금 돌아가서 다시 한국에 오려면 비자 받는데 3~4년 걸리고 돈도 1000만원 이상 들어간다”며 “빨리 나아서 여기서 돈을 벌어야 된다”고 말했다.
1년 5개월 동안 일을 못하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800만원을 빌렸다. 그가 보내는 돈으로 고향에서는 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고향엔 부모님도 계시고 아들 둘 딸 하나도 있다. 그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그립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돈 벌러 왔는데, 제대로 돈도 못 벌고, 다치고…, 마음이 힘들다”고 말했다.
처음 대구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의정부 수원 화성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선풍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고, 섬유공장에서 원단을 펴는 일도 하고, 개를 키우는 농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던 그는 오토바이 사고 후 일을 못하고 있는 지금이 무척 힘들다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1년 5개월 동안 일을 못했다. 많이 답답하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추석과 같은 명절은 없지만 노동절이나 설날 그리고 독립기념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것 먹으며 공원에 산책도 가곤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그는 “허허” 웃는다. 그리고 혼자 소리로 낮게 말한다. “보고 싶으면, 돈이 있어야….”
아이들 자랑을 해보라니 그는 금방 웃는다. 열일곱 살 큰 아들은 축구를 잘 하고, 열두 살 작은 아들은 태권도를 잘한단다. 열네 살 딸은 이제 미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내는 15살 때부터 사랑했다. 정말 마음이 좋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모르마마트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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