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과 이한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름이다. 두 열사는 6월항쟁의 상징이며, 온 국민의 아들이다. 이들은 부산과 광주 출신으로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와 연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198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이들의 대학생활은 개인의 안일과 명예만 좇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인 박종철 열사는 학내 운동권 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해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인 이한열 열사도 일찍이 동아리 ‘만화사랑’에 가입해 각종 학내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박 열사는 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여했다가 한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군요.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충분히 반성하고 나가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바라시던 저의 모습을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한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에 비하면 저는 신선놀음입니다.”
박 열사는 구속된 가운데도 옥중편지를 통해서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노동자·민중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이한열 열사 역시 평소 끊임없이 사회현실에 대한 사색과 고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채찍질했다. “오늘 또 다시 생각한다. 나의 어린시절 추억, 피의 항쟁이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내가 제물이 되어 인간들이 소외당하지 않은 채 살아가게 하고 싶다.”
이 열사는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 불과 한 달 전인 87년 5월에 광주항쟁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면서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87년 6월항쟁은 박종철에서 시작해 이한열로 끝났다. 그 해 1월 14일 남영동 경찰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 열사 사건은 경찰의 은폐조작의도가 드러나면서 국민적 저항을 촉발시켰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은 6월 10일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전 국민적인 저항을 선언했다.
항쟁을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열사는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맸으며,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 국민의 울분을 자아내 거대한 항쟁의 거리로 뛰어들게 했다.
이 열사는 7월 5일에 27일 동안 삶과 죽음을 넘나들다 21세의 꽃다운 넋을 ‘민주주의의 제단’에 바쳤다. 7월 9일 서울시청앞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이 이 열사 장례식에 참여했다. 국민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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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인 박종철 열사는 학내 운동권 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해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인 이한열 열사도 일찍이 동아리 ‘만화사랑’에 가입해 각종 학내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박 열사는 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에 참여했다가 한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군요.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충분히 반성하고 나가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바라시던 저의 모습을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한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에 비하면 저는 신선놀음입니다.”
박 열사는 구속된 가운데도 옥중편지를 통해서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노동자·민중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이한열 열사 역시 평소 끊임없이 사회현실에 대한 사색과 고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채찍질했다. “오늘 또 다시 생각한다. 나의 어린시절 추억, 피의 항쟁이 끝난 후 6월 초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내가 제물이 되어 인간들이 소외당하지 않은 채 살아가게 하고 싶다.”
이 열사는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 불과 한 달 전인 87년 5월에 광주항쟁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면서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87년 6월항쟁은 박종철에서 시작해 이한열로 끝났다. 그 해 1월 14일 남영동 경찰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 열사 사건은 경찰의 은폐조작의도가 드러나면서 국민적 저항을 촉발시켰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은 6월 10일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전 국민적인 저항을 선언했다.
항쟁을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열사는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맸으며,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 국민의 울분을 자아내 거대한 항쟁의 거리로 뛰어들게 했다.
이 열사는 7월 5일에 27일 동안 삶과 죽음을 넘나들다 21세의 꽃다운 넋을 ‘민주주의의 제단’에 바쳤다. 7월 9일 서울시청앞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이 이 열사 장례식에 참여했다. 국민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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