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 김학윤 하의3도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장,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이규수 교수의 자료협조를 받았다. 후루야에 관한 많은 내용과 사진은 다테노 아키라 편저 ‘그때 그 일본인들’ (한길사)을 인용했다.
신명식 기자 msshin@naeil.com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조선인 입장 누구보다 깊게 이해한 인권변호사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 모두 변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는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이 건국훈장을 추서한 인권변호사다. 후세는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과 대만의 민중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해방 후에는 재일 한국인 인권옹호에 앞장섰다.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민권사상, 기독교, 묵자의 겸애주의에서 인간의 평등성을 발견하고 식민지 민중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20년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발표 “민형사를 가리지 않고 앞으로는 관계자의 눈을 사회개조로 돌릴 수 있는 사건만을 변호하겠다”고 했다.
그 예로 ‘조선인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을 들었다. 그는 네 차례 조선에 와서 변호 조사 항의 고발 순회강연 같은 활동을 했다. 후세 같은 ‘거물’이 조선에 오는 것만으로도 조선총독부는 부담스러워했다.
후세는 2·8독립선언의 최팔용 백관수(1921) 일왕 암살미수 사건의 가네코 박열 부부(1923년), 의열단(1923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1924년) 조선공산당(1927년) 변론을 맡았다. 그는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을 도왔다.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1926년 전라도 궁삼면(지금의 나주) 농지를 수탈하려고 했을 때 현지조사까지 마치고 동척을 향해 ‘합법적 사기’라는 주장을 펼쳐 결국 총독부가 농민들과 협상에 나서게 했다
1926년에는 관동대지진(1923년 9월 발생)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계에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과문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후세는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가자 손발이 묶였다. 1939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9년 ‘변호사 후세 다쓰지 탄생 70주년 기념 인권옹호선언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자 3000명 중에서 재일한국인이 700~800명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한국인의 입장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인물”이라고 했다.
2000년 11월 13일 후세 탄생 12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에는 ‘일본인 신들러! 국제평화주의자! 조선해방의 은인’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정부는 2004년 후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유일하다.
그의 외손자가 오이시 스스무(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이다.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1976)
조선과 대만의 민중운동 지원… 조공사건 변론
하의도 방문했을 때 농민 700명 “후루야 만세”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 1976)는 인권변호사 나아가 대중운동가로서 조선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한 인물이다.
후루야는 야마나시현에서 자작농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의 부기학교에서 공부하고,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다 조선으로 와서 상점과 우체국에서 일했다. 군 복무후 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한 그는 고향에 돌아가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농민을 위한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각지의 농민운동을 지원해서 “소작쟁의가 있는 곳에 후루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1927년 9월 후루야는 일본 노동농민당의 의뢰를 받아 조선공산당 사건(피고 박현영 이 영 등 105명) 변론을 위해 조선에 온다. 후루야는 이인 김병로 등 조선인 변호사와 함께 공판 전 과정에 참여했다.
1927년 10월 후세 다쓰지가 경성에 왔다. 후세와 후루야는 일본 자유법조단의 일원이었다.
경성에서 후세와 후루야를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후루야는 ‘3·1만세’를 언급했다. 후루야는 일본의 조선지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세’라는 표현에 주목한 경찰이 구인장을 발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공사건 최후변론을 준비하던 후루야는 당시 전 조선과 일본에 널리 알려진 완도군 소안도의 소안학교 복교운동과 하의도 토지문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그가 인권변호사를 뛰어넘어 대중운동가였음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1927년 11월 6일 후루야 일행이 하의도에서 옆 섬 상태도로 건너갈 때 선착장에는 주민 700명이 나와 등불을 들고 “후루야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상태도에서는 상태보명학원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앞에서 “하의3도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연설 했다.
후루야는 하의도를 떠나며 기자들에게 “소안도와 하의도 사건을 조사한 증거를 가지고 정무당국에 항의하는 동시에 사회여론을 일으켜 내년 열리는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또 후쿠다농장측의 소작료 강제차압은 “조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지주의 폭행”이라고 밝혔다.
