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고도 사마르칸드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차가 도착한 타스칸에서는 현지의 유명한 중국식당인 신상하이주점이 대원들을 흥분시켰다. 타스칸은 우즈베키스탄어로 ‘돌도시’라는 뜻이다.
거대한 돌들이 많아 그 같이 불리는데 역시 돌로 만든 분수, 극장, 박물관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분수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아 이 아름다운 도시에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저라푸상강 계곡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티무르제국의 시조인 티무르대제(1336~1405)의 능이 있는 곳이다. 제국 시기에 건설된 수많은 궁전과 능묘 중 그의 능이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티무르대제의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레키스탄’ 신학원과 티무르대제의 왕비와 아들의 묘가 있다. 거대한 신학원 건물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사마르칸트 고성유적 옆에는 실크로드의 유명한 중화문 유적이 있는데 현재는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이곳 박물관이 현지에서 출토된 문물과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영웅을 숭상하는 텔메츠
텔메츠는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무강 지역에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해 있다. 중국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 정벌에 나설 때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사마르칸트의 통치자 티무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독특한 문화와 건축스타일, 건축학유파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현장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제샹나국’이라 적었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새로 결혼한 사람은 반드시 현지의 명승지나 열사기념비를 찾아 예배를 드리거나 영웅의 조각상을 찾아 의식을 치르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두 팀의 신혼부부가 티무르성곽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테먼관은 우즈베키스탄 카스피해 서안, 코카서스 이남의 달반트 부근의 산 입구에 있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에도 좌우에 산이 이어져 있고 산세가 매우 험준한 곳이다. 산 입구에는 문이 설치돼 있고 문에는 수많은 쇠방울이 달려있어 ‘테먼(철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세는 여전히 험준하지만 현장법사가 당시 매우 좁은 길이라고 칭했던 곳은 이미 도로로 바뀌었다.
이어 현장법사가 저밀국이라 부른 텔메츠 고성을 지나 우즈벡을 뒤로 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평화의 땅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테러활동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폭발, 사망, 위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진실한 면은 베일에 가려졌고 공포스럽고도 신비스럽게 변화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라이즈 의원이 우리를 위해 경호팀을 조직해주어, 우리는 네 대의 차에 20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구형 총을 메고 칼을 찼으며 어떤 이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검문소는 오직 세 종류의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유엔원조기구 인원, 군대, 그리고 특별히 허가된 언론인이다.
때문에 중-우 우호협회의 옌라오용 주석이 기자증명서를 발급해주어, 일행은 통관검역을 마친 후 우즈벡과 아프간 사이의 ‘우의교’를 건넜다.
그날의 목적지는 카불이었는데 도중에 해발 3000m의 힌두쿠스산을 넘어야 했다. 긴 풀이 자라지 않는 산에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물 옆에 초지가 있고 산양과 낙타가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아프가니스탄 남부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전운 속에 통과한 카이볼 고개
우리는 카불을 출발해 미군과 유엔군, 아프간군의 기지를 줄곧 지나갔다. 모든 곳에서 경비가 삼엄했다.
입구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고 도중에 완전무장한 ‘험머(미군차량)’가 때때로 길을 지나갔고 무장헬기가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힌두쿠스 산맥의 중요한 고개인 유명한 카이볼 고개를 통과해야 한다.
지형은 매우 험하며 오사마 빈 라덴이 이곳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험난한 산길을 지나 무사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파키스탄 땅을 밟으니 이국적인 우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사와, 간다라 불교의 발원지
서기 2세기, 가니스가왕은 바이사와에 도읍을 건설하고 불상석조를 위주로 한 간다라불교문화를 창조했다.
왕조의 변천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가 바이사와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곳을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현장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바이사와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으며 대당서역기에서 바이사와를 ‘꽃과 열매가 무성한천국의 나라’로 묘사했다. 바이사와는 산스크리트어로 ‘백가지 꽃의 도시’라는 뜻.
바이사와 현지의 주요민족인 파탄족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의 하나로 모두들 몸매가 늠름하다. 몇 세기 동안 수많은 파탄족은 그들의 명예로운 규칙을 지켜왔다.
