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공부’의 힘을 믿으세요
서울대 의대 졸업, 피부과 전문의로 일하는 큰딸. 서울대 법대 졸업,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둘째 딸.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는 쌍둥이 셋째 딸.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 쌍둥이 넷째 딸. 연세대 의대에 재학 중인 다섯째 딸.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늦둥이 고2 막내아들. 대충만 나열해도 귀가 번쩍 뜨이는 수재 집안, 안 먹어도 배부를 이들 남매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대치동’식도 아닌, ‘목동 엄마’식과도 확실히 다른,
학원이나 과외 없이 아이들을 모두 수재로 키워낸 보통 엄마 김종선 씨의 특별한 자녀교육 노하우를 들었다.
취재 강현정 리포터 sabbuni@naver.com 사진 안지섭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거실 가운데 큰 테이블 하나가 자리를 다 차지했다. 한쪽 벽은 오래된 백과사전, 위인전집 등 표지만 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책들로 꽉 찼다. 슬쩍 들춰보니 얼마나 뒤적였는지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섬유 회사에 다닌 남편의 박봉으로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키우면서 1년에 두 번 나오는 보너스는 아예 없는 셈치고 아이들 책을 사는 데 투자한 결과다. 자녀교육이 돈과 비례해 평가되는 시대, 자식 하나 가르치는데도 허리가 휘는 시대인지라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보냈다기에 넉넉한 집안일 거라던 ‘짐작’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성공적인 ‘자식 농사’의 공은 온전히 부모, 그중에서도 ‘방배동 김 선생’으로 불리는 평범한 엄마 김종선 씨(59)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녀교육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선택을 항상 믿어준 엄마
김씨는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타 지역으로의 전근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을 하면서 교편생활을 접었다. 빠듯한 월급에 많은 식구들. 당연히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맏이 외에는 아무도 유치원 근처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재 육남매’ 엄마 김씨에겐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교육관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하던 큰딸이 서울대 의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강북 1등이 강남 20등밖에 안 된다’며 말렸지만 엄마는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따라준 것이 그 좋은 예.
피아노를 잘 치던 둘째 딸이 예원중학교에 합격하자 김씨는 ‘언니(큰딸)도 공부를 잘하고 너도 예원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서 살자. 돈이 모자라면 전셋집에 살면 되고 김치라도 팔아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친지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하지만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둘째 딸이 가정 형편으로 전공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히 피아노를 접은 둘째 딸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법대에 다시 들어가 지금은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항상 아이들의 선택을 믿어주고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하던 엄마였기에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는 김씨.
“아이들이 서로 싸워 엄마가 중재에 나섰을 때 변명하는 자녀를 야단치기는 했어도 아이들에게 공부 잘해 서울대 가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공부 잘하는 비결은 ‘스스로 공부하기’
대개 아이가 공부를 잘할 때 오히려 엄마는 더 욕심을 내게 마련인데 한결같이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이 엄마, 학원의 유혹에 흔들렸을 법도 하지만 대답은 의외다.
“한번은 막내가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평균 89점, 전교 99등을 했으니 아이도 충격이 컸겠죠. 솔직히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 평균 90점까지만 도전해보자고 설득했어요. 스스로 공부한 다음 다시 고민을 해보자면서요.”
결과는? ‘스스로 공부’의 힘은 컸다. 처음에 99등으로 들어간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전국 수석만도 여러 차례. 잠깐의 불안함 때문에 학원 순례에 나서는 등 소신을 지키며 아이를 키우기 힘든 시대, 아들도 엄마도 ‘배짱’만큼은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데 설마 한 명은 속 썩이는 자식이 있지 않을까’ 싶어 넌지시 물어봤다.
“주변에서도 다들 그렇게 물어요. 근데 참 감사하게도 여태 속 썩이는 자식이 없었어요. 공부 잘한 것보다 그게 제일 고맙죠.”