1928년 일본으로 돌아간 후루야는 대만으로 가서 1945년까지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후루야는 타이베이시에 사무소를 열고 농민운동 노동운동 관련 많은 사건을 다루었다.
1945년 후 후루야는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에는 일본조선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사장이 됐다.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1988)
하의도농민조합 결성, 소작쟁의 이끌다 8개월 수감
조선옷 입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농민 결집시켜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 1988)는 일본인 노동운동가로서 1927~1928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농민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농민투쟁을 이끌었던 대중운동가다.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로 이루어진 하의3도 농민들은 350년에 걸쳐 내 땅 찾기운동을 벌였다. 1956년 제헌국회가 적산불하 형식으로 450만평 농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줄 때까지 하의3도 농민운동은 농민운동사에서 가장 오랜 투쟁이고, 경자유전투쟁이고, 생존권투쟁에서 항일투쟁으로 발전한 기념비적 투쟁이다.
일본인 농장주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하의3도 출신 최용도 고장명은 1927년 6월 아사히 겐즈이를 찾아갔다. 농장주의 탄압과 정치깡패 박춘금의 개입으로 농민조합 결성이 두 차례나 실패한 뒤였다.
박춘금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상애회를 조직해 폭력을 필요로 하는 분쟁에 개입하던 자로서 일본 중의원을 두차례 지낸 대표적 친일파다.
아사히가 조선에 오게 된 배경과 조선에서 활동내용은 뒷날 그가 쓴 회고록에 자세히 나온다.
아사히는 당시 노동농민당 오사카지부 상임위원, 오사카화학노동자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내 조선인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 고문을 맡고 있었다. 아사히는 신문배달종업원조합을 만들어 노동운동을 시작했는데 조합원 500명 중 절반이 조선인이었다.
1927년 12월 27일 아사히 겐즈이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하의도에 도착했다. 아사히는 조선옷을 입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농민을 결집해 나갔다.
1928년 1월 2일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농민조합 하의농민조합지부 발회식이 열렸다. 창립회원은 800명에 달했으며, 아사히는 고문으로 추대됐다.
아사히는 토지소유권 회수투쟁을 일단 보류하고 소작인 권익옹호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민조합은 토지측량 재실시, 체납소작료 강제징수 금지와 감면, 검견에 농민조합 대표 참가를 요구했다.
2월 8일 농민조합은 도쿠다양행에 소작문제 교섭을 요구했다. 도쿠다측은 다시 박춘금을 불러들였다. 아사히가 특별히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춘금 일파가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벌어져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 농민 63명이 검거됐다.
소작쟁의는 두 달간 이어졌고, 체포망을 빠져나간 아사히는 아지트를 5~6번 옮겨 다니며 투쟁을 지도했다. 아사히와 최용도는 4월 6일 체포됐다.
아사히는 8개월 후인 1928년 11월 무죄 방면됐지만 일본으로 강제 추방됐다. 아사히는 회고록에서 농민의 요구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조인도 끝난 상태였다고 밝혔다.
한편 아사히는 1929년 일본에서 4.16탄압 사건 때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6년 1월에는 마쓰시타산업노조 초대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90세로 사망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20살 때 일왕 암살 미수… 사형선고 받고 “만세”
3·1독립운동 목격한 후 조선인의 저항운동 지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 1926)는 조선과 조선남자를 사랑하다 23살에 숨진 비운의 아나키스트다.
1923년 9월 4일 일제는 요시찰인물인 가네코와 박 열(1902~1974)을 예비 검속했다.
조사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불과 스물 한두 살이던 이들이 이른바 ‘천황’ 다이쇼(大正)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구금된 지 2년6개월만인 1926년 2월 26일 대심원 법정에 선 박 열은 “재판관이 일본을 대표해 재판을 한다면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라고 외쳤다. 그는 법정에서 사모관대를 갖춘 조선옷을 입었다.
