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힘 보탠 ‘까까머리’ 시위
87년 3월 진주 대아고 학생들 ‘학내 민주화’ 요구 ‘눈길’
87년 2월7일 당시 대학생이던 박종철군이 경찰청 공안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이후 국민들의 폭발하는 분노와 이를 짓누르려는 군사정권의 억압으로 정국은 팽팽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이 얼음을 깬 것은 지방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87년 3월10일 진주대아고 학생 1000여명은 ‘학생회장 직선제와 민주적 운영’ ‘보충수업비 횡령의혹 해명’을 요구하며 교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은 곧 전국 대학교의 대자보를 통해 알려졌고 대학생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군사정권 당시 없었던 일이었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공안경찰을 통해 학생들을 탄압했고 ‘배후에 간첩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위협했다.
결국 경찰의 대대적 단속으로 시위 학생 2명이 제적되고 7명은 징계받은 후 자퇴했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아고 학생회장은 87년부터 직선제로 선출됐다.
이후 민주화가 됐지만 이들의 민주화운동은 세월에 묻혔다. 이들은 그 후 아직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 모두들 피나는 노력으로 사회의 중견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당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창원 원종태 기자 jtw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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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3월 진주 대아고 학생들 ‘학내 민주화’ 요구 ‘눈길’
87년 2월7일 당시 대학생이던 박종철군이 경찰청 공안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이후 국민들의 폭발하는 분노와 이를 짓누르려는 군사정권의 억압으로 정국은 팽팽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이 얼음을 깬 것은 지방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87년 3월10일 진주대아고 학생 1000여명은 ‘학생회장 직선제와 민주적 운영’ ‘보충수업비 횡령의혹 해명’을 요구하며 교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은 곧 전국 대학교의 대자보를 통해 알려졌고 대학생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군사정권 당시 없었던 일이었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공안경찰을 통해 학생들을 탄압했고 ‘배후에 간첩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위협했다.
결국 경찰의 대대적 단속으로 시위 학생 2명이 제적되고 7명은 징계받은 후 자퇴했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아고 학생회장은 87년부터 직선제로 선출됐다.
이후 민주화가 됐지만 이들의 민주화운동은 세월에 묻혔다. 이들은 그 후 아직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 모두들 피나는 노력으로 사회의 중견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당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창원 원종태 기자 jtw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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