충성과 용감함, 보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파탄족이 거주하는 부락지역은 파키스탄 국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으로 파탄족의 부락규칙만이 통용된다.
하지만 바이사와 박물관에는 일대의 사원에서 수집한 불상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색은 선명하고 표정은 비감하거나 평안하다. 바이사와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지역은 고도유적지 ‘차사다’로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이지만 지금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 있다.
대신 인근 탁트이바이에는 사원 유적이 남아 있어, 1980년 최대의 간다라 불교유적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탁시라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바이사와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182km인데 차량대열이 이 길을 지나는 데 아홉시간이 걸렸다. 불교 유적지가 너무 많아 차마 빨리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사와를 출발한 차량대열은 카불강과 인도강이 합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실크로드에서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의 하나이다. 현장법사는 당시 이곳 부근에서 출발해 인도강을 건넜다.
탁시라 유적지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서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2500년전에 건설된 고도이다.
견고하면서도 크고 높은 성곽과 정교한 불탑, 금옥이 휘황찬란한 사원과 사실적인 인물조각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이 도시의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장법사는 탁시라에서 2년을 거주했고 설법을 강연하여 현지인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도 현장법사와 관련해 신기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졸리안 불교유적지는 현장법사가 오래 설법한 곳으로 당시 남아시아 불교도들까지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유적지에 들어서니 긴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일행을 인도해 수많은 스님들의 좌대를 지나 비교적 큰 좌대 앞에 도착해 완벽하게 보존된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가 바로 현장법사였다.
정리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중국망 취재진은 중국 시안에서 인도 나란타까지, 1300년 전 불법을 얻고자 현장 법사가 떠난 서역기행을 그대로 따라가며 저 위대한 고승의 자취를 기록했다. 현장법사가 걸어간 길의 총연장은 무려 2만5000km로 이른바 실크로드라 불리는 동서횡단로가 이에해당한다. 본지는 이 기록의 일부를 세 번에 나누어 싣는다. 전문과 관련 사진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망 한국어판 홈페이지에 전자책으로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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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차가 도착한 타스칸에서는 현지의 유명한 중국식당인 신상하이주점이 대원들을 흥분시켰다. 타스칸은 우즈베키스탄어로 ‘돌도시’라는 뜻이다.
거대한 돌들이 많아 그 같이 불리는데 역시 돌로 만든 분수, 극장, 박물관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분수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아 이 아름다운 도시에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저라푸상강 계곡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티무르제국의 시조인 티무르대제(1336~1405)의 능이 있는 곳이다. 제국 시기에 건설된 수많은 궁전과 능묘 중 그의 능이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티무르대제의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레키스탄’ 신학원과 티무르대제의 왕비와 아들의 묘가 있다. 거대한 신학원 건물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사마르칸트 고성유적 옆에는 실크로드의 유명한 중화문 유적이 있는데 현재는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이곳 박물관이 현지에서 출토된 문물과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영웅을 숭상하는 텔메츠
텔메츠는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무강 지역에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해 있다. 중국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 정벌에 나설 때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사마르칸트의 통치자 티무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독특한 문화와 건축스타일, 건축학유파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현장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제샹나국’이라 적었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새로 결혼한 사람은 반드시 현지의 명승지나 열사기념비를 찾아 예배를 드리거나 영웅의 조각상을 찾아 의식을 치르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두 팀의 신혼부부가 티무르성곽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테먼관은 우즈베키스탄 카스피해 서안, 코카서스 이남의 달반트 부근의 산 입구에 있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에도 좌우에 산이 이어져 있고 산세가 매우 험준한 곳이다. 산 입구에는 문이 설치돼 있고 문에는 수많은 쇠방울이 달려있어 ‘테먼(철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세는 여전히 험준하지만 현장법사가 당시 매우 좁은 길이라고 칭했던 곳은 이미 도로로 바뀌었다.
