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물고기
황시내 지음
휴먼앤북스 / 9500원
나는 차양이 쳐진 야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집도 친구도 없는 완전히 낯선 도시였다. 한 여인이 내게 다가와 손금을 봐줄까? 라고 말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얼마쯤 막막했던 것도 같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몇 차례 내 손바닥을 신중하게 쓸어보던 집시여인이 가만히 내 손바닥을 오므려주곤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물고기 한 마리가 있구나. 만약 언젠가 네가 그걸 찾게 된다면 그건 황금으로 빛날 거야. 나는 아마 그 도시를 떠나면서 그 일을 잊었던 것 같다.
물고기. 아, 황금 물고기! 하고 다시 퍼뜩 떠올리게 된 건 이 책, 황시내의 ‘황금 물고기’를 만난 그 순간부터이다.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 잊고 있던 나의 많은 추억들, 한때 소중했으나 지금은 잊혀진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딸려 올라온다. 이런 이런, 대단한 글쟁이 하나를 만났다.
‘황금 물고기’는 독일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황시내의 첫 산문집이다. 20대 중반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쓴 여행기들, 미주 중앙일보와 몇몇 오프, 온라인 매체에 발표해온 글들을 묶은 이 책을 그냥 ‘산문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음악과 미술에 대한 지은이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때의 이 책은 특별한 선율이 있어 노래나 음악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느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잘 그린 그림처럼 보이며(실제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수록돼 있다) 청춘을 먼 이국 땅에서 홀로 보낸 한 여인의 개인적 고백, 생의 성찰을 그린 자서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싱싱하고 애틋한 글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잊고 있던 사람과 사물들이 저절로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이다.
‘황금 물고기’라는 제목을 지어준 이는 작가의 아버지, 우리들에게는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로 시작하는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의 시로 널리 알려진 황동규 시인이다.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쳐버려 지금껏 보지 못한 클레의 그림 ‘황금 물고기’,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우리 생의 열망 같은 것. 황시내의 할아버지가 황순원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그녀의 매끄럽고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 한 두 마디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툭툭 어루만지는 것 같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따로 배운 것이 아니라 생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습득된 거라는 게 깨달아진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그녀 말처럼 비밀스러운 것, 작고 애처롭고 어딘가 우수어린 울림을 가진 것이라면, 다소 수용적이면서도 쓸쓸하고 동시에 엄숙하면서도 내밀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찬 이 책 ‘황금 물고기’가 그렇다.
한 밤 기숙사의 ‘백 년 동안 복도를 비추었던 모든 햇살이 겹겹의 중국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져 봉해진 것 같은 두꺼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치는 서툰 피아노 소리를 몰래 듣곤 했던 이야기가 담긴 글 ‘그 해 봄밤의 중국 노래’를 읽을 적에는 나도 모르게 삐죽 눈물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낯선 도시에서의 산책과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니체와 빵 굽는 냄새와 맥주와 커피, 그리고 위안을 줄 줄 아는 책이다. 불행한 사람은 못 가진 것을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황시내를 만난 적 없지만, 그가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제법 자신 있게 단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물고기를 찾았을까, 어쩌면 한때 열렬히 꿈꾸었던 그 꿈들을 지금은 완전히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짐짓 반성을 해보기도 한다. ‘황금 물고기’를 읽는 것은 책장 속의 눌려진 꽃 이파리들, 그때 그 꽃잎을 책갈피에 끼울 때의 수줍고 순정했던 지난 마음들을 다시 여기로 불러내는 허밍의 시간이다. 여전히 겁 많고 생에 서툴기만 한 우리들에게, 마치 우연인 것처럼.
작가 조경란은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를 비롯해 장편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등을 펴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황시내 지음
휴먼앤북스 / 9500원
나는 차양이 쳐진 야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집도 친구도 없는 완전히 낯선 도시였다. 한 여인이 내게 다가와 손금을 봐줄까? 라고 말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얼마쯤 막막했던 것도 같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몇 차례 내 손바닥을 신중하게 쓸어보던 집시여인이 가만히 내 손바닥을 오므려주곤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물고기 한 마리가 있구나. 만약 언젠가 네가 그걸 찾게 된다면 그건 황금으로 빛날 거야. 나는 아마 그 도시를 떠나면서 그 일을 잊었던 것 같다.
물고기. 아, 황금 물고기! 하고 다시 퍼뜩 떠올리게 된 건 이 책, 황시내의 ‘황금 물고기’를 만난 그 순간부터이다.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 잊고 있던 나의 많은 추억들, 한때 소중했으나 지금은 잊혀진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딸려 올라온다. 이런 이런, 대단한 글쟁이 하나를 만났다.
‘황금 물고기’는 독일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황시내의 첫 산문집이다. 20대 중반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쓴 여행기들, 미주 중앙일보와 몇몇 오프, 온라인 매체에 발표해온 글들을 묶은 이 책을 그냥 ‘산문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음악과 미술에 대한 지은이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때의 이 책은 특별한 선율이 있어 노래나 음악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느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잘 그린 그림처럼 보이며(실제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수록돼 있다) 청춘을 먼 이국 땅에서 홀로 보낸 한 여인의 개인적 고백, 생의 성찰을 그린 자서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싱싱하고 애틋한 글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잊고 있던 사람과 사물들이 저절로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이다.
‘황금 물고기’라는 제목을 지어준 이는 작가의 아버지, 우리들에게는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로 시작하는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의 시로 널리 알려진 황동규 시인이다.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쳐버려 지금껏 보지 못한 클레의 그림 ‘황금 물고기’, 다다르고자 했으나 한 번도 이룰 수 없었던 우리 생의 열망 같은 것. 황시내의 할아버지가 황순원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그녀의 매끄럽고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 한 두 마디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툭툭 어루만지는 것 같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따로 배운 것이 아니라 생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습득된 거라는 게 깨달아진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그녀 말처럼 비밀스러운 것, 작고 애처롭고 어딘가 우수어린 울림을 가진 것이라면, 다소 수용적이면서도 쓸쓸하고 동시에 엄숙하면서도 내밀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찬 이 책 ‘황금 물고기’가 그렇다.
한 밤 기숙사의 ‘백 년 동안 복도를 비추었던 모든 햇살이 겹겹의 중국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져 봉해진 것 같은 두꺼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치는 서툰 피아노 소리를 몰래 듣곤 했던 이야기가 담긴 글 ‘그 해 봄밤의 중국 노래’를 읽을 적에는 나도 모르게 삐죽 눈물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낯선 도시에서의 산책과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니체와 빵 굽는 냄새와 맥주와 커피, 그리고 위안을 줄 줄 아는 책이다. 불행한 사람은 못 가진 것을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황시내를 만난 적 없지만, 그가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거라고 제법 자신 있게 단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물고기를 찾았을까, 어쩌면 한때 열렬히 꿈꾸었던 그 꿈들을 지금은 완전히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짐짓 반성을 해보기도 한다. ‘황금 물고기’를 읽는 것은 책장 속의 눌려진 꽃 이파리들, 그때 그 꽃잎을 책갈피에 끼울 때의 수줍고 순정했던 지난 마음들을 다시 여기로 불러내는 허밍의 시간이다. 여전히 겁 많고 생에 서툴기만 한 우리들에게, 마치 우연인 것처럼.
작가 조경란은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를 비롯해 장편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등을 펴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