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 대투쟁 경제민주화의 서막 열다]①울산에서 울려퍼진 인간선언
울산에서 마창·서울로 들불처럼 번지다
지역내일
2007-07-04
(수정 2007-07-04 오후 3:40:23)
현대그룹 계열사 잇따른 노조결성 대투쟁 기폭제
“인간답게 살고 싶다”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현대엔진, 나이트클럽에서 노조결성
1987년 7월 4일 오전 11시 울산의 한 나이트클럽에 한무리의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국과 회사측의 감시를 피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현대엔진 소속 노동자였다.
당초 120명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105명이 무사히 한곳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전국금속연맹 조직국장도 참석했다.
노조결성식이 시작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준비해온 ‘늙은 노동자(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노조결성의 주역인 사영운(49)씨는 “그때 감격은 말 할 수가 없었다”며 “누군가 ‘한국노동운동사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고 회고 했다.
이들은 이튿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구내식당에서 노조결성보고대회를 열고 곧바로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미포조선, 노조서류 탈취 사건
현대엔진 노조가 성공적으로 결성되자 잇따라 미포조선 노동자들에게도 파장이 미쳤다. 미포조선 노동자 39명이 같은 달 15일 노조를 설립했지만 울산시청에 설립신고를 접수하러 가는 과정에서 회사측 관리자들이 서류를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는 즉각 이 사실을 조합원에게 알리고 즉석에서 1450명의 조합원을 새로 가입시켰다. 특히 이 서류탈취 사건은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축출
현대 계열사의 핵심사업장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회사에서 7월 21일 역대 노사협의회 부위원장 출신을 중심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는 같은 달 24일 울산사회선교협의회에서 노동전문가의 도움으로 즉석에서 ‘현대중공업노조개편 11인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27일에는 출근시간에 맞춰 사측의 어용노조 결성에 항의하는 사내행진을 시작했다. 1만7000여명의 노조원이 사내 운동장에 집결했다. 29일에는 2만여명이 출근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집회를 개최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사측은 ‘연말성과금 차등지급철폐’ 등 노조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노조원들은 이 과정에서 이미 회사측에서 만든 어용노조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시켰다.
현대자동차, 악천후속 시위
한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7월24일 밤 이상범씨를 비롯해 48명이 주도가 돼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에 회사쪽도 노조를 결성해 25일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이씨를 비롯한 노조원은 어용노조 퇴진을 내걸고 사내행진에 나섰다. 이날 소나기가 내리는 악천우였지만 8000여명의 노동자가 동참했다. 아울러 모든 공장이 조업중단에 들어갔고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씨는 “노동자들이 이미 누군가 노조를 결성할 것이라며 기다리고 있었다”며 “순식간에 대거 참여해 놀랐다”고 말했다.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
노조결성의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됐다. 26일과 27일 현대중전기와 태광산업, 동양나일론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원의 시위에 놀란 정주영 회장이 8월 6일 울산에 직접 내려왔다. 하지만 노조인정과 그룹단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협상이 결렬됐다.
이에 각 계열사 노조는 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을 중심으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했다. 14일 현노협 산하 노조원 1만5000여명이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남목고개까지 3㎞ 거리행진을 벌였다. 남목고개에서 전경과 대치하는 과정에 노동자들이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을 포위하기도 했다. 이에 지도부는 ‘회사측에 준비할 시간을 며칠만 주자’고 설득해 노동자들은 해산했다.
그리고 18일 4만여 현대그룹 노동자들과 3000여명의 가족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해 6만여 군중이 울산공설운동장으로 역사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전지역 전산업으로 확산되는 투쟁
부산, “인간답게 살고 보자”
울산의 투쟁은 부산으로 옮겨 붙었다.
7월 21일 동명중공업에서 노조를 결성한 것을 신호로 27일 효성중공업 1500여 노동자들이 ‘어용집행부 퇴진 상여금인상 하기휴가비 5만원 인정’ 등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달 현대정공이 노조를 결성하고 한국중공업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농성에 들어갔다.
8월 1일 세신실업 1000여명이 임금인상과 식당밥 질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2일 현대정공 1000여명은 노조설립 보고대회를 열고 회사 앞 도로로 진출했다.
창원, 가두로 나온 노동자
창원지역도 투쟁의 불길을 건너 뛸 수는 없었다. 70년대 이후 새롭게 신흥 중화학공업지역으로 부상한 마산 창원은 대기업 노조가 중심이 돼 투쟁의 전국적인 확산을 이끄는 거점역할을 했다.
8월 4일 대우중공업 노조원 1300여명이 폭우 속에서도 7일간 파업농성을 벌여 기본급 2만원 인상을 관철했으며, 잇따라 한국중공업도 2000여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4일간 철야농성 끝에 ‘어용노조 퇴진 임금미지급분 지급 임금추가 5%인상’을 관철했다.
