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한 세대가 흘렀다. 80년 5월, 홍인화씨는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전남도청으로 뛰어갔던 겁 없는 소녀는 27년이 지난 지금 당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두고 있는 어머니가 됐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상에 대한 고민은 여고시절 자신만큼이나 치열한 딸과 어머니가 광주 5·18 민중항쟁 27주년을 맞아 함께 부르는 희망가를 들었다.
내일: 홍의원은 80년 5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시위에 나섰는가?
홍인화(홍): 5·18일 발발하고 19일에 휴교령이 내렸다. 곳곳에서 누가 조사를 받았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마음에 도청에도 자주 나갔다. 집에서는 알 수 없도록 몰래몰래 시위에 참여했다.
내일: 80년 당시 홍의원과 지금의 은진 양의 꿈은 무엇인가?
홍: 집에서는 의대나 약대 진학을 희망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조총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묶여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피해가 이과계로의 진학을 희망하게 한 것 같다.
장은진(장): 사회와 직접 소통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아직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80년 이후 부모님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걷고 싶다.
홍: 부모 입장에서는 가끔씩 아이의 그런 꿈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리고도 싶지만 지역과 역사, 세계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적극 후원할 생각이다.
내일: 80년과 비교했을 때 지금 학생들은 어떤 것 같은가?
장: 나와 비슷한 나이에 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활동한 것이 대단하다. 목숨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로 뛰어든 것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난 당시로 가서 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친구들도 부모님 세대에 비해 사회고민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활동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
친구들과 함께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홍: 딸과 고등학교 생활의 공통점이 있다면 ‘독서모임’을 했다는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던 학교별 독서토론회에 참여했었다. 은진이가 나보다 더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라 고민이기도 하다.(웃음)
내일: 80년 5월이 꿈 많은 여고시절이었는데
홍: 학교보다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많아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터질듯 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면서 5·18을 경험한 것에 대한 뿌듯함과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경험은 나를 염세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주위 선배들의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길과 답이 있었는데 끝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 어머니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일부는 정리된 부분도 있지만 고등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위치와 지적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너무 뻔한 것이라 마찰이 생길 때도 있다.
홍: 고민은 짧게 했으면 한다. 점수나 진학 등 현실적인 부분에서 얘기를 시작하면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고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것을 군소리 하나 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장: 어머니의 학교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해도 친구들끼리 잘 통하지 않는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자유와 민주를 고민하는 시기였고 지금은 누리는 시기이니 생활과 밀접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라고 본다.
내일: 시위대 중 대다수가 도망하고 그 중 지식인이라던 대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홍: 도망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5·18의 공로가 있다. 5·18은 끝까지 남아 도청을 사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의 상이자 움직임이다.
장: 처음에는 순수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면 모두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정신의 위기는 함께 융합시켜 함께 가는 방향으로 해결됐으면 한다. 순수하더라도 사회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에서 어떻게 녹일 것인가가 항상 고민이다.
내일: 27년의 간극에서 5월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홍: 5·18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당시에 참여했건 아니건, 살거나 죽었거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대구와 부산 등 동서의 화합과 남북의 화합을 통해 세계화로 가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27년의 간극이 희생과 아픔을 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장: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희망이 소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고민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광주정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보다 진짜 의미를 찾아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데 반석이 되길 바란다.
내일: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홍: 빵점 엄마라 딸에게 미안하고 그런 엄마인데도 항상 힘을 줘서 고맙다. 그래도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으면 그리고 타인을 아프지 않게 했으면 한다.
장: 지금의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 모습을 좀더 배우고 싶다.
박지호 기자 hoya@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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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홍의원은 80년 5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시위에 나섰는가?
홍인화(홍): 5·18일 발발하고 19일에 휴교령이 내렸다. 곳곳에서 누가 조사를 받았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마음에 도청에도 자주 나갔다. 집에서는 알 수 없도록 몰래몰래 시위에 참여했다.
내일: 80년 당시 홍의원과 지금의 은진 양의 꿈은 무엇인가?
홍: 집에서는 의대나 약대 진학을 희망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조총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묶여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피해가 이과계로의 진학을 희망하게 한 것 같다.
장은진(장): 사회와 직접 소통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아직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80년 이후 부모님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걷고 싶다.
홍: 부모 입장에서는 가끔씩 아이의 그런 꿈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리고도 싶지만 지역과 역사, 세계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적극 후원할 생각이다.
내일: 80년과 비교했을 때 지금 학생들은 어떤 것 같은가?
장: 나와 비슷한 나이에 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활동한 것이 대단하다. 목숨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로 뛰어든 것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난 당시로 가서 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친구들도 부모님 세대에 비해 사회고민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활동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
친구들과 함께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홍: 딸과 고등학교 생활의 공통점이 있다면 ‘독서모임’을 했다는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던 학교별 독서토론회에 참여했었다. 은진이가 나보다 더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라 고민이기도 하다.(웃음)
내일: 80년 5월이 꿈 많은 여고시절이었는데
홍: 학교보다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많아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터질듯 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면서 5·18을 경험한 것에 대한 뿌듯함과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경험은 나를 염세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주위 선배들의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길과 답이 있었는데 끝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 어머니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일부는 정리된 부분도 있지만 고등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위치와 지적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너무 뻔한 것이라 마찰이 생길 때도 있다.
홍: 고민은 짧게 했으면 한다. 점수나 진학 등 현실적인 부분에서 얘기를 시작하면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고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것을 군소리 하나 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장: 어머니의 학교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해도 친구들끼리 잘 통하지 않는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자유와 민주를 고민하는 시기였고 지금은 누리는 시기이니 생활과 밀접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라고 본다.
내일: 시위대 중 대다수가 도망하고 그 중 지식인이라던 대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홍: 도망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5·18의 공로가 있다. 5·18은 끝까지 남아 도청을 사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의 상이자 움직임이다.
장: 처음에는 순수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면 모두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정신의 위기는 함께 융합시켜 함께 가는 방향으로 해결됐으면 한다. 순수하더라도 사회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에서 어떻게 녹일 것인가가 항상 고민이다.
내일: 27년의 간극에서 5월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홍: 5·18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당시에 참여했건 아니건, 살거나 죽었거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대구와 부산 등 동서의 화합과 남북의 화합을 통해 세계화로 가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27년의 간극이 희생과 아픔을 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장: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희망이 소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고민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광주정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보다 진짜 의미를 찾아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데 반석이 되길 바란다.
내일: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홍: 빵점 엄마라 딸에게 미안하고 그런 엄마인데도 항상 힘을 줘서 고맙다. 그래도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으면 그리고 타인을 아프지 않게 했으면 한다.
장: 지금의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 모습을 좀더 배우고 싶다.
박지호 기자 hoya@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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