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 대투쟁 경제민주화의 서막 열다]대투쟁 이끈 주역들

(4)87년 노동자의 큰 형님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지역내일 2007-08-01
전태일을 품고 노동자와 함께
서울대 상대 경영학도에서 공장 노동자로, 그 후 30년 세월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문성현(55)을 빼 놓을 수 없다. 물론 그는 6회에 걸친 구속이 말해주듯 한국사 변혁기에는 대부분 감옥에 있었다. 7·8월 대투쟁 때도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철창 바깥 현장에 직접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노동운동가였다.

◆산골 소년의 가슴에 전태일이 스며들다 = 그는 경남 함양의 산골에서 1952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평교사로서 평생을 보냈다. 1971년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경동교회 야학에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전태일의 일생을 알게 됐다. 그는 “당시는 평전이 나와 있지 않았다”며 “청사진 형태로 전해지던 전태일의 일기를 읽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전태일은 평생 그의 가슴에서 살게 된다.
그는 75년 졸업을 하고 육군에 입대해 77년 병장으로 제대했다. 군을 제대한 그는 삼양사(현 휴비스)에 입사했다. 1979년 YH사건은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신문에서 사건을 읽고 삼양사를 그만뒀다. 가슴속에 있던 전태일이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조그만 철공소에 다니면서 80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 6개월 코스에서 직업훈련을 받고 선반공으로 80년 서울 동양기계에 입사했다.

◆노동조합 대의원에서 위원장으로 = 81년 그는 병역특례 젊은이들을 모아 ‘차돌회’라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이 소모임을 중심으로 현장 활동을 한 그는 81년 노조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82년 동양기계는 창원으로 이전했다. 이어서 동양기계는 통일산업에 합병됐다. 합병 때 노조탄압에 맞서다가 그는 서울로 전출되자 부당하다며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제기·승소해 복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노동자들에게 확실히 각인됐다. 그동안 노조에 참여하지 않았던 통일산업 노동자들도 가입해 조합원들은 200여명에서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84년 노조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4대 국경일만 쉬던 공휴일을 법정휴일에는 모두 쉬도록 하는 것을 사측에 요구해 승리했다. 조합원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그는 회사와 기관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85년 임금교섭에서 전두환 정권이 한자리수 임금인상을 강요하던 정책에 맞서야 했다. 임금교섭에서 사측은 9.8%를 제시하고는 정부 가이드라인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기관의 협박도 매서웠다. 결국 위원장은 월요일 파업을 앞두고 토요일 저녁 두려움에 직권조인을 해버렸다. 월요일 노조는 발칵 뒤집혔다. 위원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문 대표의 제안에 따라 노조정상화 후 임금교섭을 재개하기로 했다.
사측에서는 그가 대학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해고했다. 그는 점심시간 집회를 열어 조합원들에게 자신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조합원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조합원들은 “우리도 대학 출신을 원한다”며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85년 6월 구로공단에서 파업 중이던 대우어패럴 노조에 동조해 동맹파업을 준비했다. 파업 전날 밤 경찰은 문 대표를 연행하기 위해 노조사무실에 진입했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뒷문을 통해 회사 담장을 넘어 뛰어내리다 깨진 유리병 조각에 발을 크게 다쳤다. 정신없이 뛰던 그는 이웃마을 빨래줄에 널려있던 운동화를 훔쳐 신었다. 그의 신발은 유리에 찢어지고 피가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그는 “당시 운동화 주인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웃었다. 조합원 집에서 응급조치를 마친 그는 다음날 통근버스 좌석 아래에 숨어 회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화장실에 있던 그를 경찰이 덮쳐 구속했다. 6개월 구속 재판 끝에 그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통일중공업노조 위원장에서 전국적인 노동운동가로 = 86년 초 석방된 그는 구속된 노조간부들의 변론문제로 부산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여기서 그는 부산 울산 대구 일대에서 소모임을 하던 권용목 천창수씨 등과 만나며 활동 폭을 넓혔다.
87년 거제 대우조선은 조선산업구조조정 문제로 현장 노동자들이 들썩였다. 당시 거제성당에 있으며 민통련 경남대표를 맡고 있던 김영식 신부가 문 대표를 초청했다. 그의 소개로 이후 대우조선 위원장을 지낸 최은석씨 등과 만났다.
87년은 권인숙씨 성고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개헌현판식 등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창원도 마찬가지였다. 창원의 노동자들은 5월 1일 노동절 행사를 창원 반송성당에서 가졌다. 수백명이 모인 규모 있는 노동절 행사였다. 마산·창원은 이때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 돼 6월 항쟁 7·8월 투쟁을 이끌었다.
87년 6월 대우조선 백순환(민주노총 금속연맹 위원장 역임)씨가 주동이 된 유인물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모두 감옥에서 맞았다. 87년 12월 6개월 만기 형을 마치고 12월 출소했다.

◆금속연맹 위원장에서 민노당 당원으로 = 88년 문 대표는 ‘마창노련’ 지도위원을 맡아 마산·창원 지역 연대활동을 강화했다. 그는 89년 다시 제3자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1년8개월 감옥을 살고 나온 그는 노동운동의 전국조직화에 참여했다. 94년 전국노조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은 그는 전국노동운동가 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노운협이 이적단체로 몰려 95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구속 중 민주노총이 설립됐다. 집행유예로 출소한 그는 95년 전국민주금속연맹 수석부위원장, 99년 금속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1년 2002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2000년 민노당에 입당해 중앙위원이 됐다.
문성현 대표는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30년을 노동운동에 바쳤다. 그는 운동노선에 매달리지 않았다. 운동권의 NL·PD 이념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PD였고 어느 때는 NL이었다. 그는 “이념이 자신을 이끈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어려운 생활과 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 그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을 인터뷰 내내 표현했다. 문 대표는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내수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며 “87년 당시의 절박함을 보는 것같아 애가 탄다.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7~8월 노동자대투쟁
“사람답게 살고 싶다”

김세훈(50)
민주노총 회계감사

노동자들이 억압에 투쟁한 정의로운 투쟁이었다. 노동운동은 사회적인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어우르고 투쟁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이 87년 당시 우리모두의 아픔과 같다. 적극 나서야 한다.

오상용(51)
금속노조 부위원장

당시 31세였다. 당시 노동현장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정의였다.
요즘 노동자들은 사회공익적 개념이 약한 것 같아 아쉽다.

이흥석(46)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장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약자를 위한 운동이다. 우리주변의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상인 농민 빈민 등 이웃을 항상 돌아보는 기본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노동운동이 갈 길이다.

주재석(51)
두산중공업 지회 회계감사

20년이면 성인의 나이다. 성인은 방향을 가져야 한다.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해 계파중심으로 가는 것에서 벗어나 멀리보고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민족통일은 노동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양규석(47)
로템 근무

당시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었다. 이제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는 생활운동으로 확산해 나가야겠다.
아파트 등 생활공간에서 87년 정신을 펼쳐나가야 한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윤여운 강경흠 정재철 송진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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