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2008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던 한민족은 또 다시 역사의 준엄한 물음에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전쟁이냐 평화냐. 해묵은 이 물음에 이제 답해야 할 때가 됐다.
내일신문은 7월 27일 정전협정 54주년을 맞이해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평화의 달’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남한 군·경 민간인 학살 드러나
북한 인민군도 학살실체 규명해야
국방부 전사 편찬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으로 한국군·유엔군 전사 48만, 북한군·중국군 전사 150만, 민간인 사망 40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명에 달한다. 이 중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이 한국정부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고양 금정굴 사건과 경북 문경 석달마을 사건이 한국전쟁 시기에 경찰과 군인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적인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으로 진실·규명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나주 봉황 나주 동창교 함평 11사단 사건 등 5건이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진실화해위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학살현장을 발굴하고 있는 곳은 전남 구례 봉성산과 충북 청원 분터골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대전 산내면 등 4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이 학살됐다며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건은 7500여건이며 이를 사건별로 분류하면 1220여종에 이른다.
이중 규모가 큰 곳으로는 대전 산내와 경북 경산이다. 진실화해위와 유족들은 대전 산내에 3000~7000명,경북 경산의 코발트광산에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재판받으러 간다며 속이고 총살 =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고양경찰서는 1950년 10월 지역주민 중 북한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해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농협창고 등에 감금했다.
연행된 사람은 최의현씨 외 75명을 포함해 153명 이상으로 추정됐다. 당시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근무했던 정 모씨와 태극단원 이 모씨는 “임시 유치장에 20여명 농협창고에 100명 이상 있었다”며 “송포지서 임시유치 창고에도 200여명이 감금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병원에 보관되어 있는 ‘유골·유품에 대한 감정결과 중간보고서’(1998)에서도 “희생자 숫자는 최소한 153명 이상일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다시 이들을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한 번에 20~40명씩 금정굴로 끌고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했다. 경찰이 관련희생자들을 처형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재판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는 5인 1조의 경찰관 2개조가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해 살해한 것으로 진실화해위는 확인했다.
조사결과 이들은 대부분 농민들로서 이중 일부는 북한 점령당시 인민위원회 활동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이나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
진실화해위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부역혐의보다는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살해도 있었다. 재판 판결문인 형공 제 1838호에서 “평소부터 원한을 포지하고 있던 한00을 좌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라고 무고해 사살케 하고 …”라며 개인 간의 원한으로 학살한 사실을 인정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생계의 터전인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고, 연좌제에 따라 취업의 권리가 박탈되거나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는 등 고통을 당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자 유족회 관계자는 “유골을 수습해 위령설치물 및 공원을 조성해 평화·통일의 교육장으로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군인이 마을포위 불 지르고 민간인 학살 = 진실화해위는 1949년 12월 경북 문경군 석달마을에서 국군 2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와 3소대가 저지른 학살을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이라고 결론지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국군 70여 명은 1949년 12월 정오쯤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석달마을에 도착해 마을을 불지르고 이를 피해 집밖으로 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서 총살하고 확인·사살했다. 한편 군인들은 산모퉁이에서 학교에서 마을로 돌아오던 초등학생들과 마을 청·장년들도 총살했다. 이 과정에서 86명의 민간인이 총살됐다.
당시 군인들은 석달마을에 공비들이 출몰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들에게 음식 등 편의를 제공했다고 단정하고 총살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현장에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만 있었음에도 어떠한 확인절차나 선별 조치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에 협력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이 사건은 언론에서 ‘공비들의 만행’으로 보도됐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규명도 요구 = 진실화해위는 북한군에 의해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양평적대세력사건’과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0일 밝혔다.