특히 11일 노동자 수만명이 가두로 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하면서 창원지역 투쟁은 최고조로 올랐다. 이날 가두시위에는 금성사 대림자동차 창원기화기 풍성전기 동우정기 오성사 등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밤 새도록 외쳤다. 기록에 따르면 연 인원 4만명이 창원공단 파업·농성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거제에서는 대우조선 백순환(48)씨 등이 노조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제, 대우조선 이석규 씨
8월 7일 크레인기사 이상용씨가 자신의 크레인에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사내에서 행진하면서 시작된 투쟁은 순식간에 전 회사를 휩쓸었다. 이씨는 노조설립서류를 회사 인사과에 접수시켰지만 어용으로 몰려 단상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노동법을 몰라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이어서 양동생씨 등이 나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노동자들은 양씨를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해 파업에 들어갔다. 특히 대우조선에서는 시위를 벌이던 과정에서 24일 이석규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씨의 장례식이 열린 28일에는 전국에서 노조대표자들과 인권변호사 등 재야인사가 총결집해 투쟁을 이끌었다.
이날 전국적으로 새로 농성을 시작한 곳이 200여곳에 달했고 이미 농성을 벌이는 사업장이 759개였다.
울산과 마산 창원을 휩쓴 투쟁의 열기는 급속하게 북상하면서 호남지역과 수도권으로 번졌다.
서울과 강원도 탄광까지
광주의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를 거쳐 이리 후레아훼션 광주의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 군산의 두산유리에서 다시 구미 대구 포항의 중부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타올랐다.
인천의 대우중공업 부평의 대우자동차 부천의 경원세기 서울 구로공단 안양 군포 성남 청주 등 전국에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거의 모든 현장에서 투쟁의 물결이 넘쳤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운수 분야에서도 택시기사들의 파업·시위가 속출하는 가운데 시내버스 기사들의 울산 광주 지역총파업 등 전국적 파업이 벌어졌다.
광산노동자의 경우 7월16일 동해탄광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127개 주요사업장 노동자가 격렬한 파업시위를 벌였다. 8월 한 달 동안 태백 문경지역 철도와 국도가 마비상태에 빠졌다.
사무·전문직 노동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보험 등 제2금융권을 출발로 병원노조 공공기관노조 전문직노조 교수노조로 확산됐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 4000여 사업장 연인원 200만여명이 투쟁에 참여했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강경흠 정재철 윤여운 송진휴 기자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노조 결성
1987년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 100여명이 기습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6일 오전 울산시청에 노조설립신고를 하고, 8일 신고필증을 교부받아 현대그룹에 명실상부한 민주노조의 깃발을 처음으로 꽂았다.
7월 15일 서울,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탈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인 ‘청계피복노조’는 군사독재의 탄압에도 끊임없이 합법화투쟁을 전개했다. 노조는 독재정권의 거듭되는 해산명령과 물리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84년 노조를 복구하고 87년 7월 15일 노조사무실을 독재정권으로부터 되찾았다.
7월 27일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돌입
현대엔진 노조결성을 계기로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노동조합결성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두발자유화’ ‘식사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회사측의 기만적인 행태로 이후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
7월 28일 부산, 국제상사 파업 돌입
울산에서 시작한 투쟁의 물결이 부산지역으로 옮겨갔다. 부산은 전통적으로 고무산업 여성노동자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국제상사 여성노동자들은 ‘휴가비 100% 보장’을 요구하며 폭력깡패의 각목 앞에서도 가두와 기숙사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전개했다.
8월 7일 창원, (주)통일 파업농성 돌입
노동자투쟁은 신흥공업단지인 마산과 창원으로 확산됐다. (주)통일은 이미 84~85년부터 임금인상과 단협투쟁을 벌여왔다. 마창지역에서 투쟁을 선도해 온 노조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도 정문을 봉쇄하고 회사측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8월 11일 창원, 금성사 지게차 가두시위
금성사(현 LG전자) 노조원들의 11일 지게차 가두시위는 창원지역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창원공단 금성사 노동자들의 싸움은 같은 업종인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공단으로 투쟁의 불씨를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8월 18일 울산, 현대노동자 샌딩머신 시위
울산은 더 이상 현대왕국이 아니었다. 잇따른 노조결성으로 투쟁의 불길을 이어온 현대그룹 노동자는 18일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울산공설운동장까지 5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위는 노동자투쟁의 최고정점을 이뤘다.
