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담보로 왕인박사 뱃길 재현 … 정부 지원·관심 없어 아쉬워
“대한민국 지도를 거꾸로 보면 미래가 보인다.” 시원하게 뚫린, 무한에 가까운 자원을 품은 바다는 문자 그대로 ‘블루오션’임이 분명하다. 해상왕 장보고가 그랬듯 일찌감치 바다를 벗 삼아 해양시대를 개척해나간 이들이 있다. 수산어업을 비롯해 해운물류 항만 해양과학·관광·환경·안전 분야에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해내는 바닷사람들이다. 내일신문은 연속기획 ‘바다에서 희망을 찾다’를 통해 해양자원을 캐내고 있는 ‘장보고의 후예’를 만난다.
채바다. 62세. 직업은 떼배타고 바다탐험. 취미는 바다사랑.
이름도 바다다. 얼마나 바다를 사랑하는지 이름까지 바꿨다. 주변에선 그를 ‘바다에 미친 사나이’라 부른다. 어느날 고향 제주 성산포에 나타나 자리돔을 잡거나 동네 꼬마들이 타고 놀던 떼배를 만들더니 그걸로 현해탄을 건넜다. 세 번이나.
현해탄을 처음 건널 때는 그도 겁이 좀 났나 보다. 1996년 5월 1차 항해 직전,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가 “바다에 던져도 한 열흘 살 수 있는 ‘짱짱한 놈’으로 대여섯명 꿔달라(?)”고 했다. 바다의 사나이 해병대 가운데도 최정예 병사 6명과 함께 뗏목에 몸을 실었다.
바다는 쉽사리 일본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풍 앞에 뗏목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특수부대 출신들도 하나 둘 지쳐 나가떨어졌다. 오직 ‘채바다’만 파도타기를 즐겼다.
1997년 10월과 2001년 4월, 두 번 더 길이 6.5m 폭 3m 뗏목으로 일본 상륙에 성공했다.
왕인호 타고 규슈로
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 채바다. 본명 채길웅. 고대사연구와 떼배에 ‘미치기’ 전인 1990년까지 사용하던 이름이다.
“우리는 해양민족의 후예 아닙니까? 그런데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떼배는 해양문화를 발전시킨 원시 통나무배로 오늘날 배의 시조다. 선조들이 이 배를 타고 바다에 도전했고 섬과 섬, 섬과 육지 사이 문화이동이 이루어졌다는 게 채 소장의 설명이다. 김재근 서울대 박사는 거북선 바닥도 떼배를 원리로 한다고 설명한다.
채 소장은 고대에 선조들이 떼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가 고대일본발전을 주도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의 시간을 1600년 전으로 돌렸다.
“한국이 일본 고대문화의 뿌리임을 확인하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폭풍쯤이야 못 견디겠습니까.” 통나무배에 몸을 실은 채 소장 일행은 2001년 4월 9일 전남 영암 대불항을 떠났다.
1600년 전 왕인(王仁 373~?) 박사가 단행했던, 고대 한반도와 일본 간 뱃길 탐사를 재현한 것이다. 고대 원시선박인 떼배 이름도 ‘왕인호’로 지었다. 항로는 왕인 박사가 이용했던 대불항-완도 보길도-고흥 앞바다-일본 규슈(九州)지방 가라쓰 연안으로 정했다. 시속 1.5노트로 항해하는 떼배는 ‘바람따라 물결따라’ 일본으로 흘러갔다. 목숨을 담보로 한 험난한 항해였다.
대원들은 밤이면 전원 불침번을 섰고 낮에는 6시간씩 교대로 잠을 잤다. 탐험대장 채 소장은 떼배로 일본을 두 번이나 다녀온 경험이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채 소장은 “일본의 고대 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정착했음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전남 영암이 당시 전남 서남해안 국제 교류 중심지였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탐사였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본 언론과 국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뜨고 언론사들도 헬기까지 동원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등 일본 언론들은 떼배가 고대에 한국문화를 싣고 일본에 전해졌음을 심층 보도했다.
채 소장은 떼배를 타고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뱃길을 따라 우리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해양민족인지를 알리는데 성공했다.