가네코는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기존의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 나의 직업”이라고 말했다, 일본사람인 그도 역시 조선옷 차림이었다.
가네코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 7년을 보냈다. 10세 때인 1912년부터 할머니와 고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1919년까지 살았다. 고모가 양녀로 삼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인이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과 폭행 학대를 견뎌야 했다.
그는 일본인 관리들이 조선인에게 저지르는 악행을 목격했으며, 1919년에는 3·1운동을 직접 보았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주위사람들에게 그때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23년 여름 가네코는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생활 때문에 조선인들의 일제를 향한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는 이후 4년 동안 신문팔이 노점상 사무원 찻집 가정부를 전전하며 본인이 평가하기를 ‘중학졸업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1922년 3월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동지로서 함께 살 것을 약속”하며 동거에 들어갔다. 가네코와 박 열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흑도회 흑우회에 참여했으며 기관지를 함께 만들었다.
사형선고 이틀 전 두 사람은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1926년 3월 25일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 순간 가네코는 “만세”를 불렀고 박 열은 “재판장 수고했군”이라고 비웃었다.
일제는‘천황’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은사를 결정했다. 가네코는 은사장을 찢어 던졌다.
가네코는 7월 23일 목을 멘 시신으로 발견됐다. 향년 23세. 가네코의 유골은 그해 11월 박씨 선산에 묻혔지만 봉분과 비석도 세울 수 없었다.
현재 그녀의 무덤은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박 열 생가 뒷편으로 이장됐다.
이후 박 열의 삶은 굴절이 심했다. 1935년 옥중에서 ‘천황제를 인정한다’고 전향했다. 22년 감옥생활을 거쳐 일제 패망 후 석방된 그는 조총련에 맞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만들어 1949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박 열은 6·25전쟁때 납북된다. 북에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을 맡았다. 1974년 평양에서 사망.
1989년 정부는 박 열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문경시는 2004년부터 박 열 기념사업을 벌여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짓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네코는 조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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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식 기자 msshin@naeil.com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조선인 입장 누구보다 깊게 이해한 인권변호사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 모두 변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는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이 건국훈장을 추서한 인권변호사다. 후세는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과 대만의 민중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해방 후에는 재일 한국인 인권옹호에 앞장섰다.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민권사상, 기독교, 묵자의 겸애주의에서 인간의 평등성을 발견하고 식민지 민중의 진정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20년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을 발표 “민형사를 가리지 않고 앞으로는 관계자의 눈을 사회개조로 돌릴 수 있는 사건만을 변호하겠다”고 했다.
그 예로 ‘조선인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을 들었다. 그는 네 차례 조선에 와서 변호 조사 항의 고발 순회강연 같은 활동을 했다. 후세 같은 ‘거물’이 조선에 오는 것만으로도 조선총독부는 부담스러워했다.
후세는 2·8독립선언의 최팔용 백관수(1921) 일왕 암살미수 사건의 가네코 박열 부부(1923년), 의열단(1923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1924년) 조선공산당(1927년) 변론을 맡았다. 그는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을 도왔다.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1926년 전라도 궁삼면(지금의 나주) 농지를 수탈하려고 했을 때 현지조사까지 마치고 동척을 향해 ‘합법적 사기’라는 주장을 펼쳐 결국 총독부가 농민들과 협상에 나서게 했다
1926년에는 관동대지진(1923년 9월 발생)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계에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과문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후세는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가자 손발이 묶였다. 1939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9년 ‘변호사 후세 다쓰지 탄생 70주년 기념 인권옹호선언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자 3000명 중에서 재일한국인이 700~800명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한국인의 입장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인물”이라고 했다.
2000년 11월 13일 후세 탄생 12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 국회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에는 ‘일본인 신들러! 국제평화주의자! 조선해방의 은인’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정부는 2004년 후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유일하다.