8월 28일 거제, 이석규 씨 장례식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7~8월 노동자투쟁은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의 장례식이 열린 날 200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투쟁을 벌였다. 이날 투쟁은 뜨거웠던 여름을 달군 노동자투쟁의 상징이었지만 이후 투쟁의 강도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인간답게 살고 싶다”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현대엔진, 나이트클럽에서 노조결성
1987년 7월 4일 오전 11시 울산의 한 나이트클럽에 한무리의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국과 회사측의 감시를 피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현대엔진 소속 노동자였다.
당초 120명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105명이 무사히 한곳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전국금속연맹 조직국장도 참석했다.
노조결성식이 시작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준비해온 ‘늙은 노동자(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노조결성의 주역인 사영운(49)씨는 “그때 감격은 말 할 수가 없었다”며 “누군가 ‘한국노동운동사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고 회고 했다.
이들은 이튿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구내식당에서 노조결성보고대회를 열고 곧바로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미포조선, 노조서류 탈취 사건
현대엔진 노조가 성공적으로 결성되자 잇따라 미포조선 노동자들에게도 파장이 미쳤다. 미포조선 노동자 39명이 같은 달 15일 노조를 설립했지만 울산시청에 설립신고를 접수하러 가는 과정에서 회사측 관리자들이 서류를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는 즉각 이 사실을 조합원에게 알리고 즉석에서 1450명의 조합원을 새로 가입시켰다. 특히 이 서류탈취 사건은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의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축출
현대 계열사의 핵심사업장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회사에서 7월 21일 역대 노사협의회 부위원장 출신을 중심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는 같은 달 24일 울산사회선교협의회에서 노동전문가의 도움으로 즉석에서 ‘현대중공업노조개편 11인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27일에는 출근시간에 맞춰 사측의 어용노조 결성에 항의하는 사내행진을 시작했다. 1만7000여명의 노조원이 사내 운동장에 집결했다. 29일에는 2만여명이 출근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집회를 개최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사측은 ‘연말성과금 차등지급철폐’ 등 노조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노조원들은 이 과정에서 이미 회사측에서 만든 어용노조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시켰다.
현대자동차, 악천후속 시위
한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7월24일 밤 이상범씨를 비롯해 48명이 주도가 돼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이에 회사쪽도 노조를 결성해 25일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이씨를 비롯한 노조원은 어용노조 퇴진을 내걸고 사내행진에 나섰다. 이날 소나기가 내리는 악천우였지만 8000여명의 노동자가 동참했다. 아울러 모든 공장이 조업중단에 들어갔고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씨는 “노동자들이 이미 누군가 노조를 결성할 것이라며 기다리고 있었다”며 “순식간에 대거 참여해 놀랐다”고 말했다.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
노조결성의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됐다. 26일과 27일 현대중전기와 태광산업, 동양나일론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원의 시위에 놀란 정주영 회장이 8월 6일 울산에 직접 내려왔다. 하지만 노조인정과 그룹단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협상이 결렬됐다.
이에 각 계열사 노조는 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을 중심으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했다. 14일 현노협 산하 노조원 1만5000여명이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남목고개까지 3㎞ 거리행진을 벌였다. 남목고개에서 전경과 대치하는 과정에 노동자들이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을 포위하기도 했다. 이에 지도부는 ‘회사측에 준비할 시간을 며칠만 주자’고 설득해 노동자들은 해산했다.
그리고 18일 4만여 현대그룹 노동자들과 3000여명의 가족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해 6만여 군중이 울산공설운동장으로 역사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전지역 전산업으로 확산되는 투쟁
부산, “인간답게 살고 보자”
울산의 투쟁은 부산으로 옮겨 붙었다.
7월 21일 동명중공업에서 노조를 결성한 것을 신호로 27일 효성중공업 1500여 노동자들이 ‘어용집행부 퇴진 상여금인상 하기휴가비 5만원 인정’ 등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달 현대정공이 노조를 결성하고 한국중공업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농성에 들어갔다.
8월 1일 세신실업 1000여명이 임금인상과 식당밥 질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2일 현대정공 1000여명은 노조설립 보고대회를 열고 회사 앞 도로로 진출했다.
창원, 가두로 나온 노동자
창원지역도 투쟁의 불길을 건너 뛸 수는 없었다. 70년대 이후 새롭게 신흥 중화학공업지역으로 부상한 마산 창원은 대기업 노조가 중심이 돼 투쟁의 전국적인 확산을 이끄는 거점역할을 했다.
8월 4일 대우중공업 노조원 1300여명이 폭우 속에서도 7일간 파업농성을 벌여 기본급 2만원 인상을 관철했으며, 잇따라 한국중공업도 2000여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4일간 철야농성 끝에 ‘어용노조 퇴진 임금미지급분 지급 임금추가 5%인상’을 관철했다.