오사카에 있는 왕인 박사 묘역은 1938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최근 이곳에 박사를 기리는 높이 5m, 너비 4m 백제 문을 세웠다.
벽랑국 신화를 좇다
채 소장은 10년 넘게 국내외 고대사 관련 자료를 뒤졌다. 제주의 탄생과 백제 인재들이 일본 문명을 탄생시킨 주역들이라는 것을 찾아냈고 하나씩 밝혀냈다. 고지도와 문헌을 통해 벽랑도의 실체를 찾아 나섰다.
고려사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 벽랑 기록을 찾았고, 그 흔적을 따라 현장을 찾았다. 탐라국(제주의 옛 왕국)에 문화를 전파한 벽랑국 유래를 찾기 위해 또다시 떼배를 타고 120㎞ 항해에 들어간 것이다.
6월 5일 채 소장은 한반도 고대인들이 탐라국을 왕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뱃길 탐사에 나섰다. ‘고(高) 양(梁) 부(夫) 삼성(三姓) 시조가 벽랑국에서 온 공주 세 명을 각각 아내로 맞이해 탐라국을 세웠다’는 기록에서 출발했다. 채 소장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전남 해안의 벽랑도(현 소랑도)가 벽랑국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벽랑국 탐사에 쓰인 떼배는 삼나무를 통으로 엮어 만든 길이 7.5m, 폭 2.5~2.9m짜리 배. 채 소장은 돛과 노의 힘만으로 400km가 넘는 뱃길을 탐험해 제주의 기원을 찾고 역사를 재조명했다. 838년 일본 고승 엔닌이 중국으로 가려다 두 번이나 실패했던 험난한 바닷길이다. 그는 해상왕 장보고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일본까지 돌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채 소장은 “제주의 기원인 탐라국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우리 뿌리를 찾고 현재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지자체 지원 ‘0원’
채 소장이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고 새로운 것들을 조명할수록 경제적 어려움은 커졌다. 그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제적 도움을 준 적이 없다. 기업에 강연을 다니거나 혼자 힘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왔다. 2003년에야 해양수산부의 도움으로 ‘사단법인 한국해양탐험문화진흥회’를 설립했다.
아직도 어렵긴 마찬가지. 채 소장은 “세계 강대국들은 해양 관련 연구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바탕으로 오늘날 해양을 지배하고 있다”며 “한국도 해양연구 단체와 전문가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와 고대사 연구에 미친 바다 사나이 채바다. 그는 지금도 제주-완도-영암을 오가며 왕인 박사를 일본 왕실의 스승이 아닌 해양민족이 배출한 세계적 석학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있다.
채바다 소장은
제주도 성산포 출신으로 한양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후 중앙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 ‘미쳐’ 고대사 연구와 제주 뿌리찾기, 일본고대사 연구 등을 통해 왕인 박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 1996년 첫 고대 뱃길탐험을 시작으로 3차례 한·일 뱃길탐험과 2003년 남북평화축전 성공기원 제주일주 등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해 10월에는 남제주군 성산읍 시흥리에 바다박물관을 세웠다. 시흥포구에 떼배 4척을 정박시켜 ‘떼배체험 바당마을(www.ttebe.net)’을 운영하며 제주의 전통 뗏목이 가진 문화·역사적 가치를 전수하고 있다.
문의 : 064-782-1235
/제주 전호성 기자 hsjeon@naeil.com
떼배는 해양문화 유산
떼배는 제주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 온 원시형태의 배다. 원래 이름은 터배 터위 테위 테배 등 마을마다 달랐다. 고대부터 제주 사람들이 만들어왔고 1960년대까지 제주 연근해에서 고기잡이나 해녀들 해조류 채취에 이용했다.
떼배는 주로 삼나무를 이용한다. 길이 6.5m, 폭 3m, 선수 2.7m로 통나무 10여개를 엮어 만든다. 바람이 심한 겨울에는 배를 분해·보관하다 봄 여름에 다시 조립해 사용한다.