그의 외손자가 오이시 스스무(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이다.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1976)
조선과 대만의 민중운동 지원… 조공사건 변론
하의도 방문했을 때 농민 700명 “후루야 만세”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 1976)는 인권변호사 나아가 대중운동가로서 조선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한 인물이다.
후루야는 야마나시현에서 자작농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의 부기학교에서 공부하고,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다 조선으로 와서 상점과 우체국에서 일했다. 군 복무후 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한 그는 고향에 돌아가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농민을 위한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각지의 농민운동을 지원해서 “소작쟁의가 있는 곳에 후루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1927년 9월 후루야는 일본 노동농민당의 의뢰를 받아 조선공산당 사건(피고 박현영 이 영 등 105명) 변론을 위해 조선에 온다. 후루야는 이인 김병로 등 조선인 변호사와 함께 공판 전 과정에 참여했다.
1927년 10월 후세 다쓰지가 경성에 왔다. 후세와 후루야는 일본 자유법조단의 일원이었다.
경성에서 후세와 후루야를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후루야는 ‘3·1만세’를 언급했다. 후루야는 일본의 조선지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세’라는 표현에 주목한 경찰이 구인장을 발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공사건 최후변론을 준비하던 후루야는 당시 전 조선과 일본에 널리 알려진 완도군 소안도의 소안학교 복교운동과 하의도 토지문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그가 인권변호사를 뛰어넘어 대중운동가였음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1927년 11월 6일 후루야 일행이 하의도에서 옆 섬 상태도로 건너갈 때 선착장에는 주민 700명이 나와 등불을 들고 “후루야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상태도에서는 상태보명학원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앞에서 “하의3도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연설 했다.
후루야는 하의도를 떠나며 기자들에게 “소안도와 하의도 사건을 조사한 증거를 가지고 정무당국에 항의하는 동시에 사회여론을 일으켜 내년 열리는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또 후쿠다농장측의 소작료 강제차압은 “조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지주의 폭행”이라고 밝혔다.
1928년 일본으로 돌아간 후루야는 대만으로 가서 1945년까지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후루야는 타이베이시에 사무소를 열고 농민운동 노동운동 관련 많은 사건을 다루었다.
1945년 후 후루야는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에는 일본조선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사장이 됐다.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1988)
하의도농민조합 결성, 소작쟁의 이끌다 8개월 수감
조선옷 입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농민 결집시켜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 1898~ 1988)는 일본인 노동운동가로서 1927~1928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농민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농민투쟁을 이끌었던 대중운동가다.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로 이루어진 하의3도 농민들은 350년에 걸쳐 내 땅 찾기운동을 벌였다. 1956년 제헌국회가 적산불하 형식으로 450만평 농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줄 때까지 하의3도 농민운동은 농민운동사에서 가장 오랜 투쟁이고, 경자유전투쟁이고, 생존권투쟁에서 항일투쟁으로 발전한 기념비적 투쟁이다.
일본인 농장주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하의3도 출신 최용도 고장명은 1927년 6월 아사히 겐즈이를 찾아갔다. 농장주의 탄압과 정치깡패 박춘금의 개입으로 농민조합 결성이 두 차례나 실패한 뒤였다.
박춘금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상애회를 조직해 폭력을 필요로 하는 분쟁에 개입하던 자로서 일본 중의원을 두차례 지낸 대표적 친일파다.
아사히가 조선에 오게 된 배경과 조선에서 활동내용은 뒷날 그가 쓴 회고록에 자세히 나온다.
아사히는 당시 노동농민당 오사카지부 상임위원, 오사카화학노동자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내 조선인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 고문을 맡고 있었다. 아사히는 신문배달종업원조합을 만들어 노동운동을 시작했는데 조합원 500명 중 절반이 조선인이었다.
1927년 12월 27일 아사히 겐즈이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하의도에 도착했다. 아사히는 조선옷을 입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농민을 결집해 나갔다.
