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마을에 핀 공연문화
삼지연군에서 특이한 것은 산골마을에도 공연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일행의 방문으로 급조된 공연단이 아닌 양강도 성인공연과 삼지연 소년궁전의 학생공연은 참으로 감명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양강도 공연단의 공연이 끝나자 문호근 단장이 단상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고 문익환 목사님의 장남으로 그가 소개됐다. 그러자마자 공연단이 모두 몰려와 그를 얼싸안았고 우리는 모두 그를 단상으로 초청하여 그의 노래를 들었다. 감독이 아닌 가수로 데뷔한 민족시인의 아들은 이인모 선생을 북으로 보낸 한완상 전부총리와 함께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성숙한 시민의식
2차대전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수차례 전쟁을 하는등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나라이다. 프랑스인은 독일에 오면 샹송을 부르지만 독일인은 프랑스에 가도 리드를 부르는 것을 삼갈 정도로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한다. 그러한 서독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통일을 성사시켜 10주년을 맞게됐다. 남북한의 최초 민간교류를 성사시키려고 갔던 우리 개개인도 이러한 성숙한 모습을 북녘 동포에게 보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 방문단은 22일부터 28일까지 백두산을 관광한다는 신변보장각서 통지문만을 받고 통일부의 북한방문증을 목에 걸고 평양에 도착했다. 자세한 일정이 협의되지 않았다는 것은 백두산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서둘러 출발하게 되었고 당연히 도착하면 평양을 포함한 전일정을 배포받을 줄 알았으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측의 사전협의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여행목적이 일치할 리 없는 다양한 구성원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측의 관광개념은 학습차원에서 전적지를 답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우리들이었다. 우리도 전에는 수학여행이 관광의 전부였던 것을 연상시킨다. 최소한 평양은 보고서야 돌아가겠다는 우리의 요청을 북측이 받아들였고 묘향산의 향산호텔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향산호텔에서의 풍성한 대접과 그 유명한 서산대사가 생애의 후반을 보낸 보현사까지 관람하게 되자 일행의 불만은 사라졌다.
통일위한 사려깊은 배려
편안한 여행을 위하여 민화협 김령성 부회장을 비롯한 여러 간부들의 우리 일행에 대한 배려와 환대는 극진하기 그지없었다. 김 부회장은 평양을 시작으로 우리 일행이 대한항공기를 탑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사회자로 몇 차례는 웅변으로, 가끔씩은 해설자로 공식 비공식으로 우리를 대했다. 김 부회장은 외교관계는 물론 역사와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학식을 지닌 중후한 멋쟁이였다. 그분은 전일정을 우리와 함께 하며 내내 미소를 잃지 않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 주었다.
특히 우리 일행중 두분의 교수가 뜻깊은 회갑을 백두산에서, 통일부 사무관이 평양에서 생일을 맞게돼 이번 방문을 더욱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었다. 동아대 손해식 교수와 서울대 안휘준 교수님이 하루사이로 회갑을 백두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김 부회장은 그 두 분들에게 일생일대의 회갑을 김정일 위원장의 이름으로 정성을 다해 축하해주어 우리 일행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뿐아니라 통일부의 황사무관에게는 평양의 옥류관에서 생일파티를 열어줄 정도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같은 날 평양과 서울 두 곳에서 생일축하를 받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맏형처럼 따뜻하고 식견이 높은 관광총국의 황봉택 처장은 우리를 감동시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직책상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꼭 필요한 시점에서만 중간중간 관광현황을 우리에게 해설해주었다. 버스가 서고 휴식시간이면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오히려 일행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를 꼭 확인하기도 했다. 한 번은 관광자원 해설을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는…"이라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아, 우리 나라라는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라고 즉각 자신의 말을 고쳐나갈 정도로 신중함을 보여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림대 국제대학원 관광학과)
삼지연군에서 특이한 것은 산골마을에도 공연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일행의 방문으로 급조된 공연단이 아닌 양강도 성인공연과 삼지연 소년궁전의 학생공연은 참으로 감명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양강도 공연단의 공연이 끝나자 문호근 단장이 단상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고 문익환 목사님의 장남으로 그가 소개됐다. 그러자마자 공연단이 모두 몰려와 그를 얼싸안았고 우리는 모두 그를 단상으로 초청하여 그의 노래를 들었다. 감독이 아닌 가수로 데뷔한 민족시인의 아들은 이인모 선생을 북으로 보낸 한완상 전부총리와 함께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성숙한 시민의식
2차대전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수차례 전쟁을 하는등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나라이다. 프랑스인은 독일에 오면 샹송을 부르지만 독일인은 프랑스에 가도 리드를 부르는 것을 삼갈 정도로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한다. 그러한 서독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통일을 성사시켜 10주년을 맞게됐다. 남북한의 최초 민간교류를 성사시키려고 갔던 우리 개개인도 이러한 성숙한 모습을 북녘 동포에게 보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 방문단은 22일부터 28일까지 백두산을 관광한다는 신변보장각서 통지문만을 받고 통일부의 북한방문증을 목에 걸고 평양에 도착했다. 자세한 일정이 협의되지 않았다는 것은 백두산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서둘러 출발하게 되었고 당연히 도착하면 평양을 포함한 전일정을 배포받을 줄 알았으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측의 사전협의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여행목적이 일치할 리 없는 다양한 구성원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측의 관광개념은 학습차원에서 전적지를 답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우리들이었다. 우리도 전에는 수학여행이 관광의 전부였던 것을 연상시킨다. 최소한 평양은 보고서야 돌아가겠다는 우리의 요청을 북측이 받아들였고 묘향산의 향산호텔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향산호텔에서의 풍성한 대접과 그 유명한 서산대사가 생애의 후반을 보낸 보현사까지 관람하게 되자 일행의 불만은 사라졌다.
통일위한 사려깊은 배려
편안한 여행을 위하여 민화협 김령성 부회장을 비롯한 여러 간부들의 우리 일행에 대한 배려와 환대는 극진하기 그지없었다. 김 부회장은 평양을 시작으로 우리 일행이 대한항공기를 탑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사회자로 몇 차례는 웅변으로, 가끔씩은 해설자로 공식 비공식으로 우리를 대했다. 김 부회장은 외교관계는 물론 역사와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학식을 지닌 중후한 멋쟁이였다. 그분은 전일정을 우리와 함께 하며 내내 미소를 잃지 않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 주었다.
특히 우리 일행중 두분의 교수가 뜻깊은 회갑을 백두산에서, 통일부 사무관이 평양에서 생일을 맞게돼 이번 방문을 더욱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었다. 동아대 손해식 교수와 서울대 안휘준 교수님이 하루사이로 회갑을 백두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김 부회장은 그 두 분들에게 일생일대의 회갑을 김정일 위원장의 이름으로 정성을 다해 축하해주어 우리 일행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뿐아니라 통일부의 황사무관에게는 평양의 옥류관에서 생일파티를 열어줄 정도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같은 날 평양과 서울 두 곳에서 생일축하를 받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맏형처럼 따뜻하고 식견이 높은 관광총국의 황봉택 처장은 우리를 감동시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직책상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꼭 필요한 시점에서만 중간중간 관광현황을 우리에게 해설해주었다. 버스가 서고 휴식시간이면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오히려 일행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를 꼭 확인하기도 했다. 한 번은 관광자원 해설을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는…"이라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아, 우리 나라라는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라고 즉각 자신의 말을 고쳐나갈 정도로 신중함을 보여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림대 국제대학원 관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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