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천지는 조용한 기운에 차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해와 달은 주야로 바뀌면서 그 빛은 천년 만년 변함이 없다. 이것이 우주의 모습이다. 사람도 한가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며 한가한 때일수록 장차 급한 일에 대한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아무리 분주한 때일지라도 여유 있는 일면을 지니고 있을 것이 필요하다."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
이 글은 중국 명나라 말엽의 유명한 처세철학자 홍자성이 '채근담'이라고 하는 책에 기록한 명문이다. 그의 책에는 "사마온공이 말하였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바로잡지 말고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는 등 지금 들어서도 매우 유익한 처세방법론들이 처처에 널려있다.
서두의 인용문을 두고서 이를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필자는 대학 초년시절부터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필자가 포항 해병사단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부대에서 전 장병 단결회의가 있었는데, 정훈담당으로서 이 회의를 인도하던 필자는 '채근담'의 이 대목을 빌어서 그날의 결론을 유도했다. 미상불 인용구절의 원판이 좋아서 회의의 끝맺음이 그럴 듯했다.
회의가 끝난 후 부대장이 필자를 불러서 '채근담'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하문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성의껏 제시하고서, 그날 이후로 필자는 그분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의 지휘방침이 '마음은 여유 있게, 행동은 총알같이'였다. 아주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는 언사를 직접 체험한 사건이었다.
'채근담'을 남북관계에 적용
지금도 저 고색창연한 홍자성의 가르침이 필자의 일상에 생생하게 부딪쳐 올 때가 많다. 특히 오랜 세월을 남북이산가족 문제와 관련된 일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당장 답변이 제시되기 어려운 장거리경주와도 같은 일임을 실감하면서, 그 일의 수순에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가 절실함을 자주 깨닫곤 한다.
근자의 남북관계는 일견 일시적 소강상태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다. 반세기를 넘기며 기다렸던 이산가족들이 상대방 지역을 방문하여 오열속에 가족을 만나고 당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이뤄질 것같던 분위기가 조성되어 사람들을 들뜨게 하더니, 어느 결에 그 뜨거운 기운들이 식어버렸다.
오히려 예정됐던 장관급회담이 무산되고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도 전망이 불투명해졌으며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민화협 접촉도 난망의 지경이 되었다.
왜 이렇게 급전직하로 사정이 바뀌어 버렸을까? 여기에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필두로 한 주변환경과 북한내부사정 등 여러 요인이 있을 터이나,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사이에 아직 환경조건을 넘어설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단체들이 그동안 '이산가족 문제야말로 북한당국의 진정성을 계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바로미터이다. 이 인도적 문제를 체제나 이념문제와 관련없이 성의있게 들고나올 때에라야 북한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해온 것이 아닌가.
문화사업의 연계 준비할 때
그런데 그와 같은 논리나 주장은 그렇다고 하고, 이처럼 남북관계가 소원해져 있을 때 꼭 준비해야 할 일을 홍자성에게 자문해보자. 이를테면 지금이 얼마나 한가한 때라고 보고 장차 급한 일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기실은 남북상호간에 극히 예민한 정치나 사회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보다 포괄적이며 점진적인 단계가 필요한 문화사업, 그러나 나중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일들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줄 문화사업을 이때에 활력있게 확장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북이 문화적으로 뜻과 힘을 모아야 할 대목은 부지기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사성있는 눈앞의 일 한가지를 언급해 보자. 남북에 공히 대응의 표현이 요구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교과서 수정문제이다.
중국은 애초부터 '거센 반발'을 보였고 북한도 '군국주의 야망'을 드러냈다고 맹비난을 했었는데 우리는 '깊은 우려'에서 '강력 대응'으로 태도를 강화해 가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임나일본부설이나 강화도조약 등에 대한 역사관이 우리와 서로 다르지 않으며 일제의 강점기에 대한 시각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 일을 북한과 연계해 볼 수 없을까? 그리고 그것을 남북한 문화접촉의 유익한 징검다리로 할 수 없을까? 남북이 앞으로 더 바빠져서 이러한 일들을 돌아보기 어렵게 되기 전에 말이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경희대 교수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
이 글은 중국 명나라 말엽의 유명한 처세철학자 홍자성이 '채근담'이라고 하는 책에 기록한 명문이다. 그의 책에는 "사마온공이 말하였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바로잡지 말고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는 등 지금 들어서도 매우 유익한 처세방법론들이 처처에 널려있다.