1928년 1월 2일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농민조합 하의농민조합지부 발회식이 열렸다. 창립회원은 800명에 달했으며, 아사히는 고문으로 추대됐다.
아사히는 토지소유권 회수투쟁을 일단 보류하고 소작인 권익옹호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민조합은 토지측량 재실시, 체납소작료 강제징수 금지와 감면, 검견에 농민조합 대표 참가를 요구했다.
2월 8일 농민조합은 도쿠다양행에 소작문제 교섭을 요구했다. 도쿠다측은 다시 박춘금을 불러들였다. 아사히가 특별히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춘금 일파가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벌어져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 농민 63명이 검거됐다.
소작쟁의는 두 달간 이어졌고, 체포망을 빠져나간 아사히는 아지트를 5~6번 옮겨 다니며 투쟁을 지도했다. 아사히와 최용도는 4월 6일 체포됐다.
아사히는 8개월 후인 1928년 11월 무죄 방면됐지만 일본으로 강제 추방됐다. 아사히는 회고록에서 농민의 요구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조인도 끝난 상태였다고 밝혔다.
한편 아사히는 1929년 일본에서 4.16탄압 사건 때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6년 1월에는 마쓰시타산업노조 초대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90세로 사망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20살 때 일왕 암살 미수… 사형선고 받고 “만세”
3·1독립운동 목격한 후 조선인의 저항운동 지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 1926)는 조선과 조선남자를 사랑하다 23살에 숨진 비운의 아나키스트다.
1923년 9월 4일 일제는 요시찰인물인 가네코와 박 열(1902~1974)을 예비 검속했다.
조사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불과 스물 한두 살이던 이들이 이른바 ‘천황’ 다이쇼(大正)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구금된 지 2년6개월만인 1926년 2월 26일 대심원 법정에 선 박 열은 “재판관이 일본을 대표해 재판을 한다면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라고 외쳤다. 그는 법정에서 사모관대를 갖춘 조선옷을 입었다.
가네코는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기존의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 나의 직업”이라고 말했다, 일본사람인 그도 역시 조선옷 차림이었다.
가네코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 7년을 보냈다. 10세 때인 1912년부터 할머니와 고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1919년까지 살았다. 고모가 양녀로 삼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인이나 다름없는 고된 생활과 폭행 학대를 견뎌야 했다.
그는 일본인 관리들이 조선인에게 저지르는 악행을 목격했으며, 1919년에는 3·1운동을 직접 보았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주위사람들에게 그때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23년 여름 가네코는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생활 때문에 조선인들의 일제를 향한 모든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는 이후 4년 동안 신문팔이 노점상 사무원 찻집 가정부를 전전하며 본인이 평가하기를 ‘중학졸업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1922년 3월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동지로서 함께 살 것을 약속”하며 동거에 들어갔다. 가네코와 박 열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흑도회 흑우회에 참여했으며 기관지를 함께 만들었다.
사형선고 이틀 전 두 사람은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1926년 3월 25일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 순간 가네코는 “만세”를 불렀고 박 열은 “재판장 수고했군”이라고 비웃었다.
일제는‘천황’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은사를 결정했다. 가네코는 은사장을 찢어 던졌다.
가네코는 7월 23일 목을 멘 시신으로 발견됐다. 향년 23세. 가네코의 유골은 그해 11월 박씨 선산에 묻혔지만 봉분과 비석도 세울 수 없었다.
현재 그녀의 무덤은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박 열 생가 뒷편으로 이장됐다.
이후 박 열의 삶은 굴절이 심했다. 1935년 옥중에서 ‘천황제를 인정한다’고 전향했다. 22년 감옥생활을 거쳐 일제 패망 후 석방된 그는 조총련에 맞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만들어 1949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박 열은 6·25전쟁때 납북된다. 북에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을 맡았다. 1974년 평양에서 사망.
1989년 정부는 박 열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문경시는 2004년부터 박 열 기념사업을 벌여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짓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네코는 조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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