떼배는 세계 여러나라에 남아 있는 원시 배들과는 선재(船材)나 모양 크기 모든 면에서 다르다. 사료(史料)적 가치가 매우 높아 해양국가인 우리나라에서 그 원형을 찾아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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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지도를 거꾸로 보면 미래가 보인다.” 시원하게 뚫린, 무한에 가까운 자원을 품은 바다는 문자 그대로 ‘블루오션’임이 분명하다. 해상왕 장보고가 그랬듯 일찌감치 바다를 벗 삼아 해양시대를 개척해나간 이들이 있다. 수산어업을 비롯해 해운물류 항만 해양과학·관광·환경·안전 분야에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해내는 바닷사람들이다. 내일신문은 연속기획 ‘바다에서 희망을 찾다’를 통해 해양자원을 캐내고 있는 ‘장보고의 후예’를 만난다.
채바다. 62세. 직업은 떼배타고 바다탐험. 취미는 바다사랑.
이름도 바다다. 얼마나 바다를 사랑하는지 이름까지 바꿨다. 주변에선 그를 ‘바다에 미친 사나이’라 부른다. 어느날 고향 제주 성산포에 나타나 자리돔을 잡거나 동네 꼬마들이 타고 놀던 떼배를 만들더니 그걸로 현해탄을 건넜다. 세 번이나.
현해탄을 처음 건널 때는 그도 겁이 좀 났나 보다. 1996년 5월 1차 항해 직전,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가 “바다에 던져도 한 열흘 살 수 있는 ‘짱짱한 놈’으로 대여섯명 꿔달라(?)”고 했다. 바다의 사나이 해병대 가운데도 최정예 병사 6명과 함께 뗏목에 몸을 실었다.
바다는 쉽사리 일본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풍 앞에 뗏목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특수부대 출신들도 하나 둘 지쳐 나가떨어졌다. 오직 ‘채바다’만 파도타기를 즐겼다.
1997년 10월과 2001년 4월, 두 번 더 길이 6.5m 폭 3m 뗏목으로 일본 상륙에 성공했다.
왕인호 타고 규슈로
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 채바다. 본명 채길웅. 고대사연구와 떼배에 ‘미치기’ 전인 1990년까지 사용하던 이름이다.
“우리는 해양민족의 후예 아닙니까? 그런데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떼배는 해양문화를 발전시킨 원시 통나무배로 오늘날 배의 시조다. 선조들이 이 배를 타고 바다에 도전했고 섬과 섬, 섬과 육지 사이 문화이동이 이루어졌다는 게 채 소장의 설명이다. 김재근 서울대 박사는 거북선 바닥도 떼배를 원리로 한다고 설명한다.
채 소장은 고대에 선조들이 떼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가 고대일본발전을 주도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의 시간을 1600년 전으로 돌렸다.
“한국이 일본 고대문화의 뿌리임을 확인하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폭풍쯤이야 못 견디겠습니까.” 통나무배에 몸을 실은 채 소장 일행은 2001년 4월 9일 전남 영암 대불항을 떠났다.
1600년 전 왕인(王仁 373~?) 박사가 단행했던, 고대 한반도와 일본 간 뱃길 탐사를 재현한 것이다. 고대 원시선박인 떼배 이름도 ‘왕인호’로 지었다. 항로는 왕인 박사가 이용했던 대불항-완도 보길도-고흥 앞바다-일본 규슈(九州)지방 가라쓰 연안으로 정했다. 시속 1.5노트로 항해하는 떼배는 ‘바람따라 물결따라’ 일본으로 흘러갔다. 목숨을 담보로 한 험난한 항해였다.
대원들은 밤이면 전원 불침번을 섰고 낮에는 6시간씩 교대로 잠을 잤다. 탐험대장 채 소장은 떼배로 일본을 두 번이나 다녀온 경험이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채 소장은 “일본의 고대 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정착했음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전남 영암이 당시 전남 서남해안 국제 교류 중심지였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탐사였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본 언론과 국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뜨고 언론사들도 헬기까지 동원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등 일본 언론들은 떼배가 고대에 한국문화를 싣고 일본에 전해졌음을 심층 보도했다.
채 소장은 떼배를 타고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뱃길을 따라 우리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해양민족인지를 알리는데 성공했다.
