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들꽃은 아름다웠다

항쟁은 노동자, IMF는 사장님 원해

6월을 일군 사람들 ③ 버림받은 철거민의 땅, 성남의 택시운전사 김 제씨

지역내일 2007-06-13
도시빈민에서 택시회사 대표로 … “6월항쟁은 인생의 중대한 분기점”

이해학 목사 (62)
성남주민교회 담임목사
6월항쟁 첫날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을 빼내기 위해 경찰서에서 단식항의농성을 했다.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시켰지만 학생들이 나머지를 석방하라며 시위하던 중 한 학생이 사망했다. 당시 가장 원통한 기억이다.

오길성(53)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86년 4월 성남지역 몇 개 사업장에서 파업을 벌였다. 당시 라이프제화 노조위원장이었는데 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6월 항쟁 때는 성남의 왠만한 사업장은 다 돌아다니며 투쟁을 조직했다.

김해성 목사 (46)
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 대표
당시 거리집회 사회를 도맡아서 했다. 하루는 성남 중앙극장 언덕길에서 대열을 정비해 내려오는 데 전경이 최루탄을 쏘면서 올라왔다. 나는 개회선언만 하고 쫓겨야 했지만 시청앞으로 몰려갔는데 경찰이 거의 없더라.

김태년(43)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1987년 경희대(수원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매일 학교에서 3000명 이상이 집회하고, 성남시청과 종합시장 등지로 거리시위를 나갔다. 새벽2시까지 거리에서 투쟁하다 학교로 들어가서 철야하고 다음날 또 투쟁했다.

황병주(41)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성남에 살던 나는 서울로 대학(한양대)을 다녔다. 항쟁기간 서울의 학교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6월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 때 밤 12시 넘어 집에 돌아오던 길에 성남시민들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는 것에 놀랐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택시회사인 세화운수 대표 김 제(62·사진)씨는 70년대 도시빈민에서 80년대 노동자를 거쳐 90년대 택시회사 사장이라는 길을 걸어왔다. 성남에서만 35년을 넘게 살아온 김씨의 이러한 삶은 6월항쟁이 있어서 가능했다.

◆철거민의 신도시 광주대단지 =
김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성남으로 이사 온 것은 ‘광주대단지사태’가 있었던 다음해인 1972년이다. 광주대단지사태는 박정희 정권의 도시빈민 강제이주정책에 맞서 유혈폭동양상을 띤 개발독재시대의 산물이었다. 성남시 신흥동 929번지는 김씨가 처음으로 성남에 발을 디뎠던 곳으로 지금도 그의 본적지이다.
김씨는 “당시 신흥동 일대는 벽돌로 얼기설기 가건물 짓고 가마니 대충 걸쳐놓은 집이 대부분이었다”며 “동네사람들은 먹고 살기위해 노가다부터 노점상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김씨도 당장 먹고살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당시 강남개발이 한창이던 봉은사 근처에서 수도관을 놓는 공사장 인부로 일하다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한 빵공장에서 5년여 일하기도 했다.
70년대 말에는 서울 을지로에서 잠시 주차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함께 일하던 사람과의 분쟁으로 다시 1980년부터는 성남에서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성남에서 목회활동을 한 이해학 성남주민교회 담임목사는 성남을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들의 땅이라고 표현했다.
이 목사는 “성남은 산업화과정서 이농대열에 동참한 도시빈민들을 한 곳에 몰아넣기 위해 정권이 만든 강제이주도시”라며 “박정희 정권은 월남전에서 빈민촌이 후방보급기지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서울의 빈민촌을 제거하기 위해 성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성남은 태생적으로 항쟁의 폭발성을 안고 있던 저항의 도시였다.

◆항쟁의 한복판에 선 택시기사 =
김씨는 87년 6월항쟁 당시 노동현장을 뛰어다녔다. 김씨는 “우리는 뜻이 맞는 일부 동지들과 노동자들을 이끄는데 노력했다”며 “하지만 노동자들이 거리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몇몇 의식있는 사람들은 시청 등지에서 열리는 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지만 다수의 노동자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투쟁이 격화될수록 택시기사를 비롯해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성남에서 노동자의 항쟁참여를 독려했던 오길성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소장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제조업에 주력했고, 김씨는 택시쪽을 도맡아 챙겼다”며 “그는 성남지역 택시노동운동의 산증인”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저녁이면 시내가 데모대 때문에 택시운전이 불가능했어요.”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뛰어다니며 택시기사와 노동자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데 노력했지.”
김씨의 말처럼 항쟁이 길어지면서 택시기사를 비롯해서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시위가 격렬해지기도 했다. 항쟁 중반기인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을 전후로 시위대는 투석전과 함께 화염병을 제조해 파출소와 관공서를 대상으로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김씨에게 6월항쟁은 노동운동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김씨를 비롯한 동지들은 항쟁기간 전후로 30개 안팎의 성남지역 택시회사에 노조를 집중적으로 결성하는 데 가담했다. 김씨는 “6·29선언 다음날 도로에서 차량시위를 했다”며 “월급 23만5000원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던 시위였다”고 말했다.
김씨의 노력은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빛을 봤다. 성남지역 택시노조가 적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까지 투쟁을 벌였다. 전국택시노련 경기동부지부장을 하는 등 노동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망해가는 택시회사를 껴안고 =
90년대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뀐다. 90년대 초 개인택시 운전을 통해 어느 정도 먹고살만 할 때 망하기 직전인 지금의 택시회사를 기사들과 공동으로 떠안다시피 했다. “택시기사 36명이 상호연대로 3억6000만원을 빌려 경영권을 인수했어요.” 그러나 97년 IMF가 터지면서 그나마 빚에 떠밀린 나머지 택시기사들이 모두 지분을 털고 나가면서 졸지에 김씨가 혼자 경영권을 떠안고 말았다. 김씨는 이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회사를 경영했지만 택시업계 상황은 구성원 모두에게 고통을 강요했다. 워낙 택시업계가 손님이 없고 불황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회사경영에서 노사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경영은 노동운동과 완전히 달랐다”며 “경영자로서 노조와 협력해야지만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사장인 김씨부터 허리띠를 졸라매 이 회사는 성남의 다른 곳에 비해서 종업원 급여가 높은 편이다. 김씨는 “사실 지금은 절망적인 상태로 모두가 죽는 길로 가고 있다”며 “요즘은 노조도 아예 자포자기한 상태인 것 같더라”라며 한숨지었다. 김씨는 지금까지 35년을 성남에 살면서 다양한 인생역정을 경험했다. 무너져가는 벽돌집에서 먹고살기 위해 서울과 성남을 뛰어다녔고 한때는 노동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세상은 변했고 그의 인생도 지금은 택시회사 대표라는 명함과 함께 하고 있다.
김씨는 “지금까지 아이들 교육문제랑 집안일은 모두 집사람이 식당일을 하면서 챙겨왔다”며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정연근 백만호 윤여운 김은광 원종태 방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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