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파병이후 고엽제 후유증으로 30여년 시름하던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미망인
이 된 안숙자(55)씨.
안씨는 얼마 안되는 연금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남편을 떠나보낸 한국보훈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
고 있다. “구석구석 돌아보면 남편의 흔적이 묻어있어요. 가슴은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라
며 “벽돌을 다시 나르려고도 했으나 이젠 몸이 예전같지 않아 이곳에 남편과 그 전우들을 생각하며
남기로 한 거죠”라고 말했다.
안씨는 남편이 2000년 1월 1일 뇌사상태에 빠지기 전만 하더라도 (50이 넘은 나이에)막노동판에서 벽
돌을 나르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가 나른 벽돌로 남편 치료비를 대고, 3남매를 키우는 등 생활을 꾸
려나갈 수 있었다.
지금이야 두 딸을 시집보내고, 막내 아들도 어였하게 성장시켰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지난날들이 한스럽기도 하다.
안씨는 “내가 아무리 힘든 나날을 살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남편이 떠나갔고, 지나간 세월이 됐어
요. 그래서 말로나마 과거를 회상할 수 있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기가 막힐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했다.
“고엽제 환자들이 제일 불쌍해요. 나라를 위해 외국전쟁터까지 나가 병을 얻었는데, 국가에서 그들
에게 해주는 게 무엇이죠?”라고 반문한 안씨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는커녕 후유증으로 의심이
간다며 후유의증이라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7만여명에 이릅니다”고 토로했다. 치료비마저 자기 사
비로 충당하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피부병으로 후유의증 판정을 받았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합병증이라 하더라도 피부병이외
치료는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몸이 망가진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사회적 활동도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나마 안씨는 남편이 93년 국가유공자 2등급을 받아 적은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생활을 위
해, 또 그마저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벽돌을 날랐다.
안씨는 원래 공무원 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공무원들도 의무적(?)으로 월남 파병 군인들에게 위문
편지를 쓰곤 했는데, 제 편지를 남편이 받았었나봐요. 어느날 제게 찾아와 만나게 됐고, 우린 결혼했
습니다”고 회고했다.
결혼 직후 3∼4년은 남들과 다름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
나지를 못하더니 하반신 마비가 왔고,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그후 병원에 57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결국 막판에는 식물인간이 돼 하루하루 연명, 지난해 8
월 이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국가유공자 대우도 못 받으며 살아가는 고엽제 환자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는 가정파탄까
지 발생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답니다. 그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요양소라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곳에서 그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이 된 안숙자(55)씨.
안씨는 얼마 안되는 연금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남편을 떠나보낸 한국보훈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
고 있다. “구석구석 돌아보면 남편의 흔적이 묻어있어요. 가슴은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라
며 “벽돌을 다시 나르려고도 했으나 이젠 몸이 예전같지 않아 이곳에 남편과 그 전우들을 생각하며
남기로 한 거죠”라고 말했다.
안씨는 남편이 2000년 1월 1일 뇌사상태에 빠지기 전만 하더라도 (50이 넘은 나이에)막노동판에서 벽
돌을 나르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가 나른 벽돌로 남편 치료비를 대고, 3남매를 키우는 등 생활을 꾸
려나갈 수 있었다.
지금이야 두 딸을 시집보내고, 막내 아들도 어였하게 성장시켰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지난날들이 한스럽기도 하다.
안씨는 “내가 아무리 힘든 나날을 살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남편이 떠나갔고, 지나간 세월이 됐어
요. 그래서 말로나마 과거를 회상할 수 있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기가 막힐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했다.
“고엽제 환자들이 제일 불쌍해요. 나라를 위해 외국전쟁터까지 나가 병을 얻었는데, 국가에서 그들
에게 해주는 게 무엇이죠?”라고 반문한 안씨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는커녕 후유증으로 의심이
간다며 후유의증이라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7만여명에 이릅니다”고 토로했다. 치료비마저 자기 사
비로 충당하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피부병으로 후유의증 판정을 받았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합병증이라 하더라도 피부병이외
치료는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몸이 망가진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사회적 활동도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나마 안씨는 남편이 93년 국가유공자 2등급을 받아 적은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생활을 위
해, 또 그마저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벽돌을 날랐다.
안씨는 원래 공무원 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공무원들도 의무적(?)으로 월남 파병 군인들에게 위문
편지를 쓰곤 했는데, 제 편지를 남편이 받았었나봐요. 어느날 제게 찾아와 만나게 됐고, 우린 결혼했
습니다”고 회고했다.
결혼 직후 3∼4년은 남들과 다름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
나지를 못하더니 하반신 마비가 왔고,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그후 병원에 57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결국 막판에는 식물인간이 돼 하루하루 연명, 지난해 8
월 이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국가유공자 대우도 못 받으며 살아가는 고엽제 환자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는 가정파탄까
지 발생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답니다. 그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요양소라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곳에서 그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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