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터에서의 단상
대신경제연구소 경제조사실장 김윤기
얼마 전 한 국책경제연구기관에서 여의도 증권가의 민간경제연구소로 이직하였다. 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던 해 청운의 꿈을 안고 경제연구소에 발을 디딘 지 10년 만에 밥벌이 터를 옮기게 된 것이다. 요즘은 직장을 옮겨 다니는 일이 다반사이고 이직 횟수에 비례해서 그 사람의 능력이 평가되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박봉이지만 준공무원 신분과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고 무엇보다 상아탑을 연상케 하는 직장 분위기를 박차고 나서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초반 지방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상경하여 여의도에 본사가 있는 모공사기업에 입사원서를 제출하러 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빌딩이 즐비만 여의도 금융가에서 직장을 갖고 폼 나게 근무하는 게 나같이 경제 관련 전공자들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당시에 합격을 하지 못하고 여의도 입성은 못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엔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대기업 본사에 운 좋게 입사한 뒤 세 달도 못 채우고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국책연구원의 연구원이 되었다. 때마침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겪는 해인 97년도에 입원하게 되어 하루 하루를 정신 없이 보냈지만 국가경제의 난국을 헤쳐가는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한 기억이 난다. 연구실 마다 미니 국기를 책상 앞에 꽂아두고 투철한 국가관으로 뭉쳐진 양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때를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당시 우리 나라 거시경제 분야의 주요 쟁점들을 다루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중요한 일에 미력하나마 참여하고 IMF의 위기 극복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일은 국책연구원에서 일한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지금도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변한 건지 사람이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구원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뭔가 변화를 갈구할 시점에 때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엔 말썽임이 없진 않았지만 이미 많은 선후배들이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들로부터 익히 많은 얘기를 듣고 권유도 있었던 터라 결정은 빨랐다. 벌써 새로운 일터로 온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전과 달라진 생활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된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퇴근하면서 가로등이 켜진 한강을 바라보며 강변을 달릴 때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끔 가슴이 벅차 오를 때가 있다. 14년 전 사회 초년생으로 첫 발을 내딛고자 했던 이곳을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정착한 느낌이 들곤 하기 때문일까? 바빠진 생활로 몸은 피곤하지만 가슴은 사회초년병처럼 늘 긴장되고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하다. 오늘도 여의도의 늦은 밤 빌딩 숲 사이로 불빛은 밝게 빛나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과 빠르게 돌아가는 일 처리 그리고 경쟁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지만 이 모두가 나에게는 새로운 일터가 가져다 주는 기쁨으로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오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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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경제연구소 경제조사실장 김윤기
얼마 전 한 국책경제연구기관에서 여의도 증권가의 민간경제연구소로 이직하였다. 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던 해 청운의 꿈을 안고 경제연구소에 발을 디딘 지 10년 만에 밥벌이 터를 옮기게 된 것이다. 요즘은 직장을 옮겨 다니는 일이 다반사이고 이직 횟수에 비례해서 그 사람의 능력이 평가되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박봉이지만 준공무원 신분과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고 무엇보다 상아탑을 연상케 하는 직장 분위기를 박차고 나서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초반 지방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상경하여 여의도에 본사가 있는 모공사기업에 입사원서를 제출하러 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빌딩이 즐비만 여의도 금융가에서 직장을 갖고 폼 나게 근무하는 게 나같이 경제 관련 전공자들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당시에 합격을 하지 못하고 여의도 입성은 못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엔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대기업 본사에 운 좋게 입사한 뒤 세 달도 못 채우고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국책연구원의 연구원이 되었다. 때마침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겪는 해인 97년도에 입원하게 되어 하루 하루를 정신 없이 보냈지만 국가경제의 난국을 헤쳐가는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한 기억이 난다. 연구실 마다 미니 국기를 책상 앞에 꽂아두고 투철한 국가관으로 뭉쳐진 양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때를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당시 우리 나라 거시경제 분야의 주요 쟁점들을 다루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중요한 일에 미력하나마 참여하고 IMF의 위기 극복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일은 국책연구원에서 일한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지금도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변한 건지 사람이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구원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뭔가 변화를 갈구할 시점에 때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엔 말썽임이 없진 않았지만 이미 많은 선후배들이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들로부터 익히 많은 얘기를 듣고 권유도 있었던 터라 결정은 빨랐다. 벌써 새로운 일터로 온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전과 달라진 생활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된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퇴근하면서 가로등이 켜진 한강을 바라보며 강변을 달릴 때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끔 가슴이 벅차 오를 때가 있다. 14년 전 사회 초년생으로 첫 발을 내딛고자 했던 이곳을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정착한 느낌이 들곤 하기 때문일까? 바빠진 생활로 몸은 피곤하지만 가슴은 사회초년병처럼 늘 긴장되고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하다. 오늘도 여의도의 늦은 밤 빌딩 숲 사이로 불빛은 밝게 빛나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과 빠르게 돌아가는 일 처리 그리고 경쟁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지만 이 모두가 나에게는 새로운 일터가 가져다 주는 기쁨으로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오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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