서두의 인용문을 두고서 이를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필자는 대학 초년시절부터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필자가 포항 해병사단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부대에서 전 장병 단결회의가 있었는데, 정훈담당으로서 이 회의를 인도하던 필자는 '채근담'의 이 대목을 빌어서 그날의 결론을 유도했다. 미상불 인용구절의 원판이 좋아서 회의의 끝맺음이 그럴 듯했다.
회의가 끝난 후 부대장이 필자를 불러서 '채근담'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하문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을 성의껏 제시하고서, 그날 이후로 필자는 그분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의 지휘방침이 '마음은 여유 있게, 행동은 총알같이'였다. 아주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는 언사를 직접 체험한 사건이었다.
'채근담'을 남북관계에 적용
지금도 저 고색창연한 홍자성의 가르침이 필자의 일상에 생생하게 부딪쳐 올 때가 많다. 특히 오랜 세월을 남북이산가족 문제와 관련된 일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당장 답변이 제시되기 어려운 장거리경주와도 같은 일임을 실감하면서, 그 일의 수순에 완급을 조절하는 지혜가 절실함을 자주 깨닫곤 한다.
근자의 남북관계는 일견 일시적 소강상태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다. 반세기를 넘기며 기다렸던 이산가족들이 상대방 지역을 방문하여 오열속에 가족을 만나고 당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이뤄질 것같던 분위기가 조성되어 사람들을 들뜨게 하더니, 어느 결에 그 뜨거운 기운들이 식어버렸다.
오히려 예정됐던 장관급회담이 무산되고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도 전망이 불투명해졌으며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민화협 접촉도 난망의 지경이 되었다.
왜 이렇게 급전직하로 사정이 바뀌어 버렸을까? 여기에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필두로 한 주변환경과 북한내부사정 등 여러 요인이 있을 터이나,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사이에 아직 환경조건을 넘어설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 단체들이 그동안 '이산가족 문제야말로 북한당국의 진정성을 계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바로미터이다. 이 인도적 문제를 체제나 이념문제와 관련없이 성의있게 들고나올 때에라야 북한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해온 것이 아닌가.
문화사업의 연계 준비할 때
그런데 그와 같은 논리나 주장은 그렇다고 하고, 이처럼 남북관계가 소원해져 있을 때 꼭 준비해야 할 일을 홍자성에게 자문해보자. 이를테면 지금이 얼마나 한가한 때라고 보고 장차 급한 일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기실은 남북상호간에 극히 예민한 정치나 사회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보다 포괄적이며 점진적인 단계가 필요한 문화사업, 그러나 나중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일들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줄 문화사업을 이때에 활력있게 확장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북이 문화적으로 뜻과 힘을 모아야 할 대목은 부지기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사성있는 눈앞의 일 한가지를 언급해 보자. 남북에 공히 대응의 표현이 요구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교과서 수정문제이다.
중국은 애초부터 '거센 반발'을 보였고 북한도 '군국주의 야망'을 드러냈다고 맹비난을 했었는데 우리는 '깊은 우려'에서 '강력 대응'으로 태도를 강화해 가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임나일본부설이나 강화도조약 등에 대한 역사관이 우리와 서로 다르지 않으며 일제의 강점기에 대한 시각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 일을 북한과 연계해 볼 수 없을까? 그리고 그것을 남북한 문화접촉의 유익한 징검다리로 할 수 없을까? 남북이 앞으로 더 바빠져서 이러한 일들을 돌아보기 어렵게 되기 전에 말이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경희대 교수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