현재 자신의 교육 철학을 가르쳐달라는 엄마들의 요구에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선 씨는 얼마 전 육남매를 수재로 키워낸 이야기를 담아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게 영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엄마를 위해서 이만한 것도 우리가 못하겠니?”라며 동생들을 다독인 심성 깊은 큰딸 그리고 언니의 말에 순응한 마음 따뜻한 동생들까지. 요즘 엄마답지 않고,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가족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훈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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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 졸업, 피부과 전문의로 일하는 큰딸. 서울대 법대 졸업,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둘째 딸.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는 쌍둥이 셋째 딸.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 쌍둥이 넷째 딸. 연세대 의대에 재학 중인 다섯째 딸.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늦둥이 고2 막내아들. 대충만 나열해도 귀가 번쩍 뜨이는 수재 집안, 안 먹어도 배부를 이들 남매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대치동’식도 아닌, ‘목동 엄마’식과도 확실히 다른,
학원이나 과외 없이 아이들을 모두 수재로 키워낸 보통 엄마 김종선 씨의 특별한 자녀교육 노하우를 들었다.
취재 강현정 리포터 sabbuni@naver.com 사진 안지섭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거실 가운데 큰 테이블 하나가 자리를 다 차지했다. 한쪽 벽은 오래된 백과사전, 위인전집 등 표지만 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책들로 꽉 찼다. 슬쩍 들춰보니 얼마나 뒤적였는지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섬유 회사에 다닌 남편의 박봉으로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키우면서 1년에 두 번 나오는 보너스는 아예 없는 셈치고 아이들 책을 사는 데 투자한 결과다. 자녀교육이 돈과 비례해 평가되는 시대, 자식 하나 가르치는데도 허리가 휘는 시대인지라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보냈다기에 넉넉한 집안일 거라던 ‘짐작’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성공적인 ‘자식 농사’의 공은 온전히 부모, 그중에서도 ‘방배동 김 선생’으로 불리는 평범한 엄마 김종선 씨(59)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녀교육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선택을 항상 믿어준 엄마
김씨는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타 지역으로의 전근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을 하면서 교편생활을 접었다. 빠듯한 월급에 많은 식구들. 당연히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맏이 외에는 아무도 유치원 근처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재 육남매’ 엄마 김씨에겐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교육관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하던 큰딸이 서울대 의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강북 1등이 강남 20등밖에 안 된다’며 말렸지만 엄마는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따라준 것이 그 좋은 예.
피아노를 잘 치던 둘째 딸이 예원중학교에 합격하자 김씨는 ‘언니(큰딸)도 공부를 잘하고 너도 예원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서 살자. 돈이 모자라면 전셋집에 살면 되고 김치라도 팔아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친지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하지만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둘째 딸이 가정 형편으로 전공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히 피아노를 접은 둘째 딸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법대에 다시 들어가 지금은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항상 아이들의 선택을 믿어주고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하던 엄마였기에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는 김씨.
“아이들이 서로 싸워 엄마가 중재에 나섰을 때 변명하는 자녀를 야단치기는 했어도 아이들에게 공부 잘해 서울대 가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공부 잘하는 비결은 ‘스스로 공부하기’
대개 아이가 공부를 잘할 때 오히려 엄마는 더 욕심을 내게 마련인데 한결같이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이 엄마, 학원의 유혹에 흔들렸을 법도 하지만 대답은 의외다.
“한번은 막내가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평균 89점, 전교 99등을 했으니 아이도 충격이 컸겠죠. 솔직히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 평균 90점까지만 도전해보자고 설득했어요. 스스로 공부한 다음 다시 고민을 해보자면서요.”
결과는? ‘스스로 공부’의 힘은 컸다. 처음에 99등으로 들어간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전국 수석만도 여러 차례. 잠깐의 불안함 때문에 학원 순례에 나서는 등 소신을 지키며 아이를 키우기 힘든 시대, 아들도 엄마도 ‘배짱’만큼은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데 설마 한 명은 속 썩이는 자식이 있지 않을까’ 싶어 넌지시 물어봤다.
“주변에서도 다들 그렇게 물어요. 근데 참 감사하게도 여태 속 썩이는 자식이 없었어요. 공부 잘한 것보다 그게 제일 고맙죠.”
현재 자신의 교육 철학을 가르쳐달라는 엄마들의 요구에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선 씨는 얼마 전 육남매를 수재로 키워낸 이야기를 담아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게 영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엄마를 위해서 이만한 것도 우리가 못하겠니?”라며 동생들을 다독인 심성 깊은 큰딸 그리고 언니의 말에 순응한 마음 따뜻한 동생들까지. 요즘 엄마답지 않고,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가족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훈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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