‘양평적대세력사건’은 신청인 강대흥씨 등 31명이 지난 1950년 9월 26일에서 30일 경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인민군과 정치보위부 내무서원에 의해 양평군 양평면 일대 마을주민 약 600여명이 희생됐다며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이다.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 이명곤 부대변인은 “좌·우 이념을 떠나 진상규명이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에 기여하길 바란다”며 “진실규명의 목적은 전쟁의 비극을 되새겨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34조에 ‘국가는 진실규명 사건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 가해자에 대하여 적절한 법적·정치적 화해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되어있다”며 “법률에 의거해 진실이 규명되고 그를 바탕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염원했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이경기 전예현 김은광 윤여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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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은 7월 27일 정전협정 54주년을 맞이해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평화의 달’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남한 군·경 민간인 학살 드러나
북한 인민군도 학살실체 규명해야
국방부 전사 편찬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으로 한국군·유엔군 전사 48만, 북한군·중국군 전사 150만, 민간인 사망 40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명에 달한다. 이 중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이 한국정부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송기인 신부)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고양 금정굴 사건과 경북 문경 석달마을 사건이 한국전쟁 시기에 경찰과 군인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적인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으로 진실·규명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나주 봉황 나주 동창교 함평 11사단 사건 등 5건이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진실화해위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학살현장을 발굴하고 있는 곳은 전남 구례 봉성산과 충북 청원 분터골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대전 산내면 등 4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이 학살됐다며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건은 7500여건이며 이를 사건별로 분류하면 1220여종에 이른다.
이중 규모가 큰 곳으로는 대전 산내와 경북 경산이다. 진실화해위와 유족들은 대전 산내에 3000~7000명,경북 경산의 코발트광산에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재판받으러 간다며 속이고 총살 =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고양경찰서는 1950년 10월 지역주민 중 북한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부역혐의로 행불 또는 도피한 자의 가족을 연행해 지서 및 치안대 사무실농협창고 등에 감금했다.
연행된 사람은 최의현씨 외 75명을 포함해 153명 이상으로 추정됐다. 당시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근무했던 정 모씨와 태극단원 이 모씨는 “임시 유치장에 20여명 농협창고에 100명 이상 있었다”며 “송포지서 임시유치 창고에도 200여명이 감금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병원에 보관되어 있는 ‘유골·유품에 대한 감정결과 중간보고서’(1998)에서도 “희생자 숫자는 최소한 153명 이상일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다시 이들을 고양경찰서로 이송한 다음 한 번에 20~40명씩 금정굴로 끌고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했다. 경찰이 관련희생자들을 처형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재판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는 5인 1조의 경찰관 2개조가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해 살해한 것으로 진실화해위는 확인했다.
조사결과 이들은 대부분 농민들로서 이중 일부는 북한 점령당시 인민위원회 활동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이나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
진실화해위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부역혐의보다는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살해도 있었다. 재판 판결문인 형공 제 1838호에서 “평소부터 원한을 포지하고 있던 한00을 좌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라고 무고해 사살케 하고 …”라며 개인 간의 원한으로 학살한 사실을 인정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생계의 터전인 재산을 빼앗기기도 했고, 연좌제에 따라 취업의 권리가 박탈되거나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는 등 고통을 당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자 유족회 관계자는 “유골을 수습해 위령설치물 및 공원을 조성해 평화·통일의 교육장으로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군인이 마을포위 불 지르고 민간인 학살 = 진실화해위는 1949년 12월 경북 문경군 석달마을에서 국군 2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와 3소대가 저지른 학살을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이라고 결론지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국군 70여 명은 1949년 12월 정오쯤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석달마을에 도착해 마을을 불지르고 이를 피해 집밖으로 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서 총살하고 확인·사살했다. 한편 군인들은 산모퉁이에서 학교에서 마을로 돌아오던 초등학생들과 마을 청·장년들도 총살했다. 이 과정에서 86명의 민간인이 총살됐다.
당시 군인들은 석달마을에 공비들이 출몰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들에게 음식 등 편의를 제공했다고 단정하고 총살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현장에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만 있었음에도 어떠한 확인절차나 선별 조치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에 협력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이 사건은 언론에서 ‘공비들의 만행’으로 보도됐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규명도 요구 = 진실화해위는 북한군에 의해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양평적대세력사건’과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0일 밝혔다.
‘양평적대세력사건’은 신청인 강대흥씨 등 31명이 지난 1950년 9월 26일에서 30일 경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인민군과 정치보위부 내무서원에 의해 양평군 양평면 일대 마을주민 약 600여명이 희생됐다며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이다.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 이명곤 부대변인은 “좌·우 이념을 떠나 진상규명이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에 기여하길 바란다”며 “진실규명의 목적은 전쟁의 비극을 되새겨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34조에 ‘국가는 진실규명 사건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 가해자에 대하여 적절한 법적·정치적 화해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되어있다”며 “법률에 의거해 진실이 규명되고 그를 바탕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염원했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이경기 전예현 김은광 윤여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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