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아비’의 후회
이 창 훈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어리석은 아비’는 끝내 구속됐다. 그는 ‘일시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과오를 후회했다. 폭행당해 피흘리는 아들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사적인 복수에 나서고 싶었던 아비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아들을 폭행한 자들의 삶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게 범상한 일이라면 주먹에 맞는 일 또한 범상한 일이어야 마땅하다. 때렸다면 맞을 수도 있어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건 이념적으로만 그렇다. 아비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심정까지만 그렇다.
분노를 폭발시켜 사적으로 복수를 실현하는 아비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아들을 위한 아비의 사적인 복수의 결행은 정당한 법적 응징이 불가능해서 사적인 복수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참담한 경우와 같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드물게 현실이 된다. 이 때도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비장한 각오는 필연적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거나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건 단지 비열한 보복에 지나지 않는다. 비열한 보복은 조폭의 세계에서 흔한 일이다.
‘전장’수습에 실패한 ‘전사’
대체로 이성적인 사람은 격정을 제어하는 이성의 힘 때문에 사적인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격정적인 사람이라도 이성이 없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은 특정한 사건이나 자극에 대한 반응도 자기중심적이어서 그의 격정조차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긴다. 타인과 수평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환경은 자폐적이다. 격정을 보편적인 것이라 믿는 한 그 격정을 현실화함에 있어 이성은 무력하다. ‘어리석은 아비’도 그러했던 걸까.
상당한 범위의 타인에 대하여 자발적 성격의 강제를 행사할 수 있는 수직적 위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신분적’으로 사고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는 그의 위계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타인에게도 그의 권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런 전근대적 신분의식이 강고하다면, 함부로 ‘내 핏줄’에 손을 대는 ‘천한 것들’은 당연히 가혹한 응징의 대상이 된다. ‘어리석은 아비’도 그러했던 걸까. 그리고 그는 ‘천한 것들’을 응징함에 있어 사적 충성의 동원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친국(親鞫)’에 나섰던 걸까.
아니면, 그는 ‘사나이’로서 스스로 ‘전사’가 되기를 자처했던 걸까. 그러나 이 ‘전사’는 용맹하지 않았다. 사적 충성을 동원하여 그 위세를 내세워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전장에 나선 ‘전사’는 이미 그 자체로 정당하다 할 수 없다.
어찌되었건 이 ‘전사’는 ‘전장’의 수습에 실패했다. 이 실패는 정당하지 못함의 결과다. 그에게는 애당초 ‘모든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비장한 각오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해명과 뒤늦은 사과에 바쁘다.
칸트는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걸 ‘분석판단’이라고 했다. ‘미인은 예쁘다’라는 명제는 분석판단이다. 분석판단은 선험적이다. 선험적이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재벌그룹 회장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어떤가. ‘재벌그룹 회장’이라는 주어를 아무리 분석해도 ‘나쁘다’는 건 알 수 없다. 이 명제는 선험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의 추이를 보면서 혹시 우리 사회는 이 명제를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니면 이 사건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명제를 선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의문이 든다.
지위 남용과 사적 복수
‘어리석은 아비’의 사적인 복수는 어떤 아비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재벌그룹 회장’의 지위에서 그 지위를 남용하여 어떤 아비의 사적 복수를 실행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떤 아비는 나쁘다’라는 경험적 명제는 ‘재벌그룹 회장은 나쁘다’라는 명제로 비화되고, 이 명제는 다시 ‘재벌그룹은 나쁘다’라는 명제로까지 비화되어, 자칫 그 모든 명제를 선험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될 위험성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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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 훈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어리석은 아비’는 끝내 구속됐다. 그는 ‘일시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과오를 후회했다. 폭행당해 피흘리는 아들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사적인 복수에 나서고 싶었던 아비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아들을 폭행한 자들의 삶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게 범상한 일이라면 주먹에 맞는 일 또한 범상한 일이어야 마땅하다. 때렸다면 맞을 수도 있어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건 이념적으로만 그렇다. 아비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심정까지만 그렇다.
분노를 폭발시켜 사적으로 복수를 실현하는 아비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아들을 위한 아비의 사적인 복수의 결행은 정당한 법적 응징이 불가능해서 사적인 복수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참담한 경우와 같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드물게 현실이 된다. 이 때도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비장한 각오는 필연적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거나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건 단지 비열한 보복에 지나지 않는다. 비열한 보복은 조폭의 세계에서 흔한 일이다.
‘전장’수습에 실패한 ‘전사’
대체로 이성적인 사람은 격정을 제어하는 이성의 힘 때문에 사적인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격정적인 사람이라도 이성이 없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은 특정한 사건이나 자극에 대한 반응도 자기중심적이어서 그의 격정조차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긴다. 타인과 수평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환경은 자폐적이다. 격정을 보편적인 것이라 믿는 한 그 격정을 현실화함에 있어 이성은 무력하다. ‘어리석은 아비’도 그러했던 걸까.
상당한 범위의 타인에 대하여 자발적 성격의 강제를 행사할 수 있는 수직적 위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신분적’으로 사고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는 그의 위계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타인에게도 그의 권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런 전근대적 신분의식이 강고하다면, 함부로 ‘내 핏줄’에 손을 대는 ‘천한 것들’은 당연히 가혹한 응징의 대상이 된다. ‘어리석은 아비’도 그러했던 걸까. 그리고 그는 ‘천한 것들’을 응징함에 있어 사적 충성의 동원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친국(親鞫)’에 나섰던 걸까.
아니면, 그는 ‘사나이’로서 스스로 ‘전사’가 되기를 자처했던 걸까. 그러나 이 ‘전사’는 용맹하지 않았다. 사적 충성을 동원하여 그 위세를 내세워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전장에 나선 ‘전사’는 이미 그 자체로 정당하다 할 수 없다.
어찌되었건 이 ‘전사’는 ‘전장’의 수습에 실패했다. 이 실패는 정당하지 못함의 결과다. 그에게는 애당초 ‘모든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비장한 각오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해명과 뒤늦은 사과에 바쁘다.
칸트는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걸 ‘분석판단’이라고 했다. ‘미인은 예쁘다’라는 명제는 분석판단이다. 분석판단은 선험적이다. 선험적이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재벌그룹 회장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어떤가. ‘재벌그룹 회장’이라는 주어를 아무리 분석해도 ‘나쁘다’는 건 알 수 없다. 이 명제는 선험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의 추이를 보면서 혹시 우리 사회는 이 명제를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니면 이 사건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명제를 선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의문이 든다.
지위 남용과 사적 복수
‘어리석은 아비’의 사적인 복수는 어떤 아비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재벌그룹 회장’의 지위에서 그 지위를 남용하여 어떤 아비의 사적 복수를 실행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떤 아비는 나쁘다’라는 경험적 명제는 ‘재벌그룹 회장은 나쁘다’라는 명제로 비화되고, 이 명제는 다시 ‘재벌그룹은 나쁘다’라는 명제로까지 비화되어, 자칫 그 모든 명제를 선험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될 위험성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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