오사카에 있는 왕인 박사 묘역은 1938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최근 이곳에 박사를 기리는 높이 5m, 너비 4m 백제 문을 세웠다.
벽랑국 신화를 좇다
채 소장은 10년 넘게 국내외 고대사 관련 자료를 뒤졌다. 제주의 탄생과 백제 인재들이 일본 문명을 탄생시킨 주역들이라는 것을 찾아냈고 하나씩 밝혀냈다. 고지도와 문헌을 통해 벽랑도의 실체를 찾아 나섰다.
고려사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 벽랑 기록을 찾았고, 그 흔적을 따라 현장을 찾았다. 탐라국(제주의 옛 왕국)에 문화를 전파한 벽랑국 유래를 찾기 위해 또다시 떼배를 타고 120㎞ 항해에 들어간 것이다.
6월 5일 채 소장은 한반도 고대인들이 탐라국을 왕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뱃길 탐사에 나섰다. ‘고(高) 양(梁) 부(夫) 삼성(三姓) 시조가 벽랑국에서 온 공주 세 명을 각각 아내로 맞이해 탐라국을 세웠다’는 기록에서 출발했다. 채 소장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전남 해안의 벽랑도(현 소랑도)가 벽랑국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벽랑국 탐사에 쓰인 떼배는 삼나무를 통으로 엮어 만든 길이 7.5m, 폭 2.5~2.9m짜리 배. 채 소장은 돛과 노의 힘만으로 400km가 넘는 뱃길을 탐험해 제주의 기원을 찾고 역사를 재조명했다. 838년 일본 고승 엔닌이 중국으로 가려다 두 번이나 실패했던 험난한 바닷길이다. 그는 해상왕 장보고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일본까지 돌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채 소장은 “제주의 기원인 탐라국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우리 뿌리를 찾고 현재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지자체 지원 ‘0원’
채 소장이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고 새로운 것들을 조명할수록 경제적 어려움은 커졌다. 그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제적 도움을 준 적이 없다. 기업에 강연을 다니거나 혼자 힘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왔다. 2003년에야 해양수산부의 도움으로 ‘사단법인 한국해양탐험문화진흥회’를 설립했다.
아직도 어렵긴 마찬가지. 채 소장은 “세계 강대국들은 해양 관련 연구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바탕으로 오늘날 해양을 지배하고 있다”며 “한국도 해양연구 단체와 전문가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와 고대사 연구에 미친 바다 사나이 채바다. 그는 지금도 제주-완도-영암을 오가며 왕인 박사를 일본 왕실의 스승이 아닌 해양민족이 배출한 세계적 석학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있다.
채바다 소장은
제주도 성산포 출신으로 한양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후 중앙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 ‘미쳐’ 고대사 연구와 제주 뿌리찾기, 일본고대사 연구 등을 통해 왕인 박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 1996년 첫 고대 뱃길탐험을 시작으로 3차례 한·일 뱃길탐험과 2003년 남북평화축전 성공기원 제주일주 등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해 10월에는 남제주군 성산읍 시흥리에 바다박물관을 세웠다. 시흥포구에 떼배 4척을 정박시켜 ‘떼배체험 바당마을(www.ttebe.net)’을 운영하며 제주의 전통 뗏목이 가진 문화·역사적 가치를 전수하고 있다.
문의 : 064-782-1235
/제주 전호성 기자 hsjeon@naeil.com
떼배는 해양문화 유산
떼배는 제주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 온 원시형태의 배다. 원래 이름은 터배 터위 테위 테배 등 마을마다 달랐다. 고대부터 제주 사람들이 만들어왔고 1960년대까지 제주 연근해에서 고기잡이나 해녀들 해조류 채취에 이용했다.
떼배는 주로 삼나무를 이용한다. 길이 6.5m, 폭 3m, 선수 2.7m로 통나무 10여개를 엮어 만든다. 바람이 심한 겨울에는 배를 분해·보관하다 봄 여름에 다시 조립해 사용한다.
떼배는 세계 여러나라에 남아 있는 원시 배들과는 선재(船材)나 모양 크기 모든 면에서 다르다. 사료(史料)적 가치가 매우 높아 해양국가인 우리나라에서 그 원형을 찾아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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