이어 현장법사가 저밀국이라 부른 텔메츠 고성을 지나 우즈벡을 뒤로 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평화의 땅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테러활동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폭발, 사망, 위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진실한 면은 베일에 가려졌고 공포스럽고도 신비스럽게 변화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라이즈 의원이 우리를 위해 경호팀을 조직해주어, 우리는 네 대의 차에 20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구형 총을 메고 칼을 찼으며 어떤 이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검문소는 오직 세 종류의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유엔원조기구 인원, 군대, 그리고 특별히 허가된 언론인이다.
때문에 중-우 우호협회의 옌라오용 주석이 기자증명서를 발급해주어, 일행은 통관검역을 마친 후 우즈벡과 아프간 사이의 ‘우의교’를 건넜다.
그날의 목적지는 카불이었는데 도중에 해발 3000m의 힌두쿠스산을 넘어야 했다. 긴 풀이 자라지 않는 산에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물 옆에 초지가 있고 산양과 낙타가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아프가니스탄 남부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전운 속에 통과한 카이볼 고개
우리는 카불을 출발해 미군과 유엔군, 아프간군의 기지를 줄곧 지나갔다. 모든 곳에서 경비가 삼엄했다.
입구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고 도중에 완전무장한 ‘험머(미군차량)’가 때때로 길을 지나갔고 무장헬기가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힌두쿠스 산맥의 중요한 고개인 유명한 카이볼 고개를 통과해야 한다.
지형은 매우 험하며 오사마 빈 라덴이 이곳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험난한 산길을 지나 무사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파키스탄 땅을 밟으니 이국적인 우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사와, 간다라 불교의 발원지
서기 2세기, 가니스가왕은 바이사와에 도읍을 건설하고 불상석조를 위주로 한 간다라불교문화를 창조했다.
왕조의 변천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가 바이사와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곳을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현장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바이사와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으며 대당서역기에서 바이사와를 ‘꽃과 열매가 무성한천국의 나라’로 묘사했다. 바이사와는 산스크리트어로 ‘백가지 꽃의 도시’라는 뜻.
바이사와 현지의 주요민족인 파탄족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의 하나로 모두들 몸매가 늠름하다. 몇 세기 동안 수많은 파탄족은 그들의 명예로운 규칙을 지켜왔다.
충성과 용감함, 보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파탄족이 거주하는 부락지역은 파키스탄 국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으로 파탄족의 부락규칙만이 통용된다.
하지만 바이사와 박물관에는 일대의 사원에서 수집한 불상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색은 선명하고 표정은 비감하거나 평안하다. 바이사와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지역은 고도유적지 ‘차사다’로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이지만 지금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 있다.
대신 인근 탁트이바이에는 사원 유적이 남아 있어, 1980년 최대의 간다라 불교유적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탁시라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바이사와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182km인데 차량대열이 이 길을 지나는 데 아홉시간이 걸렸다. 불교 유적지가 너무 많아 차마 빨리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사와를 출발한 차량대열은 카불강과 인도강이 합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실크로드에서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의 하나이다. 현장법사는 당시 이곳 부근에서 출발해 인도강을 건넜다.
탁시라 유적지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서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2500년전에 건설된 고도이다.
견고하면서도 크고 높은 성곽과 정교한 불탑, 금옥이 휘황찬란한 사원과 사실적인 인물조각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이 도시의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장법사는 탁시라에서 2년을 거주했고 설법을 강연하여 현지인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도 현장법사와 관련해 신기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졸리안 불교유적지는 현장법사가 오래 설법한 곳으로 당시 남아시아 불교도들까지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유적지에 들어서니 긴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일행을 인도해 수많은 스님들의 좌대를 지나 비교적 큰 좌대 앞에 도착해 완벽하게 보존된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가 바로 현장법사였다.
정리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중국망 취재진은 중국 시안에서 인도 나란타까지, 1300년 전 불법을 얻고자 현장 법사가 떠난 서역기행을 그대로 따라가며 저 위대한 고승의 자취를 기록했다. 현장법사가 걸어간 길의 총연장은 무려 2만5000km로 이른바 실크로드라 불리는 동서횡단로가 이에해당한다. 본지는 이 기록의 일부를 세 번에 나누어 싣는다. 전문과 관련 사진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망 한국어판 홈페이지에 전자책으로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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