특히 11일 노동자 수만명이 가두로 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하면서 창원지역 투쟁은 최고조로 올랐다. 이날 가두시위에는 금성사 대림자동차 창원기화기 풍성전기 동우정기 오성사 등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밤 새도록 외쳤다. 기록에 따르면 연 인원 4만명이 창원공단 파업·농성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거제에서는 대우조선 백순환(48)씨 등이 노조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제, 대우조선 이석규 씨
8월 7일 크레인기사 이상용씨가 자신의 크레인에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사내에서 행진하면서 시작된 투쟁은 순식간에 전 회사를 휩쓸었다. 이씨는 노조설립서류를 회사 인사과에 접수시켰지만 어용으로 몰려 단상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노동법을 몰라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이어서 양동생씨 등이 나서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노동자들은 양씨를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해 파업에 들어갔다. 특히 대우조선에서는 시위를 벌이던 과정에서 24일 이석규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씨의 장례식이 열린 28일에는 전국에서 노조대표자들과 인권변호사 등 재야인사가 총결집해 투쟁을 이끌었다.
이날 전국적으로 새로 농성을 시작한 곳이 200여곳에 달했고 이미 농성을 벌이는 사업장이 759개였다.
울산과 마산 창원을 휩쓴 투쟁의 열기는 급속하게 북상하면서 호남지역과 수도권으로 번졌다.
서울과 강원도 탄광까지
광주의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를 거쳐 이리 후레아훼션 광주의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 군산의 두산유리에서 다시 구미 대구 포항의 중부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타올랐다.
인천의 대우중공업 부평의 대우자동차 부천의 경원세기 서울 구로공단 안양 군포 성남 청주 등 전국에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거의 모든 현장에서 투쟁의 물결이 넘쳤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운수 분야에서도 택시기사들의 파업·시위가 속출하는 가운데 시내버스 기사들의 울산 광주 지역총파업 등 전국적 파업이 벌어졌다.
광산노동자의 경우 7월16일 동해탄광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127개 주요사업장 노동자가 격렬한 파업시위를 벌였다. 8월 한 달 동안 태백 문경지역 철도와 국도가 마비상태에 빠졌다.
사무·전문직 노동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보험 등 제2금융권을 출발로 병원노조 공공기관노조 전문직노조 교수노조로 확산됐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 4000여 사업장 연인원 200만여명이 투쟁에 참여했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강경흠 정재철 윤여운 송진휴 기자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노조 결성
1987년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 100여명이 기습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6일 오전 울산시청에 노조설립신고를 하고, 8일 신고필증을 교부받아 현대그룹에 명실상부한 민주노조의 깃발을 처음으로 꽂았다.
7월 15일 서울,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탈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인 ‘청계피복노조’는 군사독재의 탄압에도 끊임없이 합법화투쟁을 전개했다. 노조는 독재정권의 거듭되는 해산명령과 물리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84년 노조를 복구하고 87년 7월 15일 노조사무실을 독재정권으로부터 되찾았다.
7월 27일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돌입
현대엔진 노조결성을 계기로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노동조합결성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두발자유화’ ‘식사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회사측의 기만적인 행태로 이후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
7월 28일 부산, 국제상사 파업 돌입
울산에서 시작한 투쟁의 물결이 부산지역으로 옮겨갔다. 부산은 전통적으로 고무산업 여성노동자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국제상사 여성노동자들은 ‘휴가비 100% 보장’을 요구하며 폭력깡패의 각목 앞에서도 가두와 기숙사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전개했다.
8월 7일 창원, (주)통일 파업농성 돌입
노동자투쟁은 신흥공업단지인 마산과 창원으로 확산됐다. (주)통일은 이미 84~85년부터 임금인상과 단협투쟁을 벌여왔다. 마창지역에서 투쟁을 선도해 온 노조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도 정문을 봉쇄하고 회사측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8월 11일 창원, 금성사 지게차 가두시위
금성사(현 LG전자) 노조원들의 11일 지게차 가두시위는 창원지역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창원공단 금성사 노동자들의 싸움은 같은 업종인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공단으로 투쟁의 불씨를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8월 18일 울산, 현대노동자 샌딩머신 시위
울산은 더 이상 현대왕국이 아니었다. 잇따른 노조결성으로 투쟁의 불길을 이어온 현대그룹 노동자는 18일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울산공설운동장까지 5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위는 노동자투쟁의 최고정점을 이뤘다.
8월 28일 거제, 이석규 씨 장례식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7~8월 노동자투쟁은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의 장례식이 열린 날 200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투쟁을 벌였다. 이날 투쟁은 뜨거웠던 여름을 달군 노동자투쟁의 상징이었지만 이후 투쟁의 강도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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