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신문 좋은 나라”
2일부터 시작되는 제51회 신문 주간을 맞아 한국 신문협회 기자협회 편집인협회가 공보해서 선정한 표어다. “선진국일수록 신문을 많이 읽는 지식사회라는 점에서 우리도 신문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모 취지에 심시위원 전원이 공감”해서 선정한 표어라는 신문협회 홈페이지 설명이다. 썩 설득력이 있는 선정 설명 같지는 않지만 표어의 의미에는 이해가 간다. “좋은 신문”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일찍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문 <꽁바>를 창간한 용감한 언론인이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알베르 까뮈도 “한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 신문의 수준과 엇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한국의 실정을 신문의 수준과 비교한다면 한국 신문은 어떤 신문으로 평가 받을까? 유감스럽지만 “좋은 신문 좋은 나라” 등식은 아직은 한국 신문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표어는 앞으로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자는 신문인들의 결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문의 수준과 나라의 수준은 비례한다
세계적으로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 어느 때 보다 커지고 있는데 반해서 언론에 대한 사회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수년간 주류 보수신문의 신뢰 추락이 두드러진다.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즈 같은 권위지까지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있는 것처럼 보도해서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주류 신문과 지상파 텔레비전 사주들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 사르코지 내무장관과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저명한 정치평론가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떼에프(TF)1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자들의 기자 불신을 반영해서 대통령 후보와의 토론 프로 출연자들을 전원 기자 대신 <시민 기자="">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언론불신 시대다. 우리 주류신문들도 금년 대선 보도에 엄정 중립을 유지해서 참여정부 내내 비판 받아온 편파보도의 낙인을 지우는 호기로 삼을 것을 권하고 싶다.
신문이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보도하지 않고 논평이 균형을 잃고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틱의 언론전문가인 세르주 알리미는 신문이 신뢰를 잃고 있는 원인이 “보이지 않는 검열”에 있다고 보고 있다. 십여 년 전 동구에서 소련 공산체제가 붕괴되고 남미에서 독재 정권이 퇴장하면서 이제 검열은 사라지고 기자는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검열은 독재체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에도 언론 검열은 존재한다. 그 방법이 보다 <세련>돼서 밖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알리미는 민주국가의 신문이 독자와 사회의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검열”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새로 주목받는 보이지 않은 검열
“보이지 않는 검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문사 사주가 가하는 검열이다. 많은 사주가 민주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기능 실현 보다는 신문을 영리 추구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보도와 논평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주는 자신이나 기업에 이익이 되는 정보는 크게 보도하게 하고 자신이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정보는 보도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게 보도하게 한다. 기자의 자유는 자사와 사주의 이익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보 앞에서 멈춘다.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거짓말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신문의 신뢰를 떨어트리는 중대한 탈선이다.
두 번째는 광고주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다. 신문이 이익에 집착할수록 또는 신문의 영업 실적이 좋지 않아 광고의 필요성이 절실할수록 광고주의 “보이지 않는 검열”은 그 위력을 발휘한다. 세 번째는 정보를 상품으로 보는 시장 만능사상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이다. 뉴스를 상품으로 보는 만큼 신문도 일반상품처럼 시장논리에 다라 제작돼야 한다는 사상이다. 보도의 질보다는 판매량을 중시한다. 언론의 진정한 자유를 제한하는 사상이다. 사주나 편집인에게 항의해서 시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두 주저한다. 막강한 언론권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가도 언론자본이 소유한 방송국 스튜이오에 들어가면 목소리를 잃고 벙어리가 된다는 일화가 있다. 그 만큼 모두 언론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언론개혁 언론의 민주화가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이적 언론관 신문관은 언론의 민주화를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데 공감하는 언론인 지성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장행훈 신문발전위원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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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시민>꽁바>
2일부터 시작되는 제51회 신문 주간을 맞아 한국 신문협회 기자협회 편집인협회가 공보해서 선정한 표어다. “선진국일수록 신문을 많이 읽는 지식사회라는 점에서 우리도 신문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모 취지에 심시위원 전원이 공감”해서 선정한 표어라는 신문협회 홈페이지 설명이다. 썩 설득력이 있는 선정 설명 같지는 않지만 표어의 의미에는 이해가 간다. “좋은 신문”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일찍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신문 <꽁바>를 창간한 용감한 언론인이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알베르 까뮈도 “한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 신문의 수준과 엇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한국의 실정을 신문의 수준과 비교한다면 한국 신문은 어떤 신문으로 평가 받을까? 유감스럽지만 “좋은 신문 좋은 나라” 등식은 아직은 한국 신문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표어는 앞으로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자는 신문인들의 결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문의 수준과 나라의 수준은 비례한다
세계적으로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 어느 때 보다 커지고 있는데 반해서 언론에 대한 사회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수년간 주류 보수신문의 신뢰 추락이 두드러진다.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즈 같은 권위지까지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있는 것처럼 보도해서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주류 신문과 지상파 텔레비전 사주들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 사르코지 내무장관과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저명한 정치평론가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떼에프(TF)1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자들의 기자 불신을 반영해서 대통령 후보와의 토론 프로 출연자들을 전원 기자 대신 <시민 기자="">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언론불신 시대다. 우리 주류신문들도 금년 대선 보도에 엄정 중립을 유지해서 참여정부 내내 비판 받아온 편파보도의 낙인을 지우는 호기로 삼을 것을 권하고 싶다.
신문이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보도하지 않고 논평이 균형을 잃고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틱의 언론전문가인 세르주 알리미는 신문이 신뢰를 잃고 있는 원인이 “보이지 않는 검열”에 있다고 보고 있다. 십여 년 전 동구에서 소련 공산체제가 붕괴되고 남미에서 독재 정권이 퇴장하면서 이제 검열은 사라지고 기자는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검열은 독재체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에도 언론 검열은 존재한다. 그 방법이 보다 <세련>돼서 밖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알리미는 민주국가의 신문이 독자와 사회의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검열”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새로 주목받는 보이지 않은 검열
“보이지 않는 검열”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문사 사주가 가하는 검열이다. 많은 사주가 민주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기능 실현 보다는 신문을 영리 추구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보도와 논평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주는 자신이나 기업에 이익이 되는 정보는 크게 보도하게 하고 자신이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정보는 보도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게 보도하게 한다. 기자의 자유는 자사와 사주의 이익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보 앞에서 멈춘다.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거짓말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신문의 신뢰를 떨어트리는 중대한 탈선이다.
두 번째는 광고주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다. 신문이 이익에 집착할수록 또는 신문의 영업 실적이 좋지 않아 광고의 필요성이 절실할수록 광고주의 “보이지 않는 검열”은 그 위력을 발휘한다. 세 번째는 정보를 상품으로 보는 시장 만능사상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이다. 뉴스를 상품으로 보는 만큼 신문도 일반상품처럼 시장논리에 다라 제작돼야 한다는 사상이다. 보도의 질보다는 판매량을 중시한다. 언론의 진정한 자유를 제한하는 사상이다. 사주나 편집인에게 항의해서 시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두 주저한다. 막강한 언론권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가도 언론자본이 소유한 방송국 스튜이오에 들어가면 목소리를 잃고 벙어리가 된다는 일화가 있다. 그 만큼 모두 언론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언론개혁 언론의 민주화가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이적 언론관 신문관은 언론의 민주화를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데 공감하는 언론인 지성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장행훈 